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느 읍에서 십오 킬로 정도 떨어진, 하루에 버스가 세 번만 다니는 시골에서 중학생 때까지 자랐습니다.
그 동네 우리 집에서 한 십 킬로 떨어진 곳에 보육원이 있었는데 한때 수백 명이 머물곤 했다니 굉장히 큰 규모였을 겁니다. 초등학교 등하굣길에 거치는 동네 앞에는 작은 우물이 있었고 그 우물에 들러 놀다가 곤 했는데 어느 날 좀처럼 보기 힘든 보육원 아이들이 그 우물에서 놀고 있더군요.
저는 그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말이 어울리는 거지 저보다 네댓 살이니 많은 형들도 있었고 처음에 제 가방을 뒤지는 만행을 저질러서 도무지 친해질 일은 아니었는데 어쨌거나 확실히, 전혀 강압 없이 "우리 집에 놀러 갈래?" 했고 한 일 킬로 떨어진 저희 집에 우~ 몰려가게 되었죠.
그날 어머니는 그 아이들에게 (사실 한눈에 봐도 보육원 아이들이라는 걸 알았을 텐데) 별다른 내색 없이 밥을 차려주셨고 밥을 먹고 잘 놀다가 아이들은 한참을 걸어 보육원으로 돌아갔고 저도 한 삼사 킬로 따라가다 되돌아왔던가 봅니다.
저는 그 친구들이 한 곳에서 그것도 한방에서 매일 같이 잔다는 사실에 몹시 흥분했었죠.
세상에 친구들과 매일매일같이 산다니. 얼마나 재미있을까?
당시 살던 동내에 또래 동네 친구가 하나 없는 외로운 처지에 대단히 신선한 이벤트였고 그건 그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날 엄마가 차려준 경이로운 가정식에 취해 "세상에 그렇게 맛난 밥은 처음"이라는 말을 여러 번 해서 어머니의 표정을 '안쓰러움'으로 바꾸어놓았고 가는 길에도 몇 번이나 정말 맛나더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따지고 보면 그냥 있는 밥을 내준 수준이라 그다지 특별할 일도 그만한 격찬을 받을 일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짬밥보다야 나았을 겁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어느 순간 찾아오질 않았죠. 세상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일시에 연락이 끊기더군요. 처음 만난 아이들이 다 오진 못해도 나눠서라도 놀러 오곤 했는데 저는 한동안 그 아이들을 처음 만난 우물이나 우리 동네 어귀의 미루나무 아래서 그 아이들을 기다리곤 했었죠. 혼자 노는 척은 했지만 연신 먼지를 뒤집어쓰며 그 아이들이 안 오나 길가 끝 쪽을 흘끔 쳐다보곤 했었습니다.
나중에 떠올린 것이지만 무전기로 생각되는 장난감을 신기한 듯 가지고 놀다 그중 가장 큰 형이 "아빠가 이런 것도 사줘?" 하고 묻고는 심히 심란한 표정을 지었던 날이 그 아이들이 놀러 온 마지막 날이었겁니다.
기껏해야 초등 사오 학년이었을 그 형은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을 "평생 처음 먹어본다"라며 몇 번이나 감탄을 했던 바로 그 형인데 아마 그 밥을 포기할만한 심리적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비교. 비교된다는 것
그래봤자 별 볼일 없지만 비교된다는 것.
조선일보 논설위원 이규태 씨의 이야기 중 낙향한 어느 인사의 이사를 열심히 돕던 동네 사람들이 어느 날 그걸 딱 멈추어서 생각해 보니 그날 옮기는 짐 중 가장 대표적인 게 '피아노'였더라는 일화가 있는데 그때 생각한 것도 이질감. 까닭 모를 불편함.
도시사는 친척이 수영장을 데려간다고 내게 싸구려 수영복을 사주었고 어느 날 냇가에
놀러나가며 그 수영복을 입고 나갔을 때 백양 메리 흰색 빤스(분위기상 팬티가 아닌 빤쓰로 표현하는 게 맞겠죠)를 입은 아이들의 시선에서 느꼈던 그런 이질감.
그 다음날 수영복 대신 빤쓰를 입고 가니 자연스레 다시 친구가 되던 경험.
아이들이 입학 초기처럼 여전히 뭔가 부산하게 움직이는데 요즘 제가 느끼는 가장 이질적인 이야기는 "친구를 만들어주려고 애를 쓰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아이 친구 '만들어' 줘야 하는데..."
뭔가 작위적이고 어색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입었던 파란색
수영복. 그 보육원 형이 느꼈을 아빠의 부재와 타인의 상대적 풍요에 대한 본인의 좌절이
새로운 세대에 맞게 변형되어 나타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이들 인간관계까지 부모가 인위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는 시대.
이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