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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행 Dec 08. 2021

남한산성 성곽의 구조

남한산성의 축성법

성곽과 돌담의 차이


산 능선에 걸쳐있는 성곽을 곁에 두고 걸으면서 항상 들었던 의문은 옛 선인들은 어떻게 이 많은 돌을 다듬어 성을 쌓았는가 하는 점이다. 맨 몸으로도 산줄기 따라 오르내리는 일이 여간 버거운 것이 아닐진대 자기 몸 무게와 비슷한 돌을 지고 어떻게 산 밑에서 올라왔는지 무척 기이하게 느껴진다. 무서운 나라님이 시키는 노역이라 치더라도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 축성방법을 어림짐작할 수 없다. 

그리고 산 능선 비탈면 무른 토사 지반에 자리 잡은 성곽이 긴 세월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산성의 돌들은 자로 잰 듯 각을 딱딱 맞춰 쌓인 것도 아니고, 제대로 다듬지 않은 돌을 무턱대고 쌓은 것 같은데 성곽은 용하게 잘도 버티고 있다. 도대체 그 원리는 무엇일까?


숲길을 걷다가 스쳐가는 나무들 이름이 궁금했던 것처럼 우리나라 산성의 구조와 축성기술이 궁금했다. 우연하게 한국건축역사학회에서 학술세미나로 발표한 '남한산성의 축성법(이천우 著)'을 보게 되어 그동안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남한산성의 성곽의 구조와 축성 원리에 대하여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성곽 성돌이 다르게 보인다.


수구지 발굴조사 성벽 단면도(남한산성 성곽 발굴조사-수구지 일대 완료보고서 中)


남한산성의 성벽은 삼국시대에 처음 쌓았으나 본격적인 수축은 조선 인조 임금 시대에 이루어졌다. 북방 여진족의 동태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 인조는 백제 온조가 쌓은 성의 흔적을 따라 성을 쌓아 올렸다. 먼저 지반을 단단히 다지고 그 위에 잘 다듬은 50*30cm 크기의 장대석을 돌의 모서리와 면을 맞대며 일정하게 쌓았다. 그리고 그 위로 두께 20cm 내외의 폭 30*50cm 정도 크기의 돌을 네 모서리 정다듬하여 쌓고 뒤에는 잡석으로 뒤채움을 하였다. 남한산성의 성벽 높이는 낮은 곳은 3m 정도이고 높은 곳은 7m 내외다.


남한산성 성벽, 하단에 장대석이 성돌을 지지한다. - 서문 인근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집터를 발굴하면 대부분 불에 탄 흔적이 있는데, 이는 이웃 부족 간 약탈과 방화로 불타 폐기된 흔적이다. 청동기 시대부터 발생한 빈번한 전쟁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가족과 마을을 보호하기 위하여 점점 높은 산으로 거주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것이 산성이 생겨난 이유로 사람들은 적의 침략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을 쌓았다. 삼국시대에는 전쟁이 자주 발생해 전쟁에 대비하여 견고한 성곽을 전국 요충지가 될 만한 산 위에 쌓았으며, 그 숫자는 최소 수 천 개 이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지이므로 도성과 읍성 등 일부의 평지성을 제외한 대부분이 산성이다.


전쟁에 대비하여 쌓은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를 꿈꾼다. 침입자들은 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다양한 무기를 개발했는데, 사다리나 갈고리, 쇠뇌 같은 기본적인 무기부터 충차(衝車), 비루(飛樓), 포차(抛車) 등의 공성무기도 있다. 

이에 대비하여 성안에는 화살ㆍ창ㆍ칼ㆍ방패 등을 기본 무기로 하여 요소요소에 포루를 설치하여 적과 대치했다. 그리고 성벽은 적과의 전투에 용이하게 위해 굴곡된 성벽을 많이 만들고,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옹성을 시설하고, 성벽 둘레에 해자를 돌려 파기도 했다.


남한산성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 -제1옹성


남한산성은 높고 가파른 산을 끼고 지은 성이다. 충차나 포차 같은 공성병기 사용이 불가능하고 성을 쌓은 능선 자체가 구불구불하여 가팔라 해자를 둘 필요가 없다. 남한산성 그 존재 자체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산성은 청량산(479.9m)을 주봉으로 하여 북쪽으로 연주봉(466m), 동쪽으로 벌봉(514m)과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고 있다. 성벽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데 비해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평균 고도 350m 내외의 넓은 구릉성 분지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성벽의 안 둘레는 8,114m이고, 바깥 둘레는 9,411m이며, 지금의 산성은 1624년(인조 2) 7월에 쌓기 시작하여 불과 2년 만인 1626년(인조 4) 11월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발생하여 임금은 성에 들어가 항전하였고, 그다음 해 1637년 2월 항복하고 성을 떠났다. 

청나라는 산성을 넘지 못했지만, 산성의 주인은 끝내 항복하고 말았다. 난공불락의 성 주인은 독 안에 든 신세에서 전쟁을 치루었기 때문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의 항전



다음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성곽의 구조와 형식'이라는 자료를 바탕으로 그동안 남한산성을 지나면서 찍었던 사진과 대비하며 배운 자료를 남긴다.

  

성벽(城壁) 

남한산성 축성에 사용된 암석은 대부분 편마암과 화강암이다. 흰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 편마암은 거친 정다듬으로 사각형 모양으로 만들어 성돌에 사용했다. 반면 화강암은 타원형으로 고운 정다듬으로 가공하여 옥수수알 형태로 기울여서 쌓았다. 면이 편평한 편마암과 옥수수알 형태의 화강암은 서로 퇴물림 하여 쌓았는데 쌓고 그 사이사이에 작을 돌을 끼워 넣는 방식이다. 


남한산성 성벽 - 남문 인근: 면석 기울인 방식


성벽의 방향에 따라 형태도 다르다. 남측 성벽이 다른 성벽보다 좀 더 가파른데 편마암을 많이 사용하여 면석 기울임 방식으로 높이 쌓았다. 반면 북측 성벽은 2중 기울기로 낮게 쌓았으며 다른 성벽보다 화강암 사용 비율이 높다. 남측과 북측의 확연히 다른 성벽 특징과 달리 동쪽과 서쪽의 성벽은 각각의 방식을 골고루 사용하여 경사 쌓기 하였다. 조선시대에 사용된 성돌은 당시 열악한 경제 사정에 따라 새롭게 채굴한 것이라기보다는 대부분 통일신라시대부터 사용된 성석을 재가공하여 사용한 것이라 한다. 


남한산성 성벽 - 동문 인근


여장(女墻) 

남한산성 성곽 위 여장은 고택 담장처럼 어여쁘다. 성곽의 구조를 모를 때는 미학적으로 접근하였으나 군사시설로서 여장의 중요성은 무척 크다. 여장은 체성 위에 설치하여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옛말로는 성가퀴나 살받이터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가퀴는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성에 낮게 덧쌓은 담의 모서리를 말한다. 기록에 의하면 남한산성 여장의 경우 당초 벽돌로 축조하였으나 영조 시대에 벽돌을 제거하고 기와로 덮었고, 정조시대에는 다시 성을 수축하면서 기와로 덮었던 것을 치우고 벽돌로 개축하였다고 한다. 벽돌 내부에는 생석회로 잡석 다짐을 하였으며, 정상부에는 덮개로 넓적한 돌을 얹었다.  

 

정조시대에 이르러 여장 위에 기와로 덮었던 것을 치우고 벽돌로 개축하였다.


여장은 계속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간격으로 사이사이가 틈이 벌어져 있다. 이를 타구라고 하며 타구와 타구 사이를 일타라고 한다. 일타에는 여장이 한 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장 한 칸에는 구멍이 3개  뚫려 있는데 이를 총안이라고 한다. 총안은 말 그대로 적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도록 성벽에 뚫어 놓은 구멍을 말하며, 병자호란 이후 성곽에는 기존 활 대신 조총을 쏠 수 있게 총안을 설치하였다.

구조는 양쪽 두 개는 수평으로 뚫려있고 가운데 한 개는 경사지게 뚫려있다. 수평으로 뚫린 것은 먼 곳으로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으로 원총안이라고 하고 경사지게 뚫린 것은 성에 바싹 다가온 적을 쏘기 위하여 근총안이라고 한다.


보통 여장 한 칸에는 구멍이 3개 정도 뚫려 있는데 이를 총안이라고 한다.


총안은 화살이 역류하는 것을 막아주는 시설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아군을 보호하고 적군을 공격할 수 있는 효율적인 공격 시설이다. 한편, 여장 대부분 양쪽 끝이 마름모꼴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타구에서 성 아래를 내려다볼 때 시야가 훨씬 넓게 트이게 되어 공격 범위를 넓히기 위함이다. 

봉암성 여장은 정조 때에 손을 대지 않아 지금도 기와 형태의 여장 모습이 남아있다. 무너진 틈으로 여장의 구조를 볼 수 있는데 한식 담장 기와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다. 여장 옥개부는 마사토와 강회를 주 성분으로 하는 쌓기 모르타르를 이용하여 기와로 덮었다. 


여장 대부분 양쪽 끝이 마름모꼴로 만들어져 있어서 타구가 훨씬 시야가 넓게 트여 있다.


여장 일반 단면도(좌로부터 원총안, 타구, 근총안)


포루(砲壘) 

대포를 쏠 수 있는 시설을 포루라고 하며, 남한산성에는 7개소가 설치되어 있다. 처음에는 이것이 암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나치게 작아서 의아했다.     

제1옹성 내 포루
봉암성 포루


옹성(甕城)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또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아 이중으로 쌓은 성벽을 말한다. 성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먼저 통과해야만 하고,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물이다. 

옹성들은 연주봉 옹성을 제외하고 원성 축조 시에 쌓은 것이 아니라 병자호란 이후에 적의 화포 공격에 대응할 목적으로 축조되었다.      

한강을 바라보는 연주봉 옹성


검단산을 바라보는 제1옹성


치(雉) 

치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성곽 시설물이다. 치는 일반적으로 수원화성처럼 평지에 쌓은 성에 만들어지는데, 산성의 경우 지형을 따라 성벽이 축조되어 자연스럽게 굴곡을 이루게 되기 때문에 별도의 치가 필요 없다. 남한산성도 치가 거의 필요 없을 정도로 성벽의 굴곡이 심하고, 특히 암문은 성벽이 능선을 따라 회절 하는 곳에 인접하여 설치하였다.      

산성의 경우에는 지형을 따라 성벽이 축조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굴곡을 이루게 되어 별도의 치가 필요 없다.


성문(城門) 

조선시대 성문에는 아치로 육축을 쌓고 판문을 달았으며 위에는 누각 건물을 지어 성문으로 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이때 성문은 불화살 등의 적의 공격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철판을 씌웠다. 성문 이름에는 방향을 뜻하는 글자들이 많이 들어간다. 동서남북이라는 글자가 직접 들어가기도 하지만, 남한산성의 성문은 각각 고유의 이름이 있어 남문은 지화문, 동문은 좌익문, 북문은 전승문, 서문은 우익문이라 하였다. 문루의 이름은 정조 3년(1779년)에 원성을 개축할 때 지은 것으로 모두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원형이 되게 만든 홍예문이며, 문루가 구축되어 있다. 

지화문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에 용머리 망와로 마감하였으나 내림마루에는 망새 대신 용두를 장식하였다. 천저양식은 연등 천정이고, 높이 110cm의 장초석에 올려놓은 기둥은 주심포식에 초익공의 포를 갖추었으며, 굴도리 가구이다.      

남한산성 동문 좌익문

남한산성 동문은 가장 사용빈도가 많았던 문으로, 성의 남동쪽에 있다. 다른 이름으로는 좌익문(左翼門)이라 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좌익문이라 한 것이다. 폭은 3.1m, 높이는 4m로서 9개의 홍예돌을 쌓은 홍예식 성문으로, 지면이 성문보다 낮아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남한산성 서문 우익문

서문은 산성 북동쪽에 있는 문으로 다른 이름으로는 우익문(右翼門)이라 한다. 한양 광나루나 송파나루에서 가까워 물자 이동이 빈번했다. 문의 폭은 1.46m이고, 높이는 2.1m이며 동문처럼 홍예식으로, 장방형 홍예 기석 위에 5매의 홍예석을 올려놓았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병자호란에서 항복한 인조가 세자와 신료들과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러 삼전도로 나갈 때, 이 문을 지났다.


남한산성 남문 지화문

남한산성 남문은 성의 서남쪽에 있는 문으로 성남을 향해 서있다. 남문은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되어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 붙여졌다. 또 남문은 4대 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으며, 다른 문들처럼 문루와 홍예문으로 나뉜다. 남문의 홍예문은 높이 4.75m, 폭 3.35m로 홍예 기석 위에 홍예석 17개로 구성되어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병자호란 발생 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에도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남한산성 북문 전승문(현재 보수 중으로 공사안내판 사진으로 올림)

북문은 성곽 북쪽에 있으며 전승문(戰勝門)이라고 한다.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 조선 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으로 옮겨 산성 안으로 운반하였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면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북문은 후대에 신축된 성문이다.

1779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이라 칭하였다. '전승문'이란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이며, 홍예 기석 위에 10개의 홍예돌을 쌓아 구축하였다.


암문(暗門) 

성곽에는 4대 문 외에 적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은밀하고 후미진 곳에 출입구를 내어 평상시 백성이나 가축들이 드나들고 양식을 나르도록 했는데 이 문을 암문이라고 했다. 암문에는 문루가 없는 것이 보통이다.

남한산성은 현재 남아 있는 암문이 모두 16개로서 우리나라의 성 중에서 암문이 가장 많은 성에 속한다. 그중 원성에 11개가 있고,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남아있다. 형식은 평거식과 홍예식으로 구분되며 크기가 작고 장식이 없다. 암문 안쪽에 쌓은 옹벽이나 흙은 유사시 무너뜨려 암문을 폐쇄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남한산성 암문 - 봉암성 인근
남한산성 암문 - 동문 인근


시구문(제11암문) 

동문(좌익문)에 인접한 제11암문(시구문)은 폭이 2.86m, 높이가 3.07m, 길이는 5.6m에 달해 암문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동문에는 계단이 있어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였으므로, 수레나 일반인들의 통행은 주로 이 암문을 이용했다. 조선말 천주교 박해 때 희생당한 순교자 한덕운(토마스), 김덕심(아우구스티노), 정은(바오로) 등 300여 분의 시신이 이 문을 통해 버려졌다. 지금은 천주교 주요 성지순례 장소가 되었다.     


군포 

군포는 군인들의 초소로서 『중정남한지』에 의하면, 산성 내에는 125개소가 건립되어 있었는데 매 군포는 2-3칸 정도의 규모였으며, 군포 좌우측에는 소금이나 숯 등을 묻어두었다. 이처럼 숯과 소금을 묻어둔 것은 유사시에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전쟁에 대비하여 비축해 놓은 것이다. 오늘날 남한산성 내 군포는 온전한 것이 남아있지 않고 단지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장대(將臺) 

장대는 전투 시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축조한 장수의 지휘 처소를 말한다. 장대는 성내의 지형중 가장 높고, 지휘와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설치하였다. 성이 넓어 한 곳의 장대에서 지휘를 할 수 없는 경우 각 방면에다 장대를 마련하였다. 장대는 전투 시에는 지휘소인 반면 평상시에는 성의 관리와 행정기능도 수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에 구축된 5 장대 중 동장대를 제외한 4 장대는 17세기 말엽까지는 단층 누각 건물의 형태로 남아있었으나,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5 장대 모두 붕괴되어 터만 남아있게 되었다. 18세기 중후반에는 서장대와 남장대가 2층 누각 형태로 건립되어 19세기 후반까지 남아 있었으며, 그중 서장대인 수어장대만이 지금까지 남아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부에 세워져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이천부사가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우부별장이 되어 지킨 곳이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행궁(行宮) 

행궁이란 정궁에 대비되는 용어로써 임금이 궁궐을 벗어나 거둥 할 때 머무는 별궁 또는 이궁, 임시 궁궐을 말한다. 조성 목적은 왕이 능행을 목적으로 혹은 전란에 대비하여 조성하거나 휴양 공간 혹은 왕이 궁궐을 벗어나 거둥(임금의 행차)하면서 중간 휴식지로 이용하는 것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조선 인조 4년(1626)에 건립되었다. 실제로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하였다. 이후에도 숙종, 영조, 정조 등 여러 임금이 여주, 이천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남한산성 행궁은 1909년까지 잘 남아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훼손되었다. 

      

남한산성 행궁은 1999년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하여 2004년 행궁 복원공사를 준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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