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해외 출장에 관해.

by 얼간이

입사 면접 때 제가 다녀온 배낭여행지중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세르비아나 이라크, 레바논 등이 있는 것을 알고 왜 영국이나 프랑스나 미국처럼 "역량 향상에 도움이 될 그런 곳"으로 가지 않았는지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아주 호기롭게 "출장으로 방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했었죠.

딱히 그 이유는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합격을 했고 해외출장이 빈번한 부서에 배치를 받았고 실제로 "그런 곳"이 선진국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곳"으로 출장을 가기 시작했죠.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서는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대학 후배를 우연히 마주쳐서는 그 자리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펍에 들어가 부어라 마셔라 한 적도 있었죠.

독일 프랑크프루트에서는 친해진 독일 호텔 매니저가 추천해준 도수 12도가량되는 아펠바인. 말 그대로 애플와인을 모으고 있었는데, 처음 독일 출장이었던 동료가 '작업용' 술인 5도짜리 아이스와인으로 알고 밤새 퍼 마시고 대취해서는 난동 아닌 난동을 부린 적도 있었죠.
인생이 괴로우니 아이스와인조차 독하다는 둥.. 헛소리를 하다 병원에 실려갔지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는 밤 비행기로 도착했는데 페치까지 자가운전해서 가는 길에 정말 황소만 한 멧돼지가 고속도로를 휙휙 가로지르거나 떡하니 막고 서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란적도 있군요. 멧돼지를 피해 가니 검문소가 있었는데 덩치가 멧돼지 만한 경찰이 돈을 요구해서 차라리 노려보기 만한 멧돼지가 더 낫군. 하며 웃고 말았어요.

중국 출장을 처음 갈 때는 저보다 연차가 십오 년은 높은 부장님과 같이 가는데, 이분이 가기도 전에 너무나'흥분'해서 점점 미쳐가는 것 아닌가 싶었었죠. 수십 차례 출장을 다녀온 경험담이 상해로 가는 내내 방언처럼 터져 나왔는데 주로 개방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중국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여자랑 같이 호텔에 들었는데 수세식 변기 쓰는 법을 몰라서 당황하더라(설마!)부터 몸이 얼마나 더럽던지 자기 손이 닿은 데만 하얗더라 따위의 "개소리"를 듣는 게 꽤 창피하고 더불어 괴로웠던 기억도 납니다. 그런데 막상 중국에 도착하니 그 대단한 '중국 전문가'께서 하필이면 무허가 택시를 골라타고 바가지를 옴 팡 쓰고, 가는 식당마다 어찌 그리 맛도 없는 식당만 고르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는 생각도 했어요.

제가 굳이 짬을 내 항저우의 루쉰(아큐정전의 저자로 중국의 대문호) 생가를 찾는 걸 쓸데없는 짓이라고 단정 하셨던 분이죠. 프랑크프루트의 괴테 생가를 찾는 것은 본인의 철학적 수준에 대한 증명인 것처럼 이야기하셨던 분이었는데 이게 무슨 해괴함이냐. 싶었죠. 하지만 출장 중 존경스러울 정도로 업무처리를 잘하시는 것을 보고 업무적 능력과 인간적 감성이 이렇게 극적으로 다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죠.

지난주에 저를 찾아오셨던 분은 출장은 "가오"라며 자기로부터 삼 미터 이상 떨어지면 평가는 기대 말아라 하셨던 분인데 제가 출국장 전에 미리 대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해 하반기 평가를 뒤엎었어요. 불이익을 각오하고 먼저 들어간 것이긴 해도 왜 출장이 가오가 되어야 하고 일하러 가는 내가 가방모찌를 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서 그분과 출장 갈 일이 생기면 "아이고 몸이야.'', "아이고 집안일이" 해서 피해왔었죠.

그리고는 어느 순간 해외 출장이 피곤해지더군요. 꾹꾹 참아가며 힐튼이네 메리어트네 따지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지쳐가다가 또... 어느 순간 비행기에서 뛰어내릭고 싶은 출장의 고통을 느끼게 되었을 때는 진심 출장뿐 아니라 여행도 관광이 아닌 휴양을 하고 싶더군요.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가는 이야기네요.

***

팰로워가 입사 후 첫 해외 출장을 저와 같이 갈 예정입니다.
임원께 출장 계획을 보고 드리는 제 뒤편에서 그 친구는 함박웃음을 짓습니다.
알지요. 제가 그 기분.

물론 저는 그곳을 수십 차례 다녀왔지만 침을 튀기며 그 친구에게 설명하지 않기로 합니다. 옆구리 쿡쿡 찌르며 "거기까지 가서 주말에 출근할 일은 없어" 합니다.

그리고 덧붙이죠. "주말에 내가 찾을 일도 없을 거야. 알았지?" (그래도 평가에는 영향이 전혀 없을터!)

이쯤 되니 슬슬 근처에 둘러볼 곳을 찾아보는 눈치입니다. 바보같이. 미리미리 찾아봤어야지.

그냥 문득 조카 같은 그 아이가 첫 출장을 회고하며 아주 '좋았다' 하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 '좋았다'라는 기억에 제가 기여를 했으면 합니다.

제가 경험했던 것처럼 이해 못할 '가오'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일을 하러 간 사람답게 충실하게 일하고 주말을 즐기듯 충실히 '타인의 삶을 경험' 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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