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이, 익명의 미국인 이야기 - 1
스트레이는 1988년 가을, 시카고 남부의 슬럼가에서 태어났다.
스트레이Stray는 ‘원래의 위치 또는 길을 벗어나다’, 또는 ‘떠돌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가명이다. 이 글을 위해 지어낸 이름은 아니고 스트레이가 예전에 실제로 본명 대신 쓰던 이름이다.
노숙하던 시절 만난 사람 절반 정도에게 스트레이는 본명을 가르쳐 주지 않고 그냥 스트레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한국어로 생각하면 “그냥 떠돌이라고 불러 줘.”라고 말한 것과 비슷할까? 그렇게 생각하니 재미있다. 마치 오래된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장면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현실적인 문제다. 미국에는 일정한 주거 없이 전국을 떠도는 젊은 사람들이 적지 않고, 그 사람들은 대개 스트레이가 그랬듯 가명을 쓴다고 한다. 자신의 본명을 아는 사람이 없으면 경찰과 문제가 생겼을 때 경찰에게 자신의 본명을 흘릴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나도 스트레이의 본명은 밝히지 않겠다. 이름도 흑인에게 훨씬 흔한 이름, 성도 흑인에게 훨씬 흔한 성이라는 것 정도는 밝힐 수 있다. 사람들이 스트레이의 이름만 듣고 흑인이라고 짐작했다가, 실제로 만나서 흑인이 아닌 것을 보고 놀랄 정도라고 한다.
스트레이의 이름을 지어준 어머니는 백인이다. 성은 멕시코계 아버지의 것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서 성을 물려받았지만 할아버지도 흑인이 아닌 히스패닉이었다. 왜 흑인이 아닌 할아버지가 흑인의 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스트레이는 잘 모른다. 혼혈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스트레이는 자신의 가족에 대해 모르는 것, 내지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많다.
수염도 기르지 않고 햇볕도 많이 받지 않을 때 스트레이는 거의 완전히 백인처럼 생겼다. 노숙을 시작한 첫 해의 체포 기록에도 인종이 백인이라고 되어 있다.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어두운 갈색이지만 백인 중에도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어두운 사람은 많다. 혼혈이라는 사실을 이미 아는 상태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풍성하고 진한 눈썹에서 멕시코 혈통이 조금 엿보이는 정도다. 다만 바닷가 같은 곳에 가서 햇볕에 그을리면 피부가 금세 어두워져서 멕시코계임이 확실해진다. 곱슬곱슬하고 풍성한 수염을 기를 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갑자기 스페인어로 말을 걸 정도다.
스트레이는 스스로의 인종을 이야기할 일이 있을 때 항상 멕시코계라고만 말한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백인 혈통은 언급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거나 아버지 쪽 친척들과 가깝게 지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기 때문에 가족에게서 스페인어를 배울 기회조차 없었다. 그나마 멕시코계 사람들이 많은 지역에서 자랐기 때문에 스페인어를 대강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말은 잘 하지 못한다. 기본적인 말 몇 마디는 주고받을 수 있어도 억양은 완전히 미국인이다. 마찬가지로 읽기는 어느 정도 가능해도 쓰기는 아주 기본적인 수준밖에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자신을 백인이라고 정의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사회적 계층인 것으로 보인다. 스트레이가 자란 시카고에서는 인종에 따라 생활여건이 많이 달라진다고 한다. 자신이 살던 슬럼가에는 히스패닉과 흑인이 대부분이었고, 슬럼가 바깥에서 자신과 다르게 부유한 삶을 사는 사람들 중에는 백인이 많았다. 자신을 백인들과 동일시할 일이 그다지 없었던 것이다. 화이트칼라 계층으로 상승해 몇 년간 여유롭게 생활했던 시절에도 그 사고방식에는 변함이 없었다. 스트레이가 스스로를 유색인종이라고 말할 때의 태도에서는 비주류만이 가질 수 있는 일종의 자부심마저 엿보인다.
(*예전에 '스트레이, 미국의 빛과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수정 보완해서 다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