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비길을 걷는다_그 뒷 이야기_ 치유의 숲
성남누비길 7개 구간 중 적당한 곳 몇 군데에 안내판만 설치하면 될 일이었다. 안내판이라는 것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단지 등산로 주변 기이하게 생긴 바위나 유적지가 있으면 그곳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 간단하게 몇 줄 적으면 그만이었다. 길을 걷다가 무료할 때쯤 안내판 하나씩 툭 튀어나와서 재미있게 읽고 가라는 취지였다.
그런데 의외로 안내판을 설치하는 일이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 자연과 식생 정보를 모른 채 그 길을 대표하는 안내판을 설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알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다. 기한은 다가오는데 안내판 설치할 장소를 고르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그런 무지의 자각이 숲길을 바지런하게 걸으며 자연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채집하게 하였다.
때론 옛 것을 찾기 힘들 때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다.
성남누비길은 남한산성길, 검단산길, 영장산길, 불곡산길, 태봉산길, 청계산길과 인릉산길 등 7개의 산을 넘는 등산로이며 이중 남한산성길은 복정역에서 출발하여 영장산(태평동)을 넘고 산성역을 지나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이다. 누비길은 산림 내 우점종을 차지하는 신갈나무와 상수리나무 사이로 굽이굽이 이어져 남한산성까지 닿는다. 길을 걷는 중에는 우거진 참나무 높은 우듬지와 풍성한 잎사귀로 하늘도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드문드문 산 능선에 머리에 두른 하얀 띠처럼 남한산성 성곽을 볼 수 있다.
그 길 중간쯤 산성역 방면 숲길을 걸으면 병사들이 열을 맞추어 도열하듯 나무들이 줄 맞춰 서 있는 조림지가 있다. 세워진 지 오래되었을 법한 녹슨 안내판에는 삼십 년 전 식목일에 맞추어 잣나무를 심었다는 내용이 있다. 잣나무는 예전부터 전쟁에 대비하여 남한산성 기슭에 심기도 하였는데, 이는 유시시 잣을 채취 하여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곳은 황무지였던 곳에 조림용으로 식재한 것이다.
도로와 연접한 비탈면에는 잣나무가 밀집되게 자라났다. 당시 어린 묘목을 심었을 때는 여유롭게 간격을 맞춰서 심었겠지만, 삼십 년이 흐른 후 잣나무는 빼곡하게 자라났다. 햇빛을 못 받는 부분의 나뭇가지는 말라 죽고도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아 숲은 어둡고 음침했다. 더구나 수북하게 쌓인 잣나무 잎은 숲을 적막하게 했다.
어두운 잣나무 숲을 보니 그 음습함에 몸이 잠시 움츠려 들었다. 예전 어릴 때 학교 주변 으슥한 야산에서 일어난 사건사고 소식을 듣고 몸이 떨려왔던 기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당시 학교 옆 숲길은 인적 드물고 위험한 곳이었으며 길을 잃은 청소년들이 모여 탈선을 저지르기 좋은 장소였다. 등하굣길이나 학교 운동장에서 마냥 위험하게 바라본 야산이 바로 이곳이었다.
잣나무 하면 가평이 떠오른다. 잣나무가 고산지대에 잘 자랄 수 있는 여건이 되지만, 가평에 잣나무가 많은 이유가 있다. 한국전쟁 이후 화전민들이 가평의 산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온 산을 불태워 밭을 만드는 바람에 민둥산이 되어 버렸다. 이에 정부는 화전민들을 모두 내쫓고, 대신 잣나무 묘목을 심으면 쌀을 주는 취로사업을 했다. 이후 화전민들은 부지런히 산에 잣나무를 심었다. 나중에 그 묘목이 커서 아름드리 잣나무가 되었을 때 가평은 수십만 그루의 잣나무 숲을 이루게 되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잣을 팔아 끼니 걱정을 덜었고, 게다가 피톤치드가 특히 많이 나오는 잣나무 숲은 유명한 휴양림이 되었다.
불현듯 이곳 성남의 잣나무 조림지가 가평처럼 잣나무 휴양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비록 이곳이 어린 시절에는 그늘진 숲이었지만, 다음 사람에게는 밝고 건강한 숲으로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 여기에다 힐링 숲을 만들면 좋겠네요. 잣나무 숲이 넓으니 사이로 야자 매트 깔고 산책로도 만들어서 힐링 숲으로 꾸미는 거죠.”
머릿속에서 잣나무 사이로 황톳길이 생기고 사람들이 양팔 벌려 걷고 있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곳곳에 벤치가 놓여 엉덩이를 붙인 사람들은 책을 본다. 잣나무 아래서 불어오는 바람에 책장이 넘어가자 머리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함박웃음을 짓는 모습이다. 그런 그림을 상상하고 있자, 옆에 있던 장 실장이 한마디 하였다.
“잣나무 숲은 좋은데 시끄러울 것 같네요. 바로 찻길 옆이라서.”
뒤에 처지기만 하던 장실장이 어느새 나타나 산통 깨는 소리를 하였다. 잣나무 사이를 걷던 사람들이 자동차 소음에 얼굴을 찡그리고, 벤치에 앉던 사람은 책을 탁 덮어버리고 일어선다. 피톤치드의 신선한 숲 향기에 자동차 매연이 섞여버려 매캐한 냄새가 날 것 같았다. 등산도 싫고 나무도 관심 없다는 그가 맞장구까지 쳐주진 않아도 무안을 주니 얄궂게 보였다. 그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며 별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발걸음을 빠르게 하였다. 덕분에 우리 발걸음과 보조를 맞추려던 그는 육중한 몸 때문에 산길에서 더욱 허덕거렸다.
[나는 누비길을 걷는다 中]
잣나무 조림지를 휴양림으로 바꾸려는 생각은 행동으로 옮겨졌다. 죽은 나뭇가지를 가지치기하고 경합되거나 생장에 방해되는 가지를 전정하니 하늘의 햇살이 숲에 들어올 수 있었다. 바람도 나무 사이로 들어왔다. 몇 년 후 어두웠던 잣나무 숲은 습한 기운이 빠져나가고 환하게 밝아졌다.
옛 예비군훈련장이 있던 황폐한 곳은 국방부에서 폐타이어를 철거하며 폐기물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옛 참호가 있던 자리는 흙으로 메꿔 정자를 세우기도 했다. 바람이 통하고 햇볕이 들어오는 숲에 사람들도 들어와 쉴 수 있도록 벤치와 평상을 놓았다.
잣나무 잎이 쌓인 길은 걷기에 푹신하고 주변 소음을 흡수하여 한적하다. 빼곡한 잣나무 숲에서 홀로 있으려니 바람소리가 흔들리는 잣잎으로 볼 수 있고 햇빛이 잣잎 떨어지는 소리로 들을 수 있었다. 가끔 사람들은 등산화를 벗고 맨발로 걷기도 한다. 잣나무 잎 밟는 발소리조차 서걱거림 없이 조용하다.
잣나무가 많은 숲을 걸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상쾌한 느낌이 든다. 잣나무에게서 피톤치드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나무는 해충이나 곰팡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피톤치드를 뿜는다. 이것이 사람에게는 아토피 치료나 우울증 등의 병에도 효과가 있다. 잣나무 숲의 이름을 힐링 숲 산책길로 정하고 안내판을 설치했다. 이제 이곳은 사방사업으로 잣나무를 심은 조림지가 아니라 숲과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힐링숲이 되었다.
숲길을 걷다가 누군가 물었다. 혹시 잣나무와 소나무를 구분할 수 있는지를.
나름 잣나무와 소나무에 대하여 아는 상식선에서 소나무는 바늘잎이 2개가 한 묶음이고 잣나무는 5개가 한 묶음으로 나는 것으로 구분한다고 했다. 그래서 잣나무를 오엽송으로 부르기도 하며 덧붙여 리기다소나무는 잎이 3개씩 난다고.
하지만, 멀리서 보면 잣나무와 소나무를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 자세히 보면 소나무 껍질이 잣나무보다 더 갈라지고 우둘두툴 거친 것과 잎은 은빛이 은은하게 나는 잣나무와 달리 소나무는 온통 초록색이라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래도 숲길을 걷다가 마주치면 두 나무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잣나무와 소나무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사철 푸른 상록수로 대부분 소나무를 더 친숙하게 생각하지만, 잣나무야 말로 원산지가 우리나라인 나무로 외국에서 잣나무를 Korean Pine으로 부른다. 안타깝게도 소나무는 Japanese Red Pine으로 부른다.
우리가 공원이나 조림지에서 쉽게 보는 잣나무는 스트로브잣나무가 대부분이다. 내한성이 강하고 건조한 곳에서도 잘 자라며 공해에도 강한 편이라 산지 조림 용수나 도심지 조경 조림으로 많이 심는다. 생장도 빠르고 소나무재선충병에 강하기 때문에 잣나무보다 더 많이 심는다.
잣나무와 비교하면 수형은 곧게 자라며 원추형이고 나무껍질은 거친 잣나무와 비교할 때 매끈하다. 목재가 희고 깨끗하며 밝고 흰빛이 나기도 해서 스트로브잣나무는 영어로 White Pine으로 부르기도 한다.
성남누비길 제1구간 남한산성길의 힐링 숲 산책길은 잣나무 숲이 아닌 스트로브잣나무 숲길이다. 스트로브잣나무가 외래 수종이고 사방 조림용에 쓰이는 나무지만, 탄소흡수능력도 뛰어나고 오염물질을 방출하지 않으면서도 피톤치드를 더 많이 내뿜는다. 그래도 스트로브잣나무 힐링숲이라고 하면 왠지 치유를 받는 느낌이 적어 그냥 잣나무 힐링숲이라고 하려다가 이것도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라 그냥 피톤치드 힐링 숲이 되었다.
음습했던 스트로브잣나무 조림지를 가꾸고 힐링 숲이 되었을 때, 숲 안 평상이나 야외벤치에는 등산객들이 종종 쉬다 간다. 간혹 위례나 산성, 단대 방면 주민들이 소풍 오듯 간식을 가지고 와서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도로에 가깝고 지하철역도 가까우니 접근성이 좋고 산림욕장처럼 조성된 숲에서 말 그대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며 힐링을 한다. 숲의 공익적 가치가 높아져 사람과 자연이 친화하며 공존하는 숲이 되었다.
그리고 이 숲 속에 은수미 성남시장과 90년대생 직원들이 누비길을 걷다가 간식을 먹기도 했다. 직장 내 공감 세대 90년대생 직원과 소통한다는 목적으로 시장님과 새내기 직원들이 누비길을 걷고 힐링 숲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시며 격의 없는 대화를 하였다.
이날 은 시장은 10명의 직원들과 1구간 중 복정동~산성육교 일대 4km를 1시간 30분가량 함께 걸었다. 가벼운 산행 후에는 사회에 새롭게 진입하는 가장 젊은 계층인 90년대생들의 생각과 비전을 들어보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은 시장은 “걸으면 자세히 볼 수 있다. 지자체장은 길을 걷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라며 “시민 가까이에서 함께하면서 시민의 삶, 희로애락을 구체적으로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타인에 대한 배려, 공감, 감정이입이 필요하다. 90년대생은 다양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 자라서 공감이 익숙한 세대”라며 “시민들에게 정성과 진심을 담아 감동을 주는 행정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라고 당부했다. [2019. 5. 3. 성남 보도자료]
음습한 숲이 힐링 숲으로 바뀌면 갈 곳이 없던 아이들이 많이 놀러 올 줄 알았다. 이 숲을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이제는 벤치에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는 학생들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힐링 숲 바로 앞에는 중학교 세 곳과 폴리텍 대학 한 곳이 몰려있어 학생들이 많이 다녔었다. 아침 등교시간에는 지하철 산성역 3번 출구에서 네 학교 정문으로 가는 길은 가지각색 교복과 책가방으로 꽉 메워졌었다. 당시 이 길로 등교하던 나는 지각하지 않으려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떠밀리듯 뛰어가곤 했었다.
지금은 그 길이 쓸쓸하게 되어버렸다. 코로나 19로 등교를 하지 못해 통학로가 텅 빈 것만은 아니다. 창곡중학교를 비롯하여 근처에 있던 창곡여중과 영성여중 세 학교가 합쳐져 창성중학교가 되었다. 그럼에도 입학식에는 130명 갓 넘은 학생만 참여했다.
우리나라 인구감소가 사회문제라고 한다. 작년 우리나라 출산율이 전 세계 국가 중 최하위라고도 한다. 학령인구가 감소하여 학교가 없어진다고 했지만, 막상 내가 다녔던 학교가 사라지고 아이들이 줄어드는 것을 보니 그 문제의 심각성을 피부로 느꼈다. 자기 모교가 사라졌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농촌마을 분교 다니던 사람들인 줄 알았다. 내가 초등학교 때만 해도 내가 1학년 10반 오후반 61번이었다. 그런데 올해 그 학교 1학년 학생 수는 전체 123명에 불과했다. 아이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뛰어놀 수 있는 숲을 기대했건만, 정작 아이들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