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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행 Jul 30. 2018

함락되지 않은 남한산성

누비길 둘째 구간 - 검단산길

누비길 두 번째 구간 검단산길


누비길 2구간 검단산길은 남한산성 남문을 시점으로 하여 갈마치고개까지 연장 7.4km의 등산로이며 검단산, 망덕산, 형제봉 및 이배재고개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등산로이다. 검단산에 접하는 생활권 등산로는 15개의 노선이 있으며, 총 노선 길이는 24,600m으로 숲길 주변은 남한산성 도립공원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숲길 서쪽 사면에는 남한산성유원지, 남한산성 산림욕장이 위치해 있고 기슭에는 황송공원 등의 근린공원이 있어 사실 누비길 보다는 생활권 등산로가 지역 주민들에게 여가나 휴식공간으로서 많이 이용되고 있다.

누비길 2구간 검단산길 입구 안내판

검단산길 구간임을 알리는 안내문을 통과하면 원형 계단목의 비탈길이 나온다. 그리고 곧 성곽 밑으로 난 숲길을 거닐게 된다.

비탈진 등산로는 촘촘히 쌓은 성곽을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성돌은 장방형 모양에 거칠게 다듬어진 것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 틈새는 작은 짱돌로 채워지고 그래도 메꾸어지지 않은 곳은 더 작은 조약돌이 메꿔졌다. 삐쭉빼쭉해 보이면서도 가지런하고 균형감 있었다. 성곽 상부는 새로 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화강석 표면이 하얗다. 밑돌은 세월을 말해주는 듯 이끼가 피어났지만 옥수수 알갱이처럼 가지런하게 쌓여 있었다. 병자호란 후 성곽은 정조 시대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개축하였다. 정조는 서명응을 수어사로 하여 성곽을 수축하게 하였었다. 서명응은 부족한 재원에도 불구하고 무너진 성곽을 다시 쌓아 개축을 완료하였다. 백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말자는 서명응의 불망비가 1구간 등산로 한편에 덩그러니 있다.
[나는 누비길을 걷는다 中]
옥수수 알갱이처럼 가지런한 남한산성 성곽의 성돌


치밀하게 쌓아진 성곽 바로 밑으로 나있는 등산로 밑으로는 깎아지는 비탈면이다. 나무들이 용케도 급경사에 꼿꼿하게 서 있다. 남한산성이 왜 천혜의 요새이고 자연이 만든 방벽이라 하는지 이해됐다. 이런 벼랑길을 천신만고 끝에 올라와도 커다란 돌로 굳건하게 쌓인 성곽이 적군을 맞이한다.

치밀하게 쌓아놓은 성곽 밑은 낭떠러지 같은 비탈길이다. 검단산길은 그 사이로 지나간다.

병자호란 당시 이 가파른 골짜기를 청나라 군사들이 칼 들고 기어 올라왔으나, 성곽에서 조선 군사들에 번번이 내쫓겼다. 인조와 조선군은 사기가 충전하여 산성을 더욱 굳게 지키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청나라는 전략을 바꾸어 산성을 포위하고 성에 쳐들어가는 대신 성에서 나와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깎아지듯 비탈진 능선을 올라가야 하는 청나라 군사 입장에서는 기가 질릴 법도 했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도 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와의 전투는 연전연승이었다. 물론 성 밖에서는 조선 군사가 궤멸을 당하였지만 말이다.                                                                                             

적병의 진격을 격퇴하다. 성을 순시하다.  
적병이 진격하여 남성(南城)에 육박했는데, 아군이 화포로 공격하여 물리쳤다. 상이 성을 순시하며 장사를 위로하고, 이어 전사한 장졸에게 휼전(恤典)을 베풀 것과 그 자손을 녹용(錄用)할 것을 명하였다.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9일]

 

서성과 동성을 습격한 적을 패퇴시키다.
밤중에 적이 서성(西城)에 육박하였는데,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이 힘을 다해 싸워 크게 패배시키니 적이 무기를 버리고 물러갔다. 조금 뒤에 또 동성(東城)을 습격하였다가 패배하여 도망하였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3일]


남성에 육박한 적을 격퇴시키다.
적이 대포(大砲)를 남격대(南格臺)망월봉(望月峯) 아래에서 발사하였는데, 포탄이 행궁(行宮)으로 날아와 떨어지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피하였다. 적병이 남성(南城)에 육박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격퇴시켰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4일]
영화에서는 성을 범한 것으로 그려졌지만 오랑캐는 결토 성을 범하지 못했다.

 이 남한산성을 두고 정말 병자호란은 질 수밖에 없었던 전쟁이었는가? 능히 오랑캐를 물리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김상헌과 같은 척화파의 주장은 한낮 현실을 도외시한 허무맹랑한 소리일까?

영화 「남한산성」에서 청 태종은 말한다.

“너는 살기를 원하느냐? 성문을 열고 조심스레 걸어서 내 앞으로 나오라. 내가 다 듣고 너의 뜻을 펴게 해주겠다. 너는 나와서 두려워 말고 말하라. 너는 스스로 죽기를 원하느냐? 지금처럼 돌구멍 속에 처박혀 있어라. 너는 싸우기를 원하느냐? 하늘에 보름달이 차는 날. 내가 너의 돌담을 타 넘어 들어가 하늘이 내리는 승부를 알려주마.”


검단산길 오르는 비탈면에서 뒤돌아본 남한산성 지화문


함락되지 않은 성, 남한산성


1637년 1월 청나라 대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화포 등 공성 무기를 이용하여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조선군은 천혜의 요새에서 청나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적들을 물리쳤다. 청군은 북에서 내려오는 증원군을 계속 투입하며 남한산성을 함락시키려 하였으나 여러 차례의 전투가 모두 패배로 끝나자, 작전을 바꾸어 산성을 포위하여 고사시키는 전략을 썼다. 이로써 부족한 식량난과 혹독한 추위 속에서 조선 군사는 성안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죽어갔다. 더구나 청나라 군사가 남한산성을 완전히 포위하여 지방의 근왕군 지원도 받지 못하고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이에 갈수록 군량이 줄어드는 가운데 인조와 대신은 전전긍긍하며 단지 외부의 구원만 속절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김류가 아뢰기를,
"적의 군사는 배가 부르고 말은 날렵한데, 우리 군사는 날마다 더욱 피폐해지기만 하니, 이런 상태로 저들을 대적한다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관량사 나만갑을 명소하여 이르기를,
"이미 방출한 군량은 얼마이고 남아 있는 군량은 얼마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원래의 수효는 6천여 석이었는데, 현재는 2천8백여 석이 남았습니다."
하였다. 나만갑이 인하여 날을 헛되이 보내며 지구전을 벌여서는 안 된다는 뜻을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향의 책임을 맡은 자는 이런 마음을 내지 말고 언제나 지구전을 벌일 수 있는 계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8일]
무너진 남한산성 제1옹성 터. 지금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간혹 남한산성이 항복하였을망정 절대 함락되지 않은 성이라며 난공불락의 항전 격전지라고 말한다. 위안을 갖자고 한 말이지만 자괴감만 생긴다. 남한산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다만 성문을 열고 항복하러 나왔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궤변일 뿐이다. 중국 대륙의 난공불락 요새인 만리장성 산해관도 넘은 청나라에게는 남한산성은 그저 궁박한 돌담밖에 지나지 않았다. 설령 산성 안에서 추위와 굶주림을 무릅쓰고 버틴다 하여도 성 밖의 백성들은 무참하게 도륙을 당하고 있었다. 산성 주변의 고을들은 모두 불타고 여기저기 무고한 백성들의 참혹한 시신들이 나뒹굴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어린애들과 늙은 노인들뿐이고 모두 굶어 죽기 직전이었다. 성 안의 군졸과 성 밖의 백성이 추위와 굶주림에 절멸하는 남한산성은 함락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고 언제든 허물어질 수 있는 한낮 돌담에 불과했다.


소방의 군신들이 들불처럼 휘몰아오는 황군의 위무를 차마 영접하지 못하고 우선 몸을 피해 산성으로 들어왔으나 어찌 감히 대국에 맞서려는 뜻이 있겠나이까. 쫓기는 작은 짐승이 굴속으로 숨어든 일을 황제께서 기어이 군사를 움직여 꾸짖으신다면, 소방은 황제의 은덕에 닿지 못하여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옵니다. 또 성벽에서 닭싸움하듯 소소한 다툼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 또한 한 줄기 허술한 돌담을 지켜보려는 미망이었을 뿐 어찌 황제의 군사에 대적할 뜻이 있었겠나이까. …… 황제의 크신 노여움과 깊으신 근심이 또한 두려워서 소방은 차마 나아가지 못하고 돌담 안에서 머리를 조아릴 뿐이옵니다.
[김훈 남한산성]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누각. 위에서는 탄천까지 내려다 보인다.


남한산성 동문(좌익문). 남문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했다.
남한산성 성곽길


누구나 아는 이솝우화 중 '여우와 포도'이야기가 있다. 탐스러운 포도가 먹고 싶었던 여우는 포도나무 밑에서 여러 번 뛰면서 포도를 따먹고 싶었지만, 여러 번 뛰어도 포도를 따지 못하고 허탕만 치고 말았다. 결국 여우는 포도나무를 외면하면서 '칫 포도나무가 너무 시어서 먹지를 못하겠군!'하며 뒤돌아갔다. 이솝우화에서는 여우의 현실에 대한 인지부조화에 대하여 비웃을 수 있었다. 만약에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철군하였다면, 그 여우는 청나라일 수 있었지만, 성문을 열고 나오면서 이 성은 절대 함락되지 않았다고 말하면 그 여우는 조선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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