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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서 배운 무성음과 유성음

한국에서 외국어 공부한 이야기 - 7

by 이정미

외국어고등학교라는 체면 때문에 학교에서 신경을 썼는지, 아니면 내가 들은 수업들만 그랬는지는 몰라도, 우리 학교의 영어 수업은 대체로 속이 꽉 차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를 한 곳만 다녔기 때문에 다른 학교와 비교해서 판단할 수는 없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영어 수업에서 배운 것이 많다. 그때 영어는 내가 싫어하는 과목에 속했는데도 그랬다.


특히 그 후로도 오랫동안 도움이 된 것은 무성음(성대가 울리지 않는 소리)과 유성음(성대가 울리는 소리)을 의식하게 된 일이었다. 영어의 무성음과 유성음이 한국어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한 선생님에게 배운 것이 계기였다.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었고, 그 선생님이 뭔가 다른 것을 설명하다가 덤으로 가르쳐 준 지식이었다.


“영어의 유성음이 한국어로 오면 된소리가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Gum은 유성음이죠. 그런데 우리가 슈퍼에 가서 껌을 살 때, 영어 발음 그대로 ‘아줌마, gum~ 주세요.’ 라고 하지 않잖아요? ‘껌 주세요.’ 라고 하지요. G의 유성음을 쌍기역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저 ‘gum~’ 발음을 한글로 어떻게 옮겨야 할지 모르겠다. 직접 영어권 사람들을 흉내 내며 발음해 봐야 느낌이 온다)


선생님이 “Gum~ 주세요.” 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웃었다. 한국어 문장 속에 들어있는 ‘gum’이 혼자서만 소위 ‘빠다 발음’이었기 때문에 어색하게 들렸던 것이다. 한국어에 섞인 영어 유성음의 발음은 그렇게 이질적이었다.


우리는 웃었지만 선생님은 설명을 이어 나갔다.


“목에 손가락을 대고 발음해 보세요. ‘ㄱ’이 단어에서 맨 처음에 오면 무성음이기 때문에 성대가 많이 울리지 않아요. 영어의 ‘G’는 유성음이기 때문에 성대가 확실하게 울립니다.”


(무성음이라고 해서 성대가 전혀 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음인 ‘ㄱ’만 순수하게 분리해서 발음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모음을 섞어서 발음하게 되는데, 모음은 유성음이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Gum’은 ‘검’이 아니다. ‘껌’은 ‘검’보다는 조금 낫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니다. 한국어의 ‘ㄱ’과 ‘ㄲ’은 어절 첫머리에 올 때 모두 무성음이고, 그래서 유성음인 영어의 ‘G’와는 다르다.


한국어를 영어로 표현할 때에도 비슷한 문제가 생긴다. 김 씨를 영어로 쓸 때 ‘Gim’이 아니라 ‘Kim’이라고 쓴다는 사실은 훨씬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진짜 이유는 이 때 처음 알게 되었다. ‘김’의 ‘ㄱ’은 무성음이기 때문에 영어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유성음인 ‘G’보다는 무성음인 ‘K’에 가깝게 들리는 것이다.


‘G’와 ‘ㄱ’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자음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한국어의 자음에서 위치와 무관하게 항상 유성음인 것은 ‘ㄴ, ㄹ, ㅁ, ㅇ’밖에 없다. 다른 자음들은 모두 무성음이고, 위치에 따라 유성음화할 수 있다.


영어뿐만이 아니라 다른 외국어들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본어의 ‘トヨタ’가 영어에서는 ‘Toyota’가 되지만 한국어에서는 ‘도요타’가 된다. 한국어의 ‘도’가 어절 첫머리에 오면 일본어의 ‘ト’, 영어의 ‘T’와 마찬가지로 무성음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지식은 일본어를 공부할 때에도 도움이 많이 됐다.


배우고 나면 쉽다. 그러나 배우기 전까지는 생각해 보지 못하고 놓치기 쉬운 부분이다. 고등학교 때 그 선생님에게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혹은 수업 시간에 깜빡 졸거나 해서 그 내용을 놓쳤다면, 깨닫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을 수도 있다. 10년 후 강남스타일이 미국에서 유행할 때 ‘강남’의 한국 원어 발음을 들은 미국인들이 “아, Gangnam이라고 쓰여 있지만 실제 발음은 Kangnam에 가깝군요!” 라고 말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고등학교 때의 그 수업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때까지도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성함은 기억 안 나지만, 영어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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