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교 성지 갠지스강 바라나시
바라나시 역사 앞에는 많은 사람으로 항상 왁자지껄하다. 오가는 오토릭샤 클랙슨 소리와 엔진 소리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노후된 자동차마다 매연이 지독하게 나왔고, 사람들은 차들과 서로 뒤섞여 길을 오갔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소떼는 태연하게 걸어가며 바닥에 똥을 뚝뚝 한 무더기 떨어뜨렸다. 행여나 똥을 밟을까 가장자리로 피하여 갔지만, 이번에는 웅크리고 앉은 걸인들이 바짓가랑이를 잡고 손을 내밀었다.
인도는 힌두교의 나라이고 힌두교의 성지가 바라나시이다. 다른 어느 종교의 성스러운 성지를 생각했다가 혼란의 카오스를 접하고 질색하기도 하고, 또는 묘한 매력에 빠져 이곳 도시에 두고두고 머물기도 한다.
오전이라 여행자들이 모두 강가로 갔는지 게스트하우스는 한적했다. 여장을 풀고 옥상에서 에그 프라이 라이스와 시원한 주스를 주문했다. 게스트하우스 옥상에는 갠지스 강이 보였다. 강가의 가트에는 사람들이 종종 앉아 있거나 거닐고 있었다. 강물에는 보트 여러 척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강물 따라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곳이 여러 개 보였다.
갠지스 강을 인도인은 강가라고 부르는데 힌두교인 이라면 죽기 전 반드시 들려서 강물에 몸을 담근다. 그러면 자신들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유는 먼 옛날 바기라트 왕이 천 년 동안 고행 끝에 하늘의 강가가 지상으로 흐르기 시작했고, 왕은 강가에서 재로 변한 조상들의 영혼을 구원했었다. 그 이후 힌두교인은 강가를 성스러운 물로 여기며 그곳에서 목욕재계하면 악한 기운을 씻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힌두교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도 바라나시는 성지다. 부처님께서 보드가야에서 깨닫고 그의 다섯 사문에게 진법을 알리기 위해 들리신 곳이 바라나시였다. 바라나시에서 먼 길을 걸어오시느라 쇠약해진 몸을 강가에서 목욕하고 공양을 하신 뒤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을 하셨다.
강가로 나와 계단을 따라 걸어갔다. 가트에는 울긋불긋한 물감으로 얼굴에 칠한 사두들이 지엄한 표정으로 앉아 수양하고 있고, 사원에는 종소리와 사람들이 염송 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량처럼 걷는 내게 한 뱃사공이 다가와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다. 웃통을 벗어젖히고 숄만 두른 그는 넉살 좋은 웃음으로 나를 쫓아오며 자기 보트로 갠지스 강가를 구경시켜준다고 했다. 가격을 흥정하고 그의 보트에 올라탔다.
그는 천천히 노를 저었다. 가트에서 서성이며 보던 것과 달리 강물 위에서 가트를 바라보니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가트 중간중간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는 화장터라고 말했다. 화장터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시신들과 화장을 끝마친 재는 갠지스 강물에 뿌려졌고, 화장터 주변에는 개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재가 뿌려진 강가에는 많은 인도인이 몸을 담그며 목욕을 정성껏 하였다. 사람들이 그 생을 마치고 사라져 가는 순간과 살아생전 다음 생을 위한 의식을 보트 위에서 훑어볼 수 있었다. 여행자들이 바라나시에 대하여 설명해줄 때 꼭 빼먹지 않고 말하는 장면이었지만, 막상 두 눈으로 보니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부터 떠내려 온 것인지 보트는 강물에 띄어진 꽃잎들을 헤치며 나아갔다. 보트를 탔던 강가에는 사원과 화장터와 여행객과 순례자와 사두들로 가득 메웠지만, 반대편은 모래벌판 황무지였다. 바람에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고 오두막커녕 풀 한 포기 나지 않았다. 강물을 사이로 한쪽은 사람과 건물로 빼곡하게 밀집되어 있지만, 강 건너편에는 모래밭과 황무지뿐,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이승과 저승을 극명하게 갈라놓은 것 같았다. 사람이 몰려있는 강가에서 장례의식을 엄숙하게 치르는 것이 마치 건너편 강가에 닿기 위한 의식 같았다. 우리나라에도 이승과 저승을 갈라놓은 황천 강이 있어서 그 강을 건너면 저승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갠지스 강이 바로 돌아올 수 없는 강, 황천 강이 아닌가 싶었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는 모래밭에 발을 디뎠다. 저만치서 한 노인이 홀로 배를 타고 왔는지 목욕을 정성스럽게 하고 있었다. 물가 경사가 급한지 모래밭에서 몇 걸음 떨어져 있는 노인의 하반신이 모두 물에 잠겼다. 그가 흐르는 강물에 씻겨버리고자 하는 업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모래밭에 앉아 저편 연기가 일렁이는 시가지를 바라보며 정말 강을 사이로 이렇게 이승과 저승을 갈라놓은 곳이 또 있을까 싶었다.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와 내가 갠지스 강 건너 모래밭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에게 이승과 저승이 극명하게 나누어진 모습을 본 것이 매우 인상적이라고 했다. 그는 듣더니 나에게 항하사에 다녀왔냐고 물었다. 내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항하사?”
“불경에서 나오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수를 일컫는 때 항하사라고 하지 않냐? 그 항하사가 네가 발을 내디딘 갠지스 강 건너편 모래섬의 모래알 숫자다.”
나는 짐짓 피안이라고 생각했던 모래 황무지가 섬이었고, 그 섬의 모래가 부처님이 수없이 많은 수를 말씀하실 때 인용한 항하사라는 것에 놀랐다. 그러면서 내가 무지하여 보아도 못 보고 들어도 알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아쉬움이 컸다.
그는 작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뒤적이더니 책 한 권을 꺼냈다. 항하사가 나오는 금강경이라며 그 구절을 읽어 주었다.
“수보리야, 한 보살이 항하사와 같은 수의 세계에 가득 채운 칠보로서 가져다가 보시하고, 다른 이는 일체 법에 나 없음을 알아차린다면, 이 보살은 앞선 이보다 공덕이 더 뛰어나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보살들은 복과 덕을 받지 않는 까닭이다.”
나는 그에게 왜 보살들은 복과 덕을 받지 않냐고 물으니 그가 다음 구절을 읽어주었다.
“수보리야, 보살은 지은 바의 복과 덕에 탐착하지 않으므로 복과 덕을 받아 갖지 않는다고 설 하니라.”
그가 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들자 나는 금강경을 받아들여 그가 읽은 구절을 확인했다. 그러면서 페이지를 찬찬히 넘기니 인상 깊은 구절이 나와 몇 번이고 되뇌었다.
상에 집착하지 말고 여여하고 부동해야 하니라. 왜 그런가?
일체의 집착 있는 것들은 꿈과 같고 허깨비나 물거품,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 같고 번갯불과 같으므로,
응당 모두 이처럼 보아야 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