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두'라는 이름의 청년이었습니다.
루마니아 부크레슈티 중앙역에 막 도착했는데 아주 선하게 생긴 한 청년이 제게 다가왔어요.
제 또래였어요.
저랑 눈이 마주쳤고 묻더군요.
"너 마리아 예약했지? "
루마니아 여군 하사관으로 장기복무를 했다던 마리아 아줌마네 집은 론리플레닛에서도 유명한 민박집이었어요. 중앙역에서 먼길은 아니었지만 찾기가 의외로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 덕분에 마리아 민박집의
친절이 무척 고맙더군요.
초행이라 방향을 어림잡기가 힘들어 청년 '라두'를 따라가는데 아주 상냥한 청년이었어요.
둘이 담배를 나눠 피기도 했어요.
그런데 라두를 따라가다 가만 보니 철길을 건널 일이 없는데, 철길을 두 번이나 건너길래 물었죠.
"라두! 근데 이 길이 맞아?"
앞서가던 라두가 피식 웃으며 말했어요.
"나... 라두 아닌데?"
대낮인데 소름이 끼쳤죠.
라두가 슬그머니 칼을 꺼내 다가왔고 그냥 오가는 사람들인 줄 알았던 제 뒤의 또래 2명이 붙었어요.
기차 철길 옆이라 기차가 씽씽 지나가는데 칼을 배에 대며 자꾸 철길로 밀더군요.
저는 고맙다는 말을 한국에서도 많이 쓰는데 오는 동안 그 친구에게도 많이 썼었죠.
라두의 강도질에 감사 표시를 했어요.
"친구야. 마리아네 데려다주는 값이 여기 있다. 내 등가방 뒤쪽 그물망에 3천 불 있고 내 뒷주머니에 6백 불 있고 앞 지갑에 2백 불 있어. 나는 여기 처음이고, 지금 여기를 떠날 거고 너희들 얼굴도 모르고,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거야. 약속해. 내가 오늘 부쿠레슈티를 떠나려면 티켓이 필요하니 200불만 남겨줄래? 그게 싫으면 마리아네 앞까지만 데려다줘" 했어요.
라두가 뒤의 청년들과 저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또 피식 웃더군요.
강도랑 흥정하는 놈은 처음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사실 돈보다 그 친구들이 제 가방 자체를 가져갈까 걱정이 되었어요.
라두가 이미 챙겼던 돈에서 백 불을 되돌려주더군요. 카메라와 시계를 가져갈 때 "필름?" 하고 물으니
또 어처구니없다는 듯 또 피식 웃으며 카메라의 필름을 매우 조심스럽게 빼주더군요. 자기 추억이 담긴 것처럼.
삼성 미놀타였어요.
그 돈으로 택시를 타고 마리아네 까지 안전하게 와서 송금을 받았고 그 아름다운 도시에서 계획대로 한 달을
머물렀으며 브란성도 보고 브라쇼브 인근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2차 대전 때의 독일군 전사자 묘지도 봤죠.
대한민국에서 그거 본 사람 저밖에 없을 거라는 근거 없는 뿌듯함을 느끼고 살았어요.
(마리아네 집에서 혼숙이 자연스러운 일이라서 어떤 칠레 여자아이와 방을 같이 썼는데 영화 얼라이브의 실화인 우루과이 럭비팀 추락 생존자를 최초로 발견한 농부가 자기 할아버지였다네요. 영화에서는 에단 호크가 연기한 난도 파라도라는 사람을 발견한 노새를 탄 농부로 나오시죠. 처음에는 미친 사람인 줄 알고 총으로 쏘려고 했다면서 여자아이가 총으로 방아쇠를 당기는 흉내를 냈었어요.)
제가 여행을 다니며 '안전'측면에서 체득한 부분 중 하나는 그 지역 자체가 위험한 데가 아니라면
사람 사는데 다 똑같다는 거예요. 이상한 놈도 있고 좋은 사람도 있고 그래요.
사실 이런 류의 일들은 여행, 특히 배낭여행을 가려면 한 번쯤 가능성이 높은 일이죠.
예측하기 힘들고 또 흔히 말하는 것처럼 그러려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일들입니다.
강도가 문제가 아니라 지역이 문제인 거죠.
그 일에서 한 가지 다행인 건 제 경우에는 흥정이 가능한 거였어요.
저는 부탁을 하고 본명을 모를 '라두'라는 강도는 그 부탁을 어느 정도 들어주었죠.
그런데 자연은 협상이 불가능합니다. 물론 예측도 안되죠. 라두와 자연의 차이는 그것입니다.
양해가 안될 거라는 거. 자연은 개인 사정 따위는 안 봐주죠.
라두처럼 택시를 대신 잡아주고 마리아네로 데려다주세요. 하는 사후 서비스 따위는 더더욱 기대할 수 없을 겁니다.
배낭여행자 처지에 3천700불, 적은 돈은 아니지만 목숨보다 귀하진 않죠.
그래서 저는 그냥 생각하기로 했죠. 재수가 없었다. 하지만 더 큰 재수 없음을 피할 순 있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어쩌면 평생 만나지 않을 날강도를 만난 건 그냥 재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재수가 없다는 건 말대로 재물 재, 셈할 수. 재물 쪽으로 좋을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 값어치를 한 거죠. 그냥 말 그대로 재수가 없어서.
제가 그때 라두를 후려치거나(슬쩍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하다가 다치면 그때도 내가 잃은 3천600불이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할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이 정도만 재수 없었던 게 다행이구나. 하는 정신승리가 때로는 도움이 되곤 합니다.
저의 불행이 위로가 될 순 없겠지만 언젠가 말씀드렸다시피 천재지변이 걱정되어 취소 수수료를 물어야 하는 분들께 제가 그날 당했던 3천700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슬쩍 여행 중에 혼자만의 재수 없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