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잘한 글들을 눈여겨 읽는다는 것.

-늘어나는 영혼의 무게에 관해.

by 얼간이

1.
골란고원 인근의 시리아인 마을인 크네이트라에 갔어요.
같은 호텔에 머물던, 비교적 장시간 같이 하여 꽤 친해진 일본 여자분이 가는 길에 마침 할 일이 없었던 저도 따라나선 거였죠. 여기서 사람이 어찌 사나 싶은데 시리아인 청년이 나와서 몇 차례 중동전쟁 중 이스라엘군이 난사한 총알 자국을 보여 주었어요.

가이드를 자처한 청년이 사라지고 저와 그분 하고
같이 걸어가는데 비교적 넓은 황톳길 사이사이에 웅덩이가 파져 있었고 그 여자분이 발을 세게 접질렸어요.
옆에 있던 저도 깜짝 놀랄 정도였죠.

낮은 시멘트 수로 턱에 앉혀놓고 신발을 벗기려 하니
괜찮다더군요.
- 아닌데? 안 괜찮아 보이는데?
신발을 풀고 양말을 벗기려니 깜짝 놀라며 또 괜찮다 해요.
- 잡아먹을까 봐? 어흥~

양말을 벗기고 얼음이 든 냉수에 적신 분홍색 스포츠 타올로 발목을 식히다가 괜찮냐? 하고 물으려 보니 얼굴이 타월만큼 붉더군요.

우리는 왜 그러잖아요. 자기가 아픈 것처럼.
일본은 안 그런가 보네.

한 20분 정도 그렇게 쉬고 다시 걷는데 걷는 게 몹시 불편해
보여서 괜찮냐? 묻는데 대답이 영 시원찮아요.
한 2킬로 정도는 가야 해서 어부바했어요.

나중에 보니 웃긴 일이지만 한국말을 잘 모르는 여자에게
한국말로 "어부바"했다는 거예요.

다른 뜻은 아니었어요.
남 신경 안 쓰고 의사 표현하는 성향이기도 하거니와 저도 운동하다 보면 삐끗한 것과 다른 아킬레스건이 늘어나게 되는 특정한 접질림이 있는데 딱 그랬거든요.

그냥 걷다가는 오늘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한 달이 문제라서 반 강제로 어부바... 해서 한 일 킬로쯤 터덜터덜 걸어오는데 노을이 도시의 스카이라인 아래로 지려더군요.

외로운 황톳길, 숨이 조금씩 차기 시작했고 여자분이 등 쪽으로 바싹 웅크리고 있어 멈추느니 천천히 가자하며 걷는데 차를 타고 지나가는 아까의 가이드를 만났어요. 나중에 보니 가이드는 크네이트라에서 살지 않고 안내만 해서 퇴근하는 길이었어요.

어부바에서 내려주니 얼굴이 노을만큼 붉더군요.

훗날 그러니까 십 년이 훨씬 지난 어느 날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날 이야기를 하며 몹시 부끄러웠지만 한편 '따뜻한 곁'이라는 말을 '이해'했노라고 제게 이야기를 하며 얼굴이 또 빨개지더군요. 적당히 데워진 사케때문은 아니었겠죠.


2.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구 시가에는 거의 천년이 된 성채가 있는데 그 아래 법원이 있었어요.

우연히 법복을 입은 판사 앞에서 한 젊은 청년이 고개를 숙이고 판결을 듣는 장면을 봤는데 판결 내내 이 사람이
도둑질을 해서 샤리아 법대로 손목을 쳐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죠. 그날 백패커 호텔에서 맥주를 마시다 시리아인 사장하고 합석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야기를 했더니 너희가 아는 것과 다른 어떤 것. 이라며 설령 그 사람이 도둑질을 했다고 하더라도 손목이 잘릴리 만무하다며 그러더군요.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지.

3.
대한민국 사람 중에 그곳에 간 사람은 없을 거라 믿는
이스탄불에서 터키 남서부 방향, 그러니까 파묵칼레 쪽의
어느 터키 시골마을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게 되었어요. 왜 거기 갔는지는 그때 쓴 일기를 잃어버려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여하튼 나름 중요한 목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한 시골 청년이 다가와 말을 걸었어요.

거의 막차 시간이었고 첫인상은 굉장히 불량스러웠는데 영어가 아주 능숙했어요. 우연히 일본어도 잘한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한 번도 일본에 가본 적이 없다는 그 청년이
일본어를 영어만큼 잘하더군요. 대체 몇 개 언어를 하는데?
하고 물으니 음.. 아홉 개쯤? 했어요. 그러더니 영어로 묻더군요.
"언어 하나에 영혼 하나라는 것 알고 있냐?"

"너는 영혼이 아홉 개라는 말이지?" 하면서 같이 웃었는데
그날 저녁은 이상하게도 어린 왕자를 만난 사막의 생떽쥐베리가 된 느낌이었어요.

막차가 왔고 청년이 가방을 싣는 걸 도와주려고 고개를 숙이는데 그제야 점퍼가 거의 누더기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제 가방에 검은색 폴리머 재킷이 있었는데 얼른 가방을 열어 건네주려 했어요. 제가 허둥지둥 가방을 여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청년이 그제야 제 의도를 알고
제 손목을 잡더군요.

말은 안 했지만... 그러지 마... 하듯.

놀랍게도 저는 그 청년이 왜 그러지 말라고 하는지
눈빛으로 알았어요.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이해는 하는...
악수를 청하고 악수를 받고 다음에 또 봐하고 서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고 버스에 올랐더니 청년이 버스 기사에게
뭐라 뭐라 했고 버스 기사가 저를 보고는 청년에게 뭐라 뭐라
대답했어요. 그리고 곧 버스가 출발했어요.

저는 청년에게 손을 흔들었고 청년은 고개를 까딱했는데
그 청년이 기사에게 저를 부탁했다는 걸 그냥 알게 되었어요.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고작해야 40분. 그 짧은 시간에
아홉 개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 기껏해야 하나 반의 영혼을
가졌을법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교감을 하고
동정이 아닌 어떤 감정적 우의를 이해하게 만든다는 것...
이게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극명한 차이라는 걸
알게 된 날이었어요.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죠.

안다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차이를 체감한다는 것.


4.
'회고'라는 말이 있어요..
교훈을 전제로 하지는 않지만 뭔가를 떠 올리게 만드는
기억의 헤짚기죠.

별다른 정보도 없는 이런 글을 읽는 건 타인의 회고로 본인의 인생을 '회고'케 하거나 인생에 관한 또 다른 영감, 그러니까 타인의 일생으로 무뎌진 나의 감각을 되살리는 기쁨이 있기 때문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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