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골 ~매봉~망경대~이수봉~봉오재~옛골
북쪽에는 눈이 펑펑 내렸다는 뉴스를 들었다. 수도권은 날이 한동안 따뜻해서 비가 내렸다. 올해 겨울은 강설예보가 자주 있었지만, 적설량은 1~2cm에 머물렀다. 폭설이 내리면 도로가 미끄러워 교통사고 위험도 있고, 쌓인 눈으로 비닐하우스가 붕괴될 수 있지만, 겨울에 눈이 눈답게 펑펑 내리는 것도 계절의 순리다.
성남에는 비가 내렸다. 새벽에 눈발이 날리기도 했지만,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눈이 많이 내린다는 소식은 다른 나라 일인가 보다. 어제 뉴스에 도봉산을 보니 하얀 설산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다음 주 설날이 지나면 곧 입춘이 다가오고 매화가 꽃몽오리를 올리고 개구리는 잠에서 깬다고 난리 치겠다. 이번 겨울은 숲에서 제대로 눈도 밟지 못하는가 생각하니,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겠다. 점심 한참 지나 배낭에 아이젠과 스틱을 챙기고 청계산으로 향했다. 혹시 몰라 플래시도 두 개 더 챙겨 넣었다. 도심은 비가 내려도 청계산은 어쩌면 눈이 내렸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무작정 올랐다.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 옛골 정토사에서 출발하기로 한다. 성남누비길 6구간 따라 매봉과 망경대를 거쳐 이수봉에 오르기로 한다. 정토사에서 바라보는 청계산은 짙은 운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산이 높은데 눈은 쌓여있겠지 조바심이 든다. 비가 아직 그치지 않아 숲길에 들어갈 동안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는다.
등산로는 해빙기 비포장도로처럼 진흙이 되어 등산화가 푹푹 빠진다. 눈길은 고사하고 진흙창에 미끄러지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다행히 산기슭으로 가니 잔설이 보이기 시작한다. 눈반 진흙반이라 걷기에 여간 곤욕이 아니다. 눈길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라도 찧으면 웃어넘기겠지만, 진흙에 벌러덩 미끄러지면 아마 육두문자가 나올 것 같다. 산 아래는 비는 내렸는데, 여기는 진눈깨비가 내렸다. 그럼 산 위로 올라갈수록 눈을 볼 수 있겠다.
청계산이 수도권에 있다고 해도 주봉인 망경대는 해발 618m에 이른다. 높은 봉우리도 이수봉, 매봉, 옥녀봉, 국사봉 여러 봉우리다. 올라가는 길은 가팔라 숨을 제대로 쉬기도 벅차다. 그래도 쉬지 않고 오른다. 괜히 마음만 급하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그래, 날이 점점 추워진다고 하나 산 위 눈이 쉽게 녹지 않겠지. 멈추니 비로소 바위 위에 작은 돌 두 개를 얹어놓은 것이 보인다.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옛골에서 올라가는 길은 사람이 없었는데, 서울에서 올라오는 원터길과 합류되고서부터는 제법 사람이 많다. 신분당선 청계산입구역이 생기고부터 청계산 등산길은 원터길에서 매봉까지 활성화되었다. 대신 옛골은 한적하다. 담소를 나누며 오르는 사람들을 보게 되어 다행이다 싶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매봉까지 오르고 하산한다. 이수봉까지 넘어가려면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산은 해가 금세 진다. 겨울산에서 해가 지면 속수무책이다.
청계산 명물 돌문바위까지 다다랐다. 저 사람 인(人)처럼 보이는 바위틈을 세 번 지나가면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나는 이번에도 돌문 사이를 지나지 않는다.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진작에 돌고도 남음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지나쳐왔던 미니 돌탑을 쌓은 사람도 돌문을 모티브로 하여 사람 人처럼 쌓지. 어차피 작은 돌이나 큰 돌이나 사람이 짓거나 자연이 짓거나...
문득 사방이 눈으로 덮여있는 것을 느낀다. 바위에도 나무에도 아직 떨어지지 못한 나뭇잎에도. 하얀 눈으로 세상이 뒤덮였다. 내가 이 광경을 보려고 그리 서둘러 올라온 거다. 올라오길 백번도 더 잘했다.
관악산은 바위 산이라 악산이라 부르고 청계산은 흙산이라 육산이라 부른다. 하지만, 정상에 다다르면 바위가 관악산 바위 못지않게 웅장하고 생김새도 걸출하다. 하얀 눈으로 채색되니 영락없이 수묵화다.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인왕제색도를 청계산에서 재현된 것이 아닌가! 한동안 자리에서 떠나지 못한다.
정식 산행코스에서 벗어나 특전사 충혼비에 들려 묵념한다. 1982년 6월 공수특전사 53명을 태운 수송기가 기상악화로 이곳 청계산에 추락했다. 장병 모두 사망했으며,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충혼비가 세워졌다. 그들은 갓 입대하여 교육을 받던 훈련병이라고 한다. 더구나 이 사고 나기 전 1982년 2월에도 특전사 요원을 태운 수송기가 한라산에 추락해 모두 숨진사고가 발생했었다. 대형 사고를 막지 못했다면 인과관계를 철저하게 따져 결과에 따라 책임을 묻고 재발방지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극은 되풀이될 뿐이다.
배바위에 올랐다. 평상시 같으면 산 아래 서울과 성남이 한눈에 보이는 봉우리다. 시야가 뚫려 있어 매사냥터로 쓰였다고 하여 매바위다. 바위에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며 눈 덮인 바위에 올라섰다. 이때부터 아이젠으로 갈아 신는다. 바위에 얼어붙은 얼음이라도 밟는 순간 그대로 미끄러져 바위아래로 떨어진다. 짙은 운무로 바위 아래는 보이지 않지만, 사방에서 괴괴하게 우는 바람소리에 바닥은 천길 낭떠러지임을 알겠다.
모든 나뭇가지에 눈이 엉겨 붙었다. 팥배나무 나뭇가지도 눈과 엉겨 꽁꽁 얼어붙었다. 팥배나무 붉은 열매는 아직 떨어지지 않고 가지마다 알알이 달려있다. 먹을 것이 귀한 겨울산에 팥배나무 열매는 산새들에게 고마운 먹이다. 그런데 열매가 꽁꽁 얼어붙어서 새들이 잘 따먹을 수 있을는지..
드디어 매봉에 도착했다. 매봉 정상석에 사람들이 줄 서서 사진을 찍기 바쁘다. 홀로 산행한 처지라 줄 서서 사진 찍는 것도 머쓱한 일이다. 그저 뒷모습을 찍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다. 매봉 정상석에는 유치환의 시구절이 아래와 같이 새겨 있다.
내 아무것도 가진 것 없건마는
머리 위에 항시 푸른 하늘 우러렀으며
이렇듯 마음 행복되노라.
매봉정상석에서 기념사진을 찌은 사람은 뒤돌아 내려간다. 나는 이수봉으로 넘어가기로 한다. 예전 이곳 등산로는 훼손되어 잔돌투성이로 위험한 구간이었다. 사람들이 경치가 더 좋은 이수봉 쪽을 보지 않고 그대로 되돌아가는 것이 못내 아쉬워 데크계단도 설치했다. 그래도 지하철 타고 온 사람이 이수봉 쪽으로 넘어가긴 쉽지 않다. 여기서부터 걸어갈수록 되돌아가는 길이 아주 막막하기 때문이다.
숲길에서 흙을 밟고 바위를 밟고 싶다. 산에 데크계단이 설치된 것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도 많다. 필자가 숲길에서 자연석이나 침목이나 식생토낭, 방부목, 고사목 등 별별 재료로 계단을 만들어봤지만, 데크계단이 내구성이나 환경보전측면에서 가장 우수하다. 특히 데크로 설치된 구간에서 사람들은 난간을 넘어 샛길을 만들지 않아 주변 자연이 보전된다. 더욱이 사람발에 의한 답압으로 토사가 유실되지 않으니 환경적으로도 차선이다.
매봉에서 이수봉 가는 길은 청계산 능선이다. 과천에서 넘어오는 칼바람에 귓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다행히 털모자를 가지고 와서 매서운 바람은 피한다. 바위는 천년을 만년을 억센 칼바람에도 미동도 않고 의연하다. 그 옆에 생물인 소나무는 얼마나 더 대단한가!
망경대 정상에 왔다. 망경대는 군부대가 자리를 잡아 일반인은 출입이 통제되니 그 옆 석기봉이 망경대를 대신한다. 여기가 최정상인 셈이다. 평상시 날이 맑으면 서해까지 보인다. 여기도 매바위 못지않게 천길만길 낭떠러지다. 괜히 길을 자주와 봤다고 만용을 부렸다가는 이른 봄이 되어야 찾을 수 있다.
청계산 눈 덮인 바위산. 그 감동이 사라지지 않게 오늘 찍은 사진을 정리하고 글을 쓴다. 하루 지나면 언제나 그렇듯이 오늘 일은 과거가 되어 잊게 된다. 지나간 일을 뭐 또 새삼스럽게 떠올리고 그러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오늘 본 바위, 눈 그런 기억과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일요일 밤이라도 사진을 올린다.
홀로 산행은 누가 산진을 찍어줄 수 없으니 아이젠 신은 발로 내가 여기에 발을 디뎠음을 증거로 삼는다. 눈 내린 청계산 정상 바위에 내가 발을 디뎠다. 셀카는 찍어봤으나 사진 절반이 내 넓적한 얼굴로 채워져 지워버렸다.
망경대에서 이수봉 가는 길은 소나무 숲이다. 산 허리 아래는 신갈나무가 우점종이다. 그나마 산능선 바위틈 척박한 환경에서라야 소나무가 살아갈 수 있다. 이렇게 장대하고 우람한 소나무가 다른 낙엽 활엽수 등쌀에 밀려 사라진다. 물론 그것은 우리 숲이 건강해지기 때문이다.
상고대.
영하의 온도에서도 액체 상태로 존재하는 물방울이 나무 등의 물체와 만나 생기는 것을 말한다. 즉, 호숫가나 고산지대의 나뭇가지 등의 물체에 밤새 서린 서리가 하얗게 얼어붙어 마치 눈꽃처럼 피어 있는 것을 상고대라 한다. 이는 '수상(樹霜 air hoar)' 또는 '나무서리'라고도 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드디어 이수봉에 도착했다. 사람은 아무도 없고 적적하다. 매봉과 사뭇 비교된다. 그래도 높은 소나무 여러 그루가 호위하고 정상석 홀로 서있으니 운치 있다. 이수봉 표지석 뒤에는 ‘조선 연산군 때의 유학자인 정여창 선생이 스승 김종직과 벗 김광필이 연루된 무오사화의 변고를 예견하고, 한때 이산에 은거하며 생명의 위기를 두 번이나 넘겼다고 하여 후학인 정구 선생이 이수봉이라 명명하였다.’라고 적혀있었다.
이수봉은 소나무 숲이다. 겨울에 과연 소나무가 철갑을 두른 듯 자라났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 싶다. 소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얼마나 높고 곧게 자랐는지 하늘만 보았다. 대지에 단단히 버티고 있는 줄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소나무의 위엄을 느낄 수 있는지 미처 몰랐다. 특히 겨울에는.
소나무 따라 내려가는 길이 봉오재로 내려왔다. 거진 다 내려오니 언제 그랬냐는 듯 잔설만 드문드문 보인다. 옆에는 천림산봉수지가 있다. 며칠 전 문화재청이 천림산봉수지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했다. 부산 황령산 봉수대에서 올린 봉화를 한양 남산으로 전달하는 봉수대다.
산에서 내려왔다. 사방은 올라온 것처럼 비가 추적추적 다시 내린다. 산 위를 보니 안개가 걷혀 봉우리가 하얗게 드러난다. 꿈길을 걸은듯하다. 그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하여 급하게나마 몇 자 적어 본다.
**산행정보(램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