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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행 Mar 01. 2024

그 버드나무를 기억할 뿐이다.

그 연못가를 기억할 뿐이다. 
무너져 내렸던 곳. 
그날이 기점이다. 
산산이 부서진 젊음. 그리고 덧없는 미래. 


앞으로의 비탄이 명확하게 그려졌지만, 그래도 안쓰럽게 웃으며 버텼다. 많은 고민의 시간이 있었으리라. 몇 날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결심이 섰을 때 이야기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종일 돌아다니다가 그 교정 연못가에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버티면서 미소 짓기만 했다.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는가! 그 모습에 당황하지도 않은 너. 


능수버들이었더가? 아니면 수양버들이었던가! 해마다 오월 축제면 젊은 사람들은 굵은 나뭇가지에 동아줄을 매달고 그네를 만들었다. 쑥스러운 사람은 타지 못하겠지, 연못가 위로 휘휘 날아오르는 그네에 설라치면 배봉 오르는 젊은 사람들 한 시선을 받을 터이니..



하필 그 버드나무 아래에서 달이 능선 떡갈나무 위로 오를 때 말할 게 모람. 날이 차가워지려는지 작은 입술에서 입김도 연기처럼 오르는 것도 보였지. 인연이 다했다는 말은 그때 나오는 것이던가? 웃음을 지울 수가 없었지. 그런 이야기 들었다고 해서 너를 보고 있는데 표정을 일그러뜨릴 수가 없잖아. 오늘따라 즐겨 입던 체크도 한쪽 밀어 두고 베이지 카라 티를 입고 나왔는데. 구두도 반짝이게 닦았고 말이야. 너에게서 무슨 말을 들어도 마냥 좋았지. 그냥 좋았어. 그날 배봉의 떡갈나무와 신갈나무 마른 잎사귀는 찬바람에 바스락거리는 가랑잎이었지. 그 소리도 들렸어. 버드나무 아래 버들치 한 움큼 물속을 헤집는 소리도. 너의 말은 의미를 헤아릴 수가 없었고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갸우뚱했지만, 가슴 깊은 속에서는 이미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때 모든 것은 거기서 멈췄다.



돌이켜보면 모든 일에 회한이 남겠지만, 너무 큰 슬픔에는 차마 시간을 되돌리기 힘들지. 앞으로 무엇이 남아있을까! 뒷산 갈참나무 서리 내릴 때까지 나뭇가지에서 떨어지지 않는 질척댐을 몇십 번이고 본 지 모르겠다. 어떤 해는 함박눈을 맞아가며 질기게 버티고 있더구나. 한여름 짙은 녹음으로 숲길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가을 단풍은 참나무도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정도로 불긋한 색을 내비친 갈참나무는 가을 참나무라고 부를 정도로 가을에도 아름다웠지. 그 정도로 기억에 남았으면 좋았으련만 가장 늦게까지 모든 나무 낙엽으로 나뭇가지 매끈하게 앙상할 때 갈참나무는 뜯기고 너덜너덜해진 잎이 미련스럽게 가지마다 눌어붙어 있다. 그 모습이 누더기 물박달나무처럼 보이기까지. 

사람의 기억이란 것이 이리 거추장스럽던가! 슬픔을 지우기 위해 감정을 눌러야 했고, 사라진 감정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환희까지 느낄 여지마저 지웠지. 



나무의 옛 잎이 떨어지는 까닭은 새잎을 맞이하기 위함이다. 새잎은 하늘의 산소를 힘껏 들이마시고 대지의 물과 기운을 더욱 힘차게 빨아들일 수 있다. 기운이 떨어진 잎은 좋은 시절 잎맥이 정갈하고 초록의 잎몸이 풍성하였다고 하여도 시간은 모든 존재를 시들게 하기 마련이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나무에 헌 잎들이 남아있다면 새잎은 돋아나지 못하고 나무는 시들게 된다. 너를 버리지 못함으로써 거추장스러워진 기억의 무게는 앞날에 대하여 기쁨을 지우게 만들어버리고 말지.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새싹이 돋을 때도 꽃이 질 때도 때가 있어야 그러는 것처럼 관계도 예외는 없습니다. 연둣빛 새잎이 붉은 꽃을 안을 때도 퇴락한 갈빛 묵은 잎으로 땅바닥에 떨어질 날을 기다리듯 사람의 온기는 곧 냉기로 바뀌고 맹세는 헛된 맹세가 됩니다. 

매번 벚나무 더 활짝 피면 꽃구경 가야지 생각했는데 번번이 봄비에 꽃잎이 모두 지고 나서야 벚나무 생각이 납니다. 볕이 따스할 때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봄바람이 제법 거세게 불고 비가 내리쳐야 간밤에 행여나 꽃잎이 모두 떨어질까 안달했지만, 항상 봄비에 꽃잎이 모두 떠내려가서야 깨닫게 됩니다.

이제 3월. 곧 봄바람이 불면서 버드나무 연약한 연한 연두 잎사귀가 돋으면 다시 벚나무 꽃이 만개할 것입니다. 올해는 기어코 벚나무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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