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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행 Oct 13. 2020

루도비꼬 동굴 Louis  Beaulieu Cave

루도비꼬 성자가 숨어든 둔토리 동굴

루도비꼬 성자가 숨어든 둔토리 동굴


나무가 빽빽하고 계곡이 깊은 청계산.

숲은 울창하다. 우거진 산림은 옛날에도 유명하여 많은 짐승이 사람 눈을 피해 청계산 기슭을 어슬렁거렸고, 조선 임금은 짐승들을 친히 청계산에 드려 사냥을 하곤 했다. 깊은 산중은 사람도 눈을 피해 몸을 숨기기 안성맞춤이었다. 고려 말에는 유신 이색이 청계산에 숨어 살았고, 조선 초에는 정여창이 연산군을 피해 청계산으로 도망쳤다. 조선말에는 탄압받는 천주교인들이 청계산에 몸을 숨기며 신앙생활을 이어가기도 했다.


깊고 깊은 산 청계산.  산 정상 망경대가 보인다.


청계산 하오고개는 학이 날아오르기도 벅차다.

산이 높으니 옛골, 원터골, 어둔골 등  골짜기가 깊다. 국사봉 일대는 산이 높고 험준한 하여 천주교 박해가 극심했을 때는 교인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관군을 피해 깊은 산속에 숨어 땅을 파고 토굴 속에서 살았다.


국사봉을 넘어 이수봉 능선까지 동쪽의 산부 지명은 금토 둔토리라는 마을이다. 말 그대로 땅을 파서 머문 곳이란 뜻이니 천주교 신자들의 토굴생활을 미리 예측이나 한 것 같은 지명이다.


국사봉에서 둔 토리 동굴 가는 길목에 연리근 나무(뿌리가 맞닿은 소나무)가 있다.

 

국사봉에서 성남시 운중동으로 가는 금토동 등산로 방면 산비탈에는 토굴이 하나 있다. 깎아지는 급경사면에 위치하며 여러 명 몸을 숨기기 알맞다. 이 굴이 바로 성 루도비꼬가 병인박해 때 몸을 숨기며 살았던 토굴이다.


루도비꼬는 1840년 프랑스 랑공에서 태어났으며 볼리외 신부로 불렸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1865년 5월 지구 반대쪽 이름도 모를 나라에 왔다. 당시 흥선대원군 시퍼런 서슬 아래 천주교인들이 무참하게 죽어나가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운중동 교우촌에서 조선어를 배우며 열심히 전도하다가 발각되어 국사봉 산기슭 동굴에 피신했다. 그러나 곧 체포되어 서울 의금부로 압송되어 1866년 3월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했다.


볼리외 신부가 박해를 피해 피신한 국사봉 산기슭


국사봉 산줄기를 내려가 안내판 따라 비탈길을 위태위태하게 내려가니 기슭으로 동굴이 보였다. 안에는 마리아상과 양초, 몇 송이 꽃다발이 있었다. 깎아지는 흙 비탈면에 있는 동굴은 바위로 되었으며, 그 위로 낙엽이 쓸려 내려왔다. 돌아보니 험준한 산줄기로 둘러싸여 적막했다.

 

볼리외 신부는 낮에는 둔토리 동굴에 숨어 있다가 밤에는 산을 내려가 성서를 베풀었다.


성 루도비꼬는 한겨울 여기 동굴에서 상처 입은 어린 짐승처럼 공포와 추위로 부들부들 떨었다. 동굴 안으로 세차게 몰아치는 눈바람을 낙엽으로 막으며 신께 기도드렸다. 아무리 굴속에서 신앙의 힘으로 이겨낸다고 하지만, 벽안의 젊은이에게 청계산은 너무나 낯설고 험준했다. 더구나 한겨울 음지의 동굴은 추위를 피할 수 없었고, 먹을 것도 구하기 쉽지 않았다. 여기 좁은 바위틈에 은거하여 고난 속에서도 순교하기까지 신을 향한 그의 믿음은 얼마나 강인한 것인지 헤아릴 수 없다.


성인 서 루도비꼬 볼리외 신부(한국명 서몰례)가 병인박해를 피해 은신한 동굴


볼리외 신부는 조선에 온 지 일 년도 안 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겨우 27살 나이에 순교했다. 우리나라에서 순교한 외국인 신부 중 가장 어린 나이였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을 때 시성 되었으며, 현재 절두산 천주교 순교성지 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볼리외 신부를 비롯한 여러 교인들이 탄압받는 가운데 믿음을 꿋꿋이 이어간 천주교는 마침내 우리나라에서 뿌리를 내렸다. 모두 성인들의 희생과 신도들의 믿음 덕이니, 그들의 순교를 통해 믿음은 더욱 널리 알려지고 강인해질 수 있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요한복음 12:24



알릭스 신부가 세운 하우현 성당


천주교 박해를 피해 국사봉 산기슭에 모여든 사람들이 신앙심을 잃지 않고 땅을 파며 사는 모습에 감동받은 프랑스 알릭스 신부는 성금을 모금하여 초가 목조 강당 10칸을 짓기도 했다.

그곳이 국사봉 아래 용갱이골로 하우현성당의 시초다. 하우현성당은 백 년 넘는 역사를 가진 성당으로 1894년 공소되었고, 지금의 사제관은 20세기 초반 지은 건축물로 한국과 프랑스의 건축방식을 절충해 지은 것이다. 건축기법이 특이하고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하우현 성당의 강당 내부 모습. 초기 신자들의 희생을 밀알로 삼아 교세가 확장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천주교는 모진 박해 속에서도 은밀하게 신앙생활을 이어가다가 1886년 한불조약의 성립으로 천주교는 비로소 신교의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했다. 이때 하우현 성당은 최초로 본당으로 승격하여 일대 관할하며 믿음을 전파하였으며, 지금까지 예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우현성당 사제관.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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