한국에서 외국어 공부한 이야기 - 8
외국어고등학교에서는 2학년 때부터 영어와 전공 언어 외에도 제2외국어를 따로 배워야 했다. 영어가 곧 전공어인 영어과를 제외하고는 모든 학생이 세 가지 언어를 배워야 했던 것이다.
이과도 예외는 없었다. 사실 외고에서 문과반이 아닌 이과반이나 예체능반을 따로 만드는 것 자체가 편법인 것으로 알고 있다(사족 하나. 나 때는 의외로 예체능계열 희망자가 한 반에 한 명꼴로 있었다). 현실에서야 다들 대입 준비에 더 좋은 환경을 찾아서 외고에 오지만, 명분상으로는 외고란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과를 준비 중인 아이들도 아침과 오후 보충수업을 제외한 정규 수업 커리큘럼은 문과와 똑같았고, 제2외국어도 배워야 했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세 번째 외국어인 제2외국어를 우리는 ‘제3외국어’라는 말로 더 많이 불렀다. 엄밀히 말하면 제1외국어는 영어이고, 전공어는 제2외국어가 아니라 전공어이니, 제3외국어라는 표현은 틀렸지만 그래도 누구나 그 말을 썼다.
제3외국어, 아니 제2외국어는 개인이 전혀 선택할 수 없었고 무조건 한 반에 하나씩 배정되었다. 우리 스페인어과에는 중국어가 배정되었다. 나는 완전히 낯선 언어인 중국어를 새로 배워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사실 그보다도 더 걱정했던 부분은 아이들을 매일같이 혼내고 때리기로 악명 높은 모 중국어 선생님이 우리 반 수업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는데, 다행히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2학년 때의 첫 중국어 선생님은 1학년 때부터 한문 과목을 가르치던 선생님이기도 했기 때문에 새로울 것이 없었다.
3학년 때 우리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게 된 S 선생님은 마흔 전후의 남자였는데, 우리 학교 3대 불가사의의 주인공 중 하나였다.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도 높지만 우리 학교의 3대 불가사의는 대강 이랬다. ‘모 영어 선생님은 왜 안 잘리는가? 음악 선생님의 정체는 무엇인가? S 중국어 선생님은 왜 미혼인가?’ 모 영어 선생님은 여학생들을 한 명씩 불러다 놓고 귓불을 만져대다가 학교 전체에 들통이 났는데도 해고당하지 않았으니, 불가사의가 되는 것도 타당했다. 음악 선생님은 워낙 캐릭터가 독특했기 때문에 농담 삼아 불가사의라고 부를 만도 했다. 하지만 중국어 선생님의 사생활을 두고 이러니저러니 했던 것은, 지금 생각하면 그냥 지루한 학교생활에서 나온 오지랖이었다. 미혼이 아닌 비혼이라는 말 자체가 아직 생소한 시절이기도 했다.
선생님이 누가 됐든 중국어 수업은 꽤나 한가로웠다. 이미 공부할 과목이 너무 많았던 우리는 제2외국어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학교 쪽도 그저 교과 과정에 있는 과목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업을 했던 것 같다. 2학년 두 학기 동안 교과서의 절반도 진도를 나가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3학년 때는 아예 중국어 수업의 대부분이 자습 시간이 되었다. S 선생님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학교의 암묵적인 방침이었을 것이다. 자습을 하라고 말한 후 좁은 교실을 50분 내내 천천히 걸어 다니던 S 선생님은 꽤나 무료해 보였다.
그렇게 해서 배운 것도 아니고 안 배운 것도 아닌 중국어는, 간단한 인사말을 제외하고는 당연히 한 마디도 기억나지 않는다. 고등학교 이후로도 중국어를 배울 기회는 없었다. 이제는 중국인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가게마다 중국인 직원을 고용하는 동네에 몇 년째 살고 있는데도, 여전히 간단한 인사말밖에 알아듣지 못한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무협 영화를 아주 좋아했는데. 애니메이션으로 일본어를 독학하기 시작한 것이나 미국 TV 프로그램을 통해 영어에 재미를 붙이게 된 것과는 달리, 이상하게도 무협 영화는 중국어에 입문하는 계기나 배경이 되지 못했다. 무협 영화에 나오는 중국어가 일상생활에서는 쓸모가 없기 때문일까? 그게 이유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일본어도 상당 부분은 일상생활에서 쓸모가 없다.
그저 아직까지 중국어와 나는 서로 인연이 없었던 것 같다. 언젠가 내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중국어를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치 노래를 따라 부르듯 중국어 성조를 따라 읽는 재미. 내 이름을 중국어로 읽으면 ‘리팅웨이’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신기함. 고등학교 때의 짧은 배움에서는 그 정도만 간직하고 있어도 괜찮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