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비길을 걷는다 - 검단산길
산성 성벽을 따라 걷는 누비길 2구간 검단산길은 비탈길을 오르다 제1남옹성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쉼터에는 정자 한 채도 있어서 잠시나마 마루에 엉덩이를 걸터앉을 수 있다. 정자 뒤편으로는 산성공원 정문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연결되는데, 그곳에서 올라오는 등산로는 깔딱 고개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가파른 경사다. 그래서 정자에는 늘 휴식을 취하는 등산객으로 붐빈다. 그리고 몇 백 년 전 여기에 제1남옹성이 세워진 이유도 헐떡이며 올라오는 오랑캐를 돌로 내리쳐 물리치기 위함이었다.
제1남옹성으로 불리는 현장은 성벽 상단에서 복원 공사를 하고 있었다. 남한산성이 세계유산 등재 이후 발굴조사를 실시했는데, 병자호란 직후 처음 쌓을 때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였다고 한다.
옹성은 성문 밖으로 또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아 이중으로 쌓은 성벽을 말한다. 옹성은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삼면에서 공격할 수 있다. 특히 제1남옹성은 지리적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 축조되었다. 남한산성 옹성 중에서 유일하게 옹성 내부에 장대를 설치해 본성의 수어장대와 나머지 남옹성 간 서로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장대 말고도 포루 여덟 개와 군 초소인 군포 한 곳도 있었다.
[나는 누비길을 걷는다 中]
정자 이후 성곽은 동쪽으로 굽이돌고 누비길은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완연히 숲길을 따라 걷는 길은 큰 경사 없이 걸을 수 있다. 길 중간에는 정상 부근의 군부대와 KT 중계소까지 포장한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만나니 편안하게 오르며 일행이 있으면 이야기 화제에 따라 둘셋씩 짝지으며 걸을 수 있다.
더구나 도로 양 옆의 나무는 우거져 나뭇가지가 서로 맞대어 하늘을 덮는다. 그래서 도로는 그늘져 뜨거운 뙤약볕을 가려준다. 이렇게 검단산 정상을 향하는 길은 숲길과 포장도로가 겹쳐지다 갈라지길 반복하다가 숲길은 사라지고 포장도로만 남는다.
포장도로를 따라 가면 갓길에 원형벤치와 통나무 의자가 있는 작은 소공원을 만날 수 있다. 병자호란 이야기를 알리는 안내판도 여럿 설치되어 그때의 치열했던 전투 상황도 읽어볼 수 있다. 그중 '망월봉의 전투'와 '이대로 함락당할 것인가'의 두 안내문은 그 모양이 같으나 내용이 사뭇 다르다. 전자의 비를 읽어보면 산성을 능히 지킬 것 같고, 후자를 읽어보면 산성이 곧 무너져 함락될 것 같다.
이성에 들어온 지 29일째건만 구원병은 전혀 없고 식량부족 또한 심각하여 성 밖의 풀과 나무도 모조리 불타 남음이 없으며, 말들이 서로 꼬리털을 물어뜯고 군사들도 모두 오래지 않아 함락될 것으로 여겨 성을 넘어 적진으로 달려가는 자마저 연달아 생겼다. [이대로 함락당할 것인가 1637년 1월 12일]
성첩의 군졸들이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며 빙판에 앉고 서기를 이제 오십여 일이나 되었건만 한 사람 원망하는 이가 없고 앞서 싸움에서는 사흘 동안 탄환이 비같이 쏟아지고 성가퀴가 깡그리 무너져 몸을 숨길 곳이 없건만 오히려 두려운 기색 없이 끝까지 싸우려 하니 그 뜻은 참으로 가상하옵니다. [망월봉의 전투 1637년 1월 29일]
한 마음으로 뭉쳐도 대적과의 싸움에서 이길지 장담할 수 없건만, 성내에서의 대신들은 이렇게 의견이 달랐다. 한 가지 사실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지만, 이렇듯 극렬하게 갈리고 각각의 의견은 서로를 배척하니 논의에 의한 합의를 기대할 수 없다.
길 따라 걸으면 헬리콥터 여러 대가 이착륙할 수 있을 만큼 널찍한 공터에 당도한다. 그 한쪽 구석에는 검단산 정상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실제 검단산 정상에는 KT 기지국과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 대신 옆 헬리포트에 정상 표지석을 설치했다. 수풀과 나무가 경계를 이루는 곳에 묘지 비석 모양처럼 한글 ‘검단산’과 한문 ‘儉丹山’이 단출히 새겨져 있었다.
검단산은 청량산과 더불어 광주산맥의 지맥으로서 남한산성과 연결되는 산줄기를 이룬다. 성남시 지세에서는 동쪽의 산지를 이루고 이 산을 넘으면 광주시 및 하남시가 나온다. 본 검단산은 한남검단지맥 본류에 있다. 한남검단지맥은 한남정맥에서 용인시 할미성 인근에서 산줄기가 분기하여 법화산과 불곡산, 영장산, 검단산, 청량산, 남한산, 용마산, 하남시의 검단산까지 북서쪽으로 뻗어있는 산줄기를 말한다. 하남시의 검단산 정상에 다다르면 검단산이 한강과 인접해 있어 산세가 막히지 않아 한눈에 남한강과 북한강을 조망할 수 있다.
검단산이라는 명칭은 한자로 풀어서 보면 검단산의 앞 글자 ‘검儉’은 검다는 뜻과 거룩하다는 뜻이 있다. 검이 거룩하다는 뜻은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이 왕검으로 부르다 임검, 임금으로 변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검단산의 ‘단丹’은 붉다는 뜻도 있지만, 제단이라는 뜻도 있어 검단산은 거룩한 제단이 있는 산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검단산 헬리포트 오기 전 실제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KT 검단산 기지국이라는 팻말이 있으며, 국가기간 시설이라 하여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길을 막고 있다. 그 길 따라가면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이번엔 더 이상 가지 말라는 듯 커다란 철문으로 통행을 차단하고, 철문 옆 담벼락엔 이 자리가 원래 신남성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내용인즉슨 ‘신남성은 검단산 정상부에 위치하며 남격대 혹은 본성과 마주한다는 뜻의 대봉이라고 불리며 남한산성 남쪽의 대부분 지역과 수어장대가 한눈에 조망되는 곳이고, 또 병자호란 당시 벌봉과 함께 청군에게 점령당하여 청군들이 홍이포를 쏘아 포탄이 행궁에 맞았다’는 내용이다.
걸으며 뒤돌아보니 정상 부근의 레이더 기지인지 송신탑인지가 선명하게 보였다. 검단산 높이가 542.1m이고 남한산성 있는 청량산 최고 높이는 479.9m다. 과연 검단산 정상에 서면 산성 및 내부 행궁이 다 보일 만했다. 이런 요충지를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빼앗겼으니 아무리 난공불락이라는 남한산성이라도 머리 위에서 적군이 훤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성문을 열 수밖에 없다. 검단산 정상에 청나라가 사정거리가 수 킬로미터라는 홍이포를 설치까지 하였으면 더더욱 그렇다.
병자호란 당시 홍이포의 포격에 무너져 내린 남한산성 행궁은 복원되었으며, 행궁으로 들어설 때 처음 맞이하는 정문인 한남루는 한강의 남쪽에 있는 누문이라는 뜻으로 정조 때에 건립되었다. 기둥에는 시구가 연결되어 설치된 주련이 있으며 그 내용은 병자호란 당시 처절한 비애감을 적은 글귀가 있다.
‘비록 원수를 갚아 부끄러움을 씻지 못할지라도 항상 그 아픔을 참고 원통한 생각을 잊지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