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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행 Aug 21. 2019

성남누비길에서 만나는 병자호란

역사와 함께하는 성남 누비길

병자호란 발단과 전개 그리고 결말

무작위의 작위란 말처럼 성남누비길을 1구간부터 걷노라면 병자호란의 발단과 전개 그리고 결말의 사건 전개가 누비길 마지막 7구간을 걸을 때까지 궤를 정확히 맞춘다. 성남시가 이웃하는 서울, 하남, 광주, 용인, 의왕, 과천 등과 경계가 되는 산의 능선을 일주하는 걷기 자체로 병자호란 시대적인 아픔을 따라가는 서사적인 길이다. 일부러 단편적인 옛이야기 하나를 억지로 꿰맞추며 역사성을 홍보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성남누비길은 그 길 자체가 올곧이 역사를 되짚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신기하리만치 누비길 따라 걸으며 마주치는 역사적 사실들이 모두 기승전결이 있는 스토리이고 궁극적으로 순환되는 구조라는 것을 느꼈을 때의 묵직한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다. 


1636년 겨울, 청나라의 10만 군대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범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임금과 조선 조정은 1만 5천의 군사와 함께 황급히 남한산성에 피난하였고, 조선 팔도의 백성은 임진년처럼 의병으로 산성에 몰려왔다. 그러나, 조선 의병의 치열한 항전에도 불구하고 처절한 패배와 죽음 뒤에 임금은 치욕스러운 항복을 하고 말았으며, 이에 조선의 백성은 전쟁의 전리품이 되어 노예로 청나라에 끌려갔던 역사적 사실이 바로 성남누비길에 낫낫이 녹아 있다. 남한산성과 행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나름 의미가 있다지만, 진짜 돌아봐야 할 역사는 성안이 아니라 성 밖에서 일어났다. 

성남누비길 첫 번째 구간인 남한산성길 중 망경암에서 바라본 복정동과 멀리 송파진이 보인다.

병자호란의 기승전결 성남누비길

제1구간 남한산성길 -  청의 침입과 임금의 몽진, 그리고 남은 백성의 고통

성남누비길 제1구간 첫 출발지는 성남시 복정동으로 이 길은 병자년 청의 침입으로 한양에서 인조와 대신들이 피난하였던 길이다. 조정은 급하게 몽진을 와서 물맛이 좋아 복이 있는 우물이라는 복정동의 복우물(福井)에서 목을 축이고 남한산성으로 떠났다. 왕과 군사들이 산성으로 올라간 후 인근 백성들은 곧 닥쳐올 환란에 겁을 먹고 우왕좌왕했다. 그 사이 백성들은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채, 곧 들이닥친 청나라 군대에 사로잡혀 끔찍한 살육을 당하고 말았다.

한편, 복정동에는 지명의 기원이 되는 복우물이 있던 정 씨 집안에선 집안의 가보와 재물을 복우물에 숨기고 피난을 떠났지만, 복우물 주인은 끝내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성남누비길 첫째 구간은 한강 송파진을 건너온 조선 조정이 복정동에서 남한산성에 이르기까지의 피난길이다.

누비길 첫 구간 시발점 복정동 인근 복우물. 복이 있는 우물이라는 뜻의 복정(福井)동 마을 유래는 복우물과 관련 있다.


조선 임금은 청의 침입에 서둘러 한강을 건너 송파진에 닿고 복정동을 거쳐 남한산성 남문으로 몽진을 떠났다.


제2구간 검단산길 - 성곽 따라 벌어진 외적과의 처절한 전투

 2구간 검단산길에서는 웅장한 남한산성 남문과 그 굳건한 성곽 옆을 지나면서 이 일대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의 상흔을 볼 수 있다. 1636년 청의 침입으로 임금과 대신들은 굳건한 남한산성 성곽 안에서 성문을 닫고 척화냐 화친이나 지루한 논쟁을 일삼았다. 조선 조종이 머문 남한산성은 해발 500m의 험준한 산세에 세워진 난공불락의 성으로 수십만의 청나라 군대라도 쉽사리 성을 넘지 못하였다. 대신 성 밖의 백성들을 잡아 학살하거나 군 막사에서 노예로 부려먹었다. 

성남누비길 제2구간 검단산길은 성문을 넘지 않고 성곽 따라 검단산에서 이배재고개까지 가는 숲길이다. 성곽의 웅장한 성곽 아래를 지나면서 깎아지는 듯한 산비탈 위에 다시 쌓아 올린 성곽을 보면 어느 외적에게도 함락되지 않은 남한산성의 위용을 볼 수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청과의 전투는 치열하여  밤낮으로 포성과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허물어진 남한산성 제1옹성. 한창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 


제3구간 영장산길 - 조선 팔도 근왕군 출정과 청과의 대항전 

3구간 영장산길에서는 산성에 갇힌 조정을 구하기 위한 조선 팔도 근왕군의 전투와 비극적인 역사적 흔적이 남아있다. 임금이 산성에 있을 때 조선 팔도의 의병들은 임진년처럼 다시 분기하여 근왕군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하고 변변치 못한 무기를 들었지만, 그들은 매서운 추위를 무릅쓰고 남한산성으로 몰려왔다. 하지만 충절의 기세가 높다 하여도 우세한 청군의 무력 앞에서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다. 영장산의 돌마(突馬)라는 명칭은 충청도에서 올라온 근왕군이 청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고, 그때 주인을 잃은 말 수천 필이 영장산 산골짜기에 나타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영장산 깊은 숲길을 거닐 로라면 어디서 말의 울부짖음이 들릴 듯한 적막하고 고요한 길이다. 

겹겹이 둘러싼 영장산 깊은 산. 근왕군은 언제 올 것인가? 임금은 고대한다. 저 산맥을 넘어 우리 군사는 언제 당도할 것인가!


영장산 정상석. 병자호란 당시 청의 칼날에 쓰러진 근왕군의 넋을 기리는 묘비 인양  서있다. 


병자호란 당시 주인을 잃고 수많은 말들이 산속을 돌아다녔다는 산. 지금은 돌마로가 개통되어 있다.  


제4구간 불곡산길 - 죽어 흙으로 삭아진 충혼의 넋

임금이 청나라 칸이 왔다는 소식에 성을 나가지도 머물지도 못할 때, 경상도에서 강원도에서 근왕군이 몰려와 임금을 구원하려 하였다. 하지만, 청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근왕군은 크게 패배하여 궤멸하고 말았다. 강원도 근왕군은 검단산에서, 충청도 근왕군은 험천에서 청나라 군대에 전멸당했다. 전라도 근왕군은 광교산 근처에서 청군을 물리쳤지만 군 보급물이 소진되고 군사 피해도 커 수원으로 퇴각해버렸다. 경상도 근왕군은 허완과 민영이 이끌었다. 그 수가 무려 사만이 넘었다. 하지만, 단 삼백 명의 청나라 기마병에 의하여 광주 쌍령에서 몰살당했다. 『병자남한일기』에 따르면 ‘도망가다 계곡에 사람이 쓰러져서 쌓이면서 깔려 죽었는데 시체가 구름처럼 쌓였다.’고 기술했다. 미처 수습되지 않은 뼈들은 흙속에서 삭아 버렸다. 너무나 무참한 죽음이었다. 우리나라 어느 땅이 남한산성 기슭처럼 팔도 방방곡곡의 백성들 피가 모아져 흘린 곳이 있을까 싶다. 

유달리 산에 절이 많아 불곡산이라 불리는 숲길은 아마도 혹독한 삭풍에 쓰러진 조선 군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일까 생각해 본다.


청군과의 전투에서 무참히 쓰러진 조선 군사의 뼈들은 미처 수습되지 못하고 흙속에서 삭아버렸다.


불곡산 정상. 청과의 전투 이후 한국전쟁에서도 중공군과 일전을 벌였던 전선이기도 했다. 


제5구간 태봉산길 - 항복 - 치욕의 삼전도비문 이경석의 묘

다음 5구간 태봉산길에서는 치욕적인 삼전도비문을 작성한 이경석의 묘를 지나가며 비운의 선비에 대하여 예를 표하고 넘어간다.  근왕군이 모두 패배하고, 세자와 왕족들이 피난한 강화도마저 함락되자, 조선의 임금은 초라한 모습으로 산성 서문을 나와 청나라에 항복하고 치욕적인 삼전도비문을 작성하였다. 이 비문을 작성한 이가 재상 이경석 선생이며  태봉산길에서 만날 수 있다. 이경석 선생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도승지를 맡아 전란을 헤쳐 나가는데 공헌했다. 비록 청나라의 승전을 기념하는 굴욕적인 삼전도비의 비문을 짓기도 했지만, 이는 다른 문장가들이 명나라에 배은망덕한 글을 올리지 못하겠다고 거부하였을 때, 수치스러운 항복 비문을 작성하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비문을 썼다. 후에 선생은 눈물을 삼키고 비문을 지으며 가족에게 “왜 나에게 글공부를 시키셨습니까? 참으로 천추의 한이 됩니다.”라며 한탄하고 비문을 작성했다. 이를 두고 선생은 두고두고 부끄러운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태봉산길 인근에서 보는 재상 이경석 선생 묘. 학자는 청나라에 끌려가는 백성을 보며 삼전도비를 짓고는 한탄하였다. 
한 겨울 태봉산길. 그날 전쟁에서 지고 조선의 백성들은 청나라 심양으로 눈을 저벅저벅 밟으며 끌려갔다.

 

제6구간 청계산길 - 피눈물 흘리며 넘는 고개 

성남누비길에서 제일 높은 고봉이 있는 청계산 정상에 서면 남한산성이 한눈에 보이고 반대쪽 서해바다와 북쪽 옛 삼전도가 보인다. 항복 후 삼전도에서 청나라 칸에게 삼배구고도의 치욕을 당한 인조는 서둘러 한강을 건너려 했을 때 임금과 신하들이 뒤엉켜 배에 먼저 올라타려 아우성이었다. 청나라 군사에 사로잡힌 백성들은 죽어가며 임금을 향해 “왕이여! 왕이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吾君 吾君 捨我以去乎!)” 울부짖었다. 백성들은 고국의 산을 등지고 청군에 이끌려 심양으로 노예로 끌려갔다. 

청계산에는 조선 연산군 시절 정여창 선생이 사화를 피해 산속에 숨었을 때 피눈물 흘리며 넘었다는 혈읍재가 있다. 선생은 당시 청계산 망경대에 오르면서 이 고개를 넘다 하도 원통해 곡을 하며 울었었다. 그 피울음 소리가 산 멀리까지 들렸다 하여 혈읍재라 이름 지었다. 청나라에 끌려가는 백성들의 곡소리에도 어찌 피울음이 배어있지 않았을까 싶다. 


청계산에 오르면 한눈에 조선 팔도가 보인다. 어드메쯤 끌려가고 있는가?


긴 밤을 새우고 새벽녘에 동틀 때까지 가장 높은 곳으로 달려가 바라본다. 어느메뇨?


제7구간 인릉산길 - 전쟁 후 각성. 나라와 백성을 위한 길이란? 

성남누비길을 돌면 각 구간마다 병자호란의 역사적 자취가 많이 남아있었다. 여기 마지막 구간 인릉산에서도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바로 신촌동 행정복지센터 도로 인근에 잘 조성된 묘소가 있는데, 그 묘가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의 거두 최명길의 아버지 최기남 묘다. 최명길 선생은 병자호란 당시 청과의 화친을 주장했을 때, 대신들은 그를 오랑캐의 개로 업신여기며 탄핵을 여러 번 주청 했다. 병자호란 말미에 최명길이 항복문서를 작성하였으나, 이 문서마저 김상헌이 부친 뵈기 부끄럽지 않냐 하며 호통치고 찢어버렸다. 이때 최명길은 “대감은 찢으나 나는 주워 맞추리다.”며 태연하게 말하고 조각난 국서를 붙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김상헌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단지 “나라에는 문서를 찢는 신하도 필요하고 나처럼 붙이는 신하도 필요하다.”며 말했다.

궁박한 산성 안에서 오랑캐와 싸우자는 척화론을 외칠 때 최명길은 백성을 위해서라면 청과도 화친해야 한다고 했다. 주변으로부터 모멸을 당하면서도 청에 대하여 끝까지 화친을 주장할 수 있던 것은 그의 아버지 최기남의 영향이 컸다. 최기남은 지금의 함흥지방 부사로 지낼 때 날로 강성 해지는 여진족을 보며 장차 국난이 닥칠 것을 염려했다. 그리고 아들에게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는 서로 화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그 영향으로 최명길은 오직 백성을 위해서 청과의 화친을 결정했다. 전란 후에도 최명길은 청나라로 끌려간 백성들을 데려오기 위하여 발 벗고 나서서 수만 명의 조선 포로들을 데려오기도 했다. 

성남누비길 제7구간 인릉산길에서 만나는 최명길 선생 부친 최기남의 묘소


얼었던 물이 녹고 끌려갔던 백성들이 돌아왔다. 그 앞에는 최명길 선생이 앞장서 있었다.


성남누비길 마지막 구간에서 탄천이 흐르는 방향 따라 걷다 보면 다시 첫 구간과 맞닿는다. 모든 것은 순환된다.

길의 시작과 끝이 이어진 것처럼 수백 년 전 너무나 무력했던 과거의 역사에서 현재를 반추할 기회를 갖기도 한다. 잊고 싶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 속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면 성남누비길은 걸을 가치가 충분히 있다. 


성남누비길 안내도. 각 구간 명소마다 스탬프인증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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