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경대와 만경대, 개망초와 조견 선생
산마다 품고 있는 수목과 정물이 각각 다른 지라 산에 들어설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예부터 산에 다녀간 사람들 사연 또한 제각각이라 산에 얽힌 이야기도 다양하다. 그래도 나의 일천한 경험으로 청계산만 한 산이 어디 있을까 싶다. 산에 들어설 때마다 매번 숲 속 느낌이 다르고, 듣는 이야기 또한 새롭다. 거진 일백 번 오르내려도 마찬가지다.
청계산은 청룡이 산기슭에서 승천했다 하여 청룡산이라고 불렀다. 풍수지리학적으로는 청룡이 승천한 청계산(618m)을 좌청룡, 군포에 있는 수리산(475m)을 우백호로 부른다. 좌청룡 우백호가 호위하고 있는 산은 그 중심에 있는 해발 629m의 관악산이다. 관악산에는 수십 개의 바위 봉우리가 들어차 있어 그 모습이 더욱 위풍당당하다. 일만 이천 봉의 금강산과 비교하기도 하여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이라고 불리니 청계산과 수리산을 좌우측에 거느릴 만하다.
하지만, 필자에게 관악산 암릉에 잘못 들어섰다가 너무 고생한 기억이 있다. 관악산 산림욕장이라는 이름에 속아 얼떨결에 산 정상에서 암벽등반을 해야 했다. 해 질 녘 관악산 어느 바위틈에서 길을 잃고 청계산 망경대를 바라보며 무사히 하산할 수 있을까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리고 다시는 청계산 외 다른 산은 탐하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망경대를 기준 삼아 관악산 서쪽 절벽을 엉금엉금 기어 내려올 수 있었다.
관악산을 바위가 많은 악산(岳山)이라 부르고, 청계산은 흙으로 덮여 육산(肉山)이라고 부른다. 관악산을 오를라치면 험난한 바위구간 때문에 긴장도 되지만, 청계산은 숲길이 흙으로 덮여 걷기에 푹신하고 비옥한 토양 덕분에 다양한 식생이 자라고 있어 힐링하는 마음으로 오를 수 있다. 어쩜 산 자체가 산림욕장이라도 되는 듯 치유와 사색을 맘껏 즐길 수 있기도 하다.
숲 속에서 헤쳐 나와 산 정상에서 청계산을 내려다보면 구불구불 휘감는 산줄기가 마치 푸른 초목으로 덮여있는 청룡의 푸른 몸통 같다. 하지만, 산에 들어선 생명이라면 짐승이든 사람이든 포근하게 안아주는 산이라 기세 등등한 '청룡'이란 이름이 걸맞지 않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청룡산은 훗날 푸를 정도로 깨끗한 계곡물이 흐르는 산이라 하여 청계산으로 바뀌었다. 청룡이 살았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산이라 그만큼 숲은 울창하다.
산은 심술궂다. 애써 알고 익숙하다 싶으면 전혀 낯선 모습을 보여줘 사람을 곤경에 처하게 한다. 친근한 청계산도 어떨 때는 관악산 못지않게 험준한 모습을 보인다. 특히 청계산의 네 봉오리 중 특히 국사봉과 망경대를 갈라치면 더욱 그렇다.
두 봉우리를 잇는 산줄기는 몹시 가파르다. 가파르게 오르는 비탈길을 순우리말로 된비알이라고 표현한다. 비알이라는 단어 자체가 비탈과 벼랑의 사투리인데, 여기에 힘에 벅차다는 ‘되다’가 덧붙였다. 아주 힘에 벅찬 벼랑 같은 된비알이 청계산에도 있다. 하오고개에서 국사봉 오르는 길, 혈읍재에서 망경대 오른 길이 누비길 중 가장 된비알 구간이다.
숨이 간당간당 넘어가는 헐떡임 속에서 네 발이든 두 발이든 기를 쓰고 된비알을 넘는 이유가 있다. 바로 하늘과 맞닿는 경험을 갖기 위함이다. 바위 밑은 바닥을 알 수 없을 만큼 높은 벼랑이다. 그곳에 오르기 위해서는 팔다리 모두 써야 한다. 바위 한편에 한쪽 발을 디디고, 한 손으로 거친 바위 돌기를 움켜쥐고 나머지 다리 한쪽을 치켜들고 튀어나온 턱에 걸쳐야 오를 수 있다. 보기에는 가뿐할 것 같지만, 자칫 잘못하면 다리는 뻗치지도 못하고 허방을 휘젓다가 거친 바위에 무릎이 찍히기도 한다.
그래도 바위틈에 손을 비집으며 아등바등 올라간다.
바위 정상에서 고개 들어 보니 순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방팔방 시야가 모두 확 트였다. 아무런 장애 없이 시력이 닿은 곳까지 한껏 보였다. 하늘과 산릉선이 저 멀리 맞닿는 곳이 보였다. 동서남북 사방이 확 트여 기어오른 수고로움이 단박에 사라지고 가슴이 다 시원해졌다.
이래서 산을 오른다.
석기봉에서 바라본 망경대는 용의 머리인 양 험상궂게 생겼다. 석기봉에서 좌우로 둘러보면 동쪽으로 성남시가 한눈에 보이고 서쪽으로 과천과 의왕 도심을 모두 볼 수 있다. 서해도 볼 수 있는 만큼 북쪽도 멀리 볼 수 있겠지만, 망경대가 가로막고 있다. 대신 망경대에 오르면 북쪽 개성까지 한눈에 보인다고 한다.
망경대는 고려 말 유신 조견이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을 바라보면서 멸망한 고려를 그리워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처음 망경대는 청계산의 주봉으로서 이곳에 서서 아래를 굽어보면 만 가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해서 만경대라고 불렀다가 조견 선생의 설화로 인하여 망경대로 고쳐 불렸다. 청계산 국사봉 또한 조견 선생이 이 봉우리에 올라 멸망한 고려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국사봉이라고 이름 붙였다.
망경대와 석기봉 사이 절벽에는 오막난이 동굴이 있다. 고려가 멸망할 때 맥같이 생긴 짐승들이 울면서 그 동굴로 들어갔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청계산 마다 멸망한 고려의 애환이 서려있으니 이 산은 고려 망국의 설움을 어루만지는 산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청계산 중턱에 위치한 청계사도 고려 때 중창된 사찰이다.
청계산에 고려 망국의 한이 깃들어 있다면, 새로운 나라 조선의 기상은 북한산에 있다. 청계산의 봉우리 망경대와 국사봉과 비슷한 이름이 북한산에도 있는데, 바로 만경대와 국망봉이다.
만경대는 북한산 옛 이름 삼각산에서 이수봉과 백운대와 함께 한 봉우리를 이루며 삼라만상의 온갖 경치를 구경할 수 있다 하여 만경대란 이름이 붙었다. 무학대사가 조선의 새로운 도읍터를 바라봤다고 하여 국망봉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새로 개국한 조선의 열망이 담겨 있다.
비슷한 산말이지만 뜻이 천양지차라 오르는 산이 무엇이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청계산은 홀로 오르며 고즈넉하고 애잔한 감상에 빠지게 하고, 북한산은 여럿이 떠들썩하게 올라 정상에서 들뜬 기분으로 서울을 바라본다. 산에 얽힌 이야기에 따라 산에 오르는 사람 정서도 다르다.
물론 산이 알아줄 리 없지만서도.
청계산 정상 노두를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산기슭은 깊고 울창하다. 골짜기마다 우거진 산림은 옛날에도 유명했다. 많은 산짐승이 청계산 기슭을 어슬렁거렸고 조선 초 왕들은 이 짐승들을 사냥했다. 깊은 산중은 동물뿐만 아니라 사람 몸을 숨기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고려 말에는 유신 이색이 군졸들의 눈을 피해 청계산에 숨어 살았다. 조견 선생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청계산으로 도망쳐 은신하며 살았다.
특히 조견 선생의 할아버지는 조인규인데 고려 충렬왕 때 시중까지 높은 벼슬에 올라 신라시대 창건한 청계사를 중창하기도 하였다. 조견 선생은 일찍이 승려가 되어 주지를 역임하기도 했지만, 환속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청계산에 숨어 살았다.
조견 선생의 원래 이름은 조윤이었다. 하지만, 고려가 망할 때 조윤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개 견(犬) 부수가 들어간 한자 견(狷)으로 이름을 고쳤다. 자(字)도 종견(從犬)이라 하였다. 나라를 잃고도 죽지 않음은 개와 같다며 이름을 바꾼 것이다. 상반되지만, 옛 주인(고려)을 잊지 못하는 것은 충실한 개와 같이 살겠다는 뜻에서 고쳤다고도 한다. 실제로 청계산 하오고개 넘어 국사봉에 오르면 표지석 하단 검은 석판에는
'국사봉(國思峯)이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세워지자 청계산에 은거하던 고려의 충신 조윤이 멸망한 나라를 생각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라고 새겨져 있다.
조견 선생의 호가 송산(松山)인 연유 또한 고려의 수도 개경 송악을 잊지 않겠다는 절개의 표시기도 하다. 청계산에 숨어 살던 조견 선생을 이성계가 찾아와 조선이 개국함에 있어서 힘을 보탤 것을 요청했지만, 조견 선생은 끝끝내 거부하였다. 이에 이성계는 조견 선생의 뜻을 꺾지 못하고 대신 청계산 일대를 봉지로 내리고 석실을 지어 지내게 하였다.
조견 선생이 죽고 난 후 묘는 청계산이 보이는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에 마련되었다. 묘역은 나지막한 구릉에 정서향을 향하고 봉분 주변에는 묘표, 문인석, 석등 등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묘는 600년이 된 유적으로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묘제를 알 수 있다고 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아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송산 조견 선생의 묘역을 둘러보며 잠시 의문이 들었다. 고려의 충신이라는 조견 선생은 조선을 개국한 공로로 개국공신 2등으로 평안군에 봉해졌다. 그의 형 조준 또한 이성계를 새 왕으로 추대하고 조선을 개국하는 데 앞장서 개국공신 1등으로 평양백에 봉해졌다. 고려의 충신이라 하지만 조선에서도 높은 벼슬을 누리며 살았던 셈이다.
사실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와 이방원은 기세는 매우 살벌했고, 자신의 뜻에 거슬리는 자는 살려두지 않았다. 조선이 들어서면서 공양왕을 비롯한 고려 왕 씨 일족은 모두 살해되었고, 두문동에 들어가 두문불출하던 고려 충신들 또한 황희 정승을 빼고 모두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조견 선생의 묘역에서 광주 쪽으로 보이는 문수산 기슭에 태종 이방원의 쇠방망이에 쓰러진 정몽주 선생의 묘가 있기에 조견 선생이 고려 충신이라는 설명에 잠시 갸우뚱거리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조견 선생을 고려의 충신으로 기억하는 까닭은 선생이 청계산에서 숨어 살며 망국의 한으로 평생을 슬피 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 조준이 다른 고려 충신들처럼 동생이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단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넣었을 뿐이지 그분의 행적은 끝까지 고려에 충절을 다했다.
조견 선생 묘역 앞에는 마침 개망초가 지천으로 피어났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 전후에 외국에서 들어온 귀화식물로 나라가 망할 때 돋아난 풀이라고 해서 망초라고 불렀다. 개망초는 망초와 같은 국화과이지만, 꽃이 더 크고 예쁘다. 나라가 망해 억장이 무너질 지경인데 요상한 꽃은 또 왜 이리 예쁜지. 볼수록 사람을 놀리는 것 같아 아주 환장할 지경이라 망초 앞에 개’ 자를 붙여 망국의 설움을 표출했다.
망국의 신하로서 청계산 깊은 산속에 숨어 살던 조견 선생은 고려의 수도 개성을 보기에 앞서 조선의 수도 한양을 바라보며 참담하기 이를 데 없던 심정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정서가 통했을까!
누가 심을 리 없는 개망초가 조견 선생 묘역 앞에 가득하다. 개 견(犬) 자가 들어간 조견 선생 묘역 인근에 개자가 들어간 개망초가 공교롭다. 둘 다 망국의 한을 담고 있는 것도 기이하다.
계란꽃으로 불리는 개망초는 이름과 달리 향이 독특하고 나물로도 먹는다. 꽃은 물에 우려내어 차로 마시기도 한다. 약초로도 쓰여 열을 내리고 소화를 돕고 피를 맑게 한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