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프롤로그

스트레이, 익명의 미국인 이야기 - 프롤로그

by 이정미

- 미국에서 가난하게 자란다는 건 이상한 경험이야.


스트레이는 그렇게 말했다. 힘들고 극적인 삶은 세계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스트레이의 삶에서 가장 어두운 부분들과 가장 밝은 부분들은 모두, 스트레이가 미국인이 아니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자주 그렇게 확신한다.


같은 미국인들도 스트레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면 놀라고 신기해한다. 누군가는 영화로 만들어야 할 이야기라고 했다. 그때 스트레이는 자신의 삶에 대한 책을 쓴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옛날에 노숙하던 시절, 항상 공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거기에 썼다고 한다. 남에게 보여줄 생각으로 쓴 것은 아니었다. 아마 생각날 때마다 일기처럼 끼적였을 것이다.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복수로 공책들notebooks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분량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공책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스트레이가 어느 수상쩍은 빈 건물에서 자고 있을 때 누군가가 짐을 훔쳐갔고 그 속의 공책들도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그 중 대부분을 되찾지 못했다. 그 후로는 다시 글을 쓸 의욕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설령 다시 쓰게 된다고 해도 나를 포함한 지금의 지인들에게 보여줄지는 잘 모르겠다고 스트레이는 말했다. 지금 자신은 과거의 자신과 아주 다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이 구치소에서 지낸 적이 있다고 스트레이가 말하는데, 그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 중 한 명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반문하는 것을 나도 본 적이 있다. 구치소에 있었다고? 네가?


놀랍게 들렸을 만도 하다. 그 대화가 있었던 당시에 스트레이는 대도시 중심가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보다도 더 큰 이유는 실제 나이보다 많이 어려 보이는 외모가 아니었을까.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은 나이 들어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자신은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어려 보여서 다행이라고 스트레이는 말한다.


스트레이의 첫인상에서 안락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손의 문신 정도다. 스트레이의 경우는 교도소에서 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서는 손에 문신이 있으면 교도소에서 징역을 사는 동안 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여러 번 부러졌다 붙어서 비뚤배뚤한 손가락들, 부러진 어금니들은 더 자세히 보아야만 눈에 띈다. 스트레이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감추지 않지만 자랑스럽게 떠벌리지도 않는다.


언젠가 내가 스트레이의 이야기 몇 개를 들은 후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맙다고 하자, 스트레이는 책을 완성하면 한 권 보내주겠다고 농담을 했다.


- 언제?

- 이대로 가면 50년은 걸리겠지.


아마 50년 뒤에도 책은 완성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스트레이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넘기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항상 생각했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 스트레이와 더 친해졌을 때, 내가 대신 글을 써 주겠다고 스트레이에게 말했다. 스트레이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에 그 정도로 진지하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데에 놀란 것 같았다. 그리고 선선히 허락했다.


스트레이의 모국어인 영어로 쓰지 못하는 것이 조금 미안하다. 그래도 나름대로 내가 한 말을 지킨다는 데에 의미를 두고 있다. 스트레이는 한글을 읽을 수 있고 한국어 단어를 조금 알지만 완전한 문장을 해석하지는 못한다. 언젠가 나 또는 그 외의 사람이 스트레이를 위해 이 글을 영어로 옮겨 줄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accordion full(Philadelphia 2009 probably).png 스트레이가 노숙을 하며 미국 전국을 떠돌던 만 스무 살 때, 필라델피아 동부에서 노숙인들을 촬영하던 어느 사진작가가 찍어 준 사진


(*예전에 '스트레이, 미국의 빛과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수정 보완해서 다시 연재합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