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될 대로 돼라 : 세상 홀로인 느낌이 들 때.

by 얼간이

무슨 일 때문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프랑크프루트에서 잠시 지체할 새도 없이 곧바로 바르샤바행 비행기를 탔던 기억은 또렷한걸 보니 꽤나 다급한 출장이었던가 봅니다.

오십 대 덩치가 산만한 스튜어디스가 대부분이었던 LOT Polish 즉, 폴란드 국영항공사의 오래된 기재였는데
의자 자체가 너무나 덜컹거려 정상 비행 중에도 위기감을 느낄 정도였죠.
안 그래도 불안한데 방송으로 계속해서 악천후이니 안전벨트를 매라는 멘트가 나오자 비명까지는 아니지만 기내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고 그 긴장감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커져서 눈에 띄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이를 앙다문 신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저도 손잡이를 잡은 손에서 식은땀이 넘치는 바람에 몇 번이나 닦아낼 정도였고 내심 정말 산재처리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스럽게 만들던 비행기가 몇 번이나 비정상적인 궤적을 그리고는 겨우 착륙을 했을 때가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어요.

"될 대로 돼라".

빌어먹을 긴장이 막 지겨워질 즈음 뇌리 한편에 떠 오른 말. "될 대로 돼라". 이미 비행기를 탄 이상 떨어진들 피할 길 없고 최악은 죽음일 거라는 거. 아니면 다행인 거고. 그런데 그 생각을 하자마자 착륙하더군요. 웃기죠. 누가 장난이라도 친 것처럼 기력을 탈탈 털고는 포기할 즈음 풀어주는 느낌.

눈이 정말이지 함박눈이라 부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내렸어요. 언 듯 우리 비행기 다음 편들은 모두 우회 착륙을 할 정도로 갑작스러운 폭설이었다는 말을 들은 듯도 합니다.
(이 모든 걸 무릅쓰고 떠날 만큼 다급한 출장이었는지 의문이군요.)
어쨌거나 수동 트랩을 겨우 대고 내려도 된다는 신호가 났을 때는 다리가 저릴 정도로 긴장을 했는데 문이 열리고 찬바람을 휙~맞는 순간 얼마나 청량하던지 방금 손에 쥐고 있던 식은땀이 주는 불쾌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어요.
버스가 왔어요. 그 사이에도 눈은 펑펑 내려 정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라서 버스가 달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는데 딱히 그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버스가 한참 동안 제자리더군요.
어느 순간 기사가 시동을 걸어둔 채 밖으로 나가 돌아오질 않았고 같이 비행기를 탄 몇몇도 무슨 일인지 비행기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저는 그냥 버스에 내려서 광활한 공항의 활주로를 지켜보기로 했죠. 어차피 그냥 두고 떠나지는 못할 테니.
동유럽 특유의 어떤 냄새. 약간의 비릿함이 있지만 나쁘지는 않은 그런 냄새와 함께 눈발 사이로 가로등이 비쳤어요
그때 갑자기 뭔가 신이 나기 시작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랬죠.
뭔가 생동감이 있는, 그렇다고 밤이 가지는 은밀함까지는 아닌 그냥 안도감 정도 되는 내가 살아 있구나 하는 그런 느낌.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눈발 사이에서도 간간히 보이는 가로등 불빛을 가만히 지켜보는 느낌이 딱 그렇더군요.

20분 전만 해도 생사가 어떻다는 둥. 뭔가 암울함에 가득한 어떤 생각으로 머리를 꽉 채웠던 저는 어느새 변심해서 인생이 나름 괜찮다는 생각을 했죠. 고작 20분 사이에.

인터넷에 종종 안타까운 이야기가 올라왔다 사라집니다.
대부분 인생의 암담함이 가득합니다. 저는 그런 때 지금 처한 상황이 앞으로 제가 처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고려했을 때도 최악인지 생각해봅니다. 최악이라면 더 나빠질 일이 없으니 되는 일이고 그게 아니라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으니 말이지요.

그럴수록 이기기 힘든 건 그 상황에 처한 '나'라는 존재가 느끼는 외로움입니다. 지금쯤 저 아랫사람들은 따뜻한
방에서 가족들과 함께 포근한 저녁을 보내고 있을 텐데 나는 여기서 왜 공포에 떨어야 하나...? 할 때의 외로움. 고립감.
그런데 이겨내기 힘든. 나를 더더욱 힘들게 만드는 이 느낌은 결코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고 살기도 합니다. 길고 지루하기는 하지만 늘 끝은 있을 것이다.
결국 이겨낼 테니 지치지 않는 것. 주변의 어떤 위로도 해결할 수 없는 건 계속 지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당장 나아지지 않아도 지치지 않을 수 있는 것. 그건 자신만이 가능하죠.
막연히 나아지겠지. 가 아니라 <이 상황은 내 생각보다 오래갈 수 있지만 그래도 '케세라세라'다. 결국 '나'는 살아남을 것이거든. > 하는 스스로에 대한 격려가 이 세상 최고의 나를 위한 명약이더군요.

될 대로 돼라! 그래도 결국 승자는 '나!'
우선. 지치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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