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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민 회화 선생님들의 추억

한국에서 외국어 공부한 이야기 - 6

by 이정미

내가 다니던 외국어고등학교에서는 1학년과 2학년 때 원어민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회화 수업이 있었다. 영어와 전공 언어였다. 우리 과의 영어 원어민 선생님은 1학년 때는 미국에서 온 젊은 M 선생님, 2학년 때는 캐나다에서 온(기억이 확실하지 않지만) 30대 중반의 S 선생님이었다. 스페인어 원어민 선생님은 페루에서 온 중년의 A 선생님이었다. 모두 남자였다. 다른 과는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 스페인어과에서는 영어 회화 시간은 노는 시간에 가까웠고, 반대로 스페인어 회화 시간은 한국인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정규 수업보다도 훨씬 긴장되는 시간이었다.


스페인어의 A 선생님이 특별히 무섭게 굴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 앞에서 언성을 높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끔 잡담을 하다 걸린 아이에게 스페인어로 노래를 시키는 것 정도가 가장 큰 벌칙이었다(우리가 아는 스페인어 노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레퍼토리는 항상 비슷했다). 다만 뭐라고 할까, 아주 프로페셔널했다. 수업 내용과 관련이 없는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농담도 잘 하지 않았고, 웃는 일도 흔치 않았다.


그렇다고 수업이 지루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공부할 양이 많았기 때문에 솔직히 기다려지는 시간까지는 아니었지만, A 선생님에게는 수업 시간 50분 동안 우리의 머릿속에 지식을 조금이라도 더 넣어 주려는 열의가 있었다. 진도가 상당히 빠르면서도 낙오하는 사람 없이 다 끌고 나아가는 수업이었다.


우리가 딴 짓을 하지 못하고 수업에 집중한 이유 중 하나도 진도가 정신없이 빠르다는 것이었다. 가령 한국인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정규 수업에서 ‘안녕하세요. 나는 학생입니다.’를 여러 번 반복하는 동안, 회화 수업에서는 ‘실례합니다. 택시 정류장이 어디인가요?’와 ‘콜라 두 잔과 물 한 잔 주세요.’를 지나 ‘이번 달 10일에 2인실을 예약하고 싶습니다.’ 까지 착착 나아가는 식이었다. 한국인 선생님들이 게을러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교재의 진도 자체가 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규 수업은 기초를 착실하게 다지는 일, 회화 수업은 실생활에서 쓸 수 있는 다양한 표현을 배우는 일이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A 선생님에게는 우리에게 그 빠른 진도를 소화시킬 역량이 있었다.


2학년 2학기,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기 시작했을 때에야 A 선생님의 개인사를 아주 조금 들을 수 있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한국을 처음 방문했고 그 때 한국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이민을 왔다고 한다. A 선생님이 약간의 잡담을 하면서 활짝 미소를 짓는 모습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신선한 동시에 마음이 따뜻해지기까지 하는 경험이었다. 회화 시간에 한국어를 한 마디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었기 때문에 A 선생님의 한국어를 전혀 들어보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다.


영어 회화 수업은 대조적이었다. 1학년 때의 M 선생님과 2학년 때의 S 선생님 모두 북미 사람 특유의 해맑음이 있었다. 둘 다 항상 웃는 얼굴이었고 처음부터 우리를 친근하게 대했다. 그래서 선생님들을 만만하게 보고 무례하게 구는 아이들도 조금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대체로 예의를 지켰지만, 가끔은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산만해져서 다 같이 떠들어대기도 했다. 1학년 때 한 번은 정도가 지나쳐서 M 선생님이 처음으로 화를 냈다. 처음에는 “Be quiet” 라고 소리치다가 나중에는 “Shut up” 까지 나왔다. 2학년 때의 수업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떠들지 않을 때 우리의 수업 태도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다. 아무리 외고 학생이라고는 해도 우리 중 대부분은 영어 울렁증이 있었다. 질문을 받으면 짧은 말로 간신히 대답하고 곧 입을 다물었다. M 선생님은 결국 포기하고 미국 TV 프로그램을 보여주면서 시간을 때우기 시작했다. 드라마 <프렌즈>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나중에는 <잭애스>를 보여줬다. 과격하다 못해 위험한 슬랩스틱 코미디였는데, 제일 큰 문제는 대사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본 에피소드들에서는 영어를 한 마디도 배울 수 없었다. 그래도 아이들 사이에서 불만은 나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바쁜 외고 생활에서 쉬어가는 시간 정도로 느꼈던 것 같다.


2학년 때의 S 선생님은 키가 2미터를 넘었기 때문에 ‘그 키 큰 외국인’으로 학교 전체에서 유명했다. 한국인과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처가에 제사를 지내러 갔더니 장인어른이 술에 취해서 똑같은 말을 하고 또 하더라고 이야기하던 것이 기억난다.


선생님들이 볼 때 우리가 훌륭한 학생이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M 선생님과 S 선생님을 좋아했다. 특히 우리 중 몇 명이 S 선생님에게 감동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우리 반 담임도 아닌 어떤 한국인 선생님이, 단지 학교 내에 여자친구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반 남자아이의 뺨을 마구 때린 일이 있었다(2000년대 초 학교생활이란 그랬다). 그 때 우연히 그 광경을 본 S 선생님이 진심으로 화를 내면서 그 선생님과 싸우려 들었다. 다른 선생님이 뜯어말려서 상황은 곧 진정되었지만 우리 눈에는 S 선생님이 마치 영웅처럼 보였다.


그러나 2학기 때 S 선생님은 본인의 잘못으로 한국에서의 생활을 망치고 말았다. 우리 학교의 다른 영어 회화 선생님과 함께 대마초를 피웠다가 경찰에 들킨 것이다. 두 사람은 체포되지 않기 위해 태국으로 도망쳤다. 이 사건에 대한 기사가 신문 한 귀퉁이에 나기까지 했다. 우리는 충격에 휩싸였다. 선생님 두 명이 한 번에 그렇게 됐으니 학교 측도 굉장히 난감하고 망신스러웠을 것이다. 일단 우리 반의 나머지 수업은 M 선생님이 맡았다. 곧 우리는 3학년이 되었고 3학년 커리큘럼에는 회화 수업이 없었다. 좋지 않은 기억으로 영어 회화를 마무리하게 된 셈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서양인 친구들을 사귀면서, 많은 서양인들은 대마초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많은 지역에서 합법화도 되었다. 그래도 한국에 가정까지 꾸린 사람이 한국 내에서 대마초를 피우다니 무책임한 행동이다. 부인은 얼마나 막막했을까. 장인어른은 그 일 때문에 여러 번 술에 취하지 않았을까.


그 사건을 계기로 우리 학교가 영어 회화 선생님들에게 적용하는 기준이 달라진 것 같다. 원래는 젊은 사람이 많고 복장도 자유로웠는데, 그 후로 새로 들어온 선생님들은 나이도 많은 편이고 넥타이를 매고 다녔다. 실제 수업이 얼마나 개선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겉보기에는 꽤 그럴싸했다. 어쨌든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기는 했다. 1년 전에도 한 여자 원어민 선생님이 수업 중에 욕설을 너무 많이 해서 해고된 일이 있었다.


지금 모교의 영어 회화 수업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나 때’보다는 훨씬 질이 높을 것이라고 믿는다. 요즘 아이들은 당시의 우리보다 영어로 말하는 데에 더 익숙할 것이다. 학교 쪽도 우리 때와 같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노하우가 쌓였을 것이다. 외고 자체도 우리가 다니던 때보다 더 치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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