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기행 May 25. 2022

동네 한 바퀴 도는 마실길

동네 마실길에서 느낀 소소한 감상들

동네 마실길(중원구 대원공원~여수공원)


우리나라 곳곳에는 걷기 좋은 길이 많다. 얼마나 많은 지 헤아린다면 걷기 여행길 안내 포탈 두루누비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데, 대략 2,182개 코스가 등재되어 있다. 모두 한국관광공사에서 추천하는 보석 같은 걷기 길이다. 테마별로 분류하면 역사와 함께하는 길에 부여 사비길이나 석굴암 불국사길 등이, 또는 계곡 따라 바다 따라 걷기 좋은 길로는 해파랑길이나 가야산 소리길 등 특색 있고 다양한 길이 있다.

그러면 우리 고장에는 어떤 길이 수록되어 있을까? 성남에는 누비길 7개 구간과 경기옛길 영남길 2개 코스 해서 모두 7개 길이 있다. 모두 아름답고 볼거리가 많은 길이지만, 대략 10km 길이의 산길로 평균 4시간 소요된다. 산 능선 따라 있는 길이라 산 정상을 밟고 다시 골짜기를 내려와 고개를 넘고 다시 산 정상을 밟는다. 내 고장에 있다고 해도 큰맘 먹지 않고는 쉽게 접근할 수 없다. 



좋은 길이란 무엇일까? 서울 한양도성 둘레길이나 깊고 깊은 지리산 둘레길, 아니면 화산섬 제주도 올레길이야 워낙 유명하다. 상쾌하게 거닐 수 있는 숲길로 서울 인왕산 자락길, 인제군 원대리 자작나무 숲길도 걷기 좋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은 길은 바로 내가 갈 수 있는 길이다. 가기 쉬운 길이 내게는 좋은 길이다. 길 배경으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의 산수화가 펼쳐지거나, 숲의 여왕이라는 자작나무 70만 그루가 빽빽하게 자라나 있으면 뭐하는가? 가기 힘들면 그 자체로 그림의 떡이다. 길은 눈요기하는 즐거움도 있어야 하지만, 두 다리가 움직여야 비로소 길이 완성된다. 그래서 일단 집 가까이 걸을 수 있는 길이라면 어디 멀리 있는 명승지보다 훨씬 좋은 길이다. 그리고 사실 그렇다. 


그 말이 맞는지 증명할 겸 날을 하루 잡아 동네 길을 걸어 보았다. 녹지나 공원 비율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성남 본시가지 중원구에서 분당구로 연결되는 마실길로 도심지 공원과 보행자도로, 숲길을 연결하는 길이다. 

출발은 대원근린공원 입구다. 내려가는 길에 아름드리 큰 갈참나무가 길을 알려주고 있다. 나무는 시간도 알려준다. 갈참나무 잎사귀가 붉게 단풍 들면 가을이 왔음을 알아챈다. 단풍색도 곱거니와 수형도 아름다워 갈참나무는 가을 참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시에서 나오는 ‘갈잎의 노래’가 바로 이 갈참나무 서걱거리는 소리다.

대원공원 가로지르는 길 곁에 갈참나무가 서있다.


야자매트가 깔린 길을 따라 내려가면 공원 벽천분수가 나오고 광장을 지나면 양쪽으로 측백나무가 도열한 길이 나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측백나무 길이다. 측백나무는 잎과 열매를 먹으면 신선이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래서 예로부터 송백(松伯)이라 하여 소나무(松)는 공작(公), 측백나무는 ‘백작(伯)’으로 귀한 나무로 대접받았다. 길을 걸을 때마다 귀한 신분의 측백나무가 친히 마중하니 사람도 귀하게 된 느낌이다. 


대원공원 측백나무 길


측백나무 옆 길은 거대한 메타세쿼이아가 나란하게 서 있는 길이다. 비 올 때 평철석을 징검다리 삼듯 걸으면 재미난다. 하늘 높이 자라난 메타세쿼이아 사이를 걸으면 마치 공룡이 튀어나올 듯한 원시림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메타세쿼이아는 살아있는 식물화석으로 불릴 정도로 쥐라기 시대 이전부터 존재한 나무였다. 


메타쉐콰이어 길


대원공원 산책로 끝자락은 맨발 지압장이다. 그런데 철쭉나무와 잣나무 아래 있어서 진액이 떨어져 지압장 자갈이 끈적거린다. 깔창이 얇은 운동화를 신었다면 신을 신은 채로 지압장을 걷는다. 동네에 이런 아름다운 공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큰 복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대원공원이 한때 자칫 없어질 뻔했다. 공원일몰제가 시행되어 2020년 6월 30일까지 공원으로 실시계획 인가되지 않으면 도시계획시설에서 실효되고 이 녹지와 공원은 사라지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수 있었다. 다행히 시에서 수천억 원의 지방채까지 발행하면서 장기미집행 공원부지를 매입하여 공원을 지켜낼 수 있었다. 미래세대와 그 혜택을 나누기 위해 밀알을 뿌렸던 덕분에 오늘도 공원 내 숲길을 계속 걸을 수 있다.


대원공원 내 지압장 길


대원공원이 끝나고 둔촌대로를 건너면 둔촌 이집선생의 묘소 입구에 다다른다. 신도비에는 회화나무 몇 그루가 있는데 옛 선비들이 심었다고 한다. 마침 성남 보호수 3호 회화나무가 하대원동 노인정에 있다. 이 고장은 대대로 선비들이 터를 삼았던 곳임을 나무 한 그루가 증명하고 있다.

둔촌 이집선생과 회화나무 [둔촌소공원 안내판 中]
둔촌 추모재 진입로 입구에 높은 학식과 고상한 지절로 이름을 떨친 둔촌선생을 상징할 수 있는 회화나무를 심어 경관을 조성하였다. 회화나무는 우리나라의 소위 선비마을이라 불리는 곳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로 예부터 과거에 급제하면 회화나무를 심었으며, 관리가 벼슬을 얻어 출세한 후 관직에서 퇴직할 때면 기념으로 심는 것도 회화나무였다. 또 다른 이름은 학자수(學者樹)이고 영어로도 같은 의미로 Scholar tree라고 쓴다.
돈촌 소공원 추모재 입구와 회화나무


공원 길은 끝나고 둔촌대로 아튼빌 아파트 앞을 지나간다. 방음벽 따라 담쟁이가 입체 녹화를 이루었다. 가로수로 심은 느티나무 넉넉한 나뭇가지와 담쟁이 풍성한 잎사귀가 햇빛을 막아 시원한 도심 속 숲길이 되었다. 


담쟁이 입체녹화 길


둔촌대로 보행자도로를 따라 여수동 야채시장 숲길에 들어선다. 마실길을 끊기지 않고 공원과 공원을 연결한다. 본 도심과 신도심을 연결하여 사람과 사람을 잇는 길이다. 그린벨트로 묶인 야산은 도시가 숨 쉴 수 있는 허파 역할을 한다. 숲에는 떡갈나무가 많다. 널따란 잎사귀가 하늘을 가려줘 이른 아침 따가운 햇살을 막아준다. 개발을 못하는 덕분에 갖가지 나무와 식물이 자라났다. 길 섶에는 난티 잎을 가진 개암나무가 자주 보인다. 잎끝이 반쯤 싹둑 잘라진 모양의 잎을 난티 잎이라고 하는데 개암나무 잎이 뭉툭해서 한 번 보면 잊지 않는다. 개암이란 이름이 낯설다면 영어 이름이 헤이즐넛이라고 하면 아하! 반가워할 것이다. 우리 이름 개암보다 영어 이름 헤이즐넛이 더 친숙하다니 아쉽다.

 ‘나 때는 말이야’라고 개암을 딱 깨물면 도깨비들이 깜짝 놀라 도망갔다고.

난티 잎을 가진 개암나무


길섶에서 키 작은 생강나무도 본다. 생강나무는 진달래나 개나리보다 더 일찍 꽃망울을 터뜨려 봄이 왔음을 알려준다. 우리 동네에서는 매화나무 다음으로 생강나무가 꽃망울을 피운다. 생강나무는 이름 그대로 나뭇가지나 잎사귀에서 생강 냄새가 나서 생강나무다. 

김유정의 단편소설 ‘봄봄’에서 나오는 노란 꽃 동백꽃은 사실 생강나무 꽃을 가리킨다. ‘봄봄’에서 점순이는 생강나무 아래에서 주인공에게 적극적으로 고백하지만, 사실 생강나무 꽃말은 수줍은 고백이다. 


어릴 때는 하트, 자라면 크라운 모양을 가진 생강나무


이른 봄에 걸었을 때는 생강나무 노란 꽃과 함께 진달래, 철쭉, 매화, 산목련의 어여쁜 꽃을 보았다. 초여름이 다가올 때는 쪽동백나무 하얀 꽃들이 봄꽃을 이어받아 붉은 여름꽃이 피기 전까지 숲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쪽동백나무의 잎은 동글동글한 모습으로 크기도 제법 크다. 꽃대에는 수십 송이 꽃들이 하얗게 피어 일본에서는 하얀 꽃이 마치 뭉게구름처럼 피오 오른다고 하여 백운목(白雲木)이라고 불렀다. 꽃이 지고 열매가 익으면 동글동글한 구슬 같은 열매가 알알이 맺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중국에서는 옥령(玉玲)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그 나무 열매로 동백기름을 대용하였기에 짝퉁이란 뜻의 '쪽'(작다)이라는 접두어를 붙여 쪽동백나무라고 이름 붙였다.

 

하얀 꽃송이 때문에 Snowbell로 불리는 쪽동백나무 꽃


숲길을 걸으니 병사들이 열을 맞추어 도열하듯 나무들이 줄 맞춰 서 있는 조림지가 나타났다. 잣나무가 많은 숲을 걸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상쾌한 느낌이 든다. 그 이유는 잣나무에게서 피톤치드가 나오기 때문이다. 나무는 해충이나 곰팡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피톤치드를 뿜는다. 이것이 사람에게는 아토피 치료나 우울증 등의 병에도 효과가 있다. 그런데 사실 나무에게 있어 사람은 해충보다 더 암적인 존재다. 그런데 오히려 사람에게 이로운 피톤치드를 내뿜으니, 식물의 진화가 이렇게 엉터리일 수가 없다.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역한 독 기운을 내뿜어야지 나무가 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숲길에서 만나는 잣나무 조림지


숲에서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쏟아지는 햇살을 가려주는 나뭇잎은 그 크기나 모양이 제각각이다. 바늘 침 모양의 침엽수부터 손바닥 펼쳐진 듯한 활엽수까지 저마다 모양이 있다. 저마다 햇볕을 가려주는 양이 있고 저마다 하늘을 가려주는 품이 있다. 듬성듬성 파란 하늘을 보여주는 것도 키 큰 나무가 키 작은 나무를 위하여 햇살을 나눠주려는 배려 이리라. 



숲길이 끝나고 다시 도심 내 여수공원에 들어섰다. 여수동 이름은 조선시대부터 개울에 흐르는 물이 맑고 고우며 주변 숲이 아름답다고 하여 여수(麗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지금도 여수천은 물이 깨끗하고 숲에는 산목련, 철쭉, 진달래 등 아름다운 꽃나무가 많다. 공원 내 체육시설에서 다리 근육도 풀고 정자에서는 잠시 걸었던 노곤함을 풀고 되돌아가야겠다. 



숲은 아는 만큼 숲은 풍요롭다. 길도 아는 만큼 그 길을 걷는 사람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다. 동네 마실길 한 바퀴 도는 것이 어느 명산 둘레길 유람 못지않다. 더구나 별다른 옷차림 준비 없이 쉽게 다녀올 수 있으니 걸을 수 있는 길이야말로 얼마나 좋은 길인가!

조선 후기 선비 유한전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된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고 했다. 애정이 생기면 잡초는 야생화로, 잡목은 진목으로 다시 보인다.  그리고 집 가까운 마실길이 보석 같은 걷기 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남한산성 성곽의 구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