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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행 Mar 17. 2021

성남누비길 Epilogue 2.

나는 누비길을 걷는다_그 뒷 이야기_걷고 싶은 길

성남누비길 걷고 싶은 길 되기까지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된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어떤 이에게는 잡목만 무성한 도심지 야산일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이 뛰어난 숲일 수도 있다. 전자라면 뒷짐 지고 먼산만 바라보는 것이고, 후자라면 배낭 메고 숲 속에 들어가 나무 사이 숲길을 걸을 것이다. 다른 모든 일처럼 모르는 일에 대한 시작은 언제나 관망이었다. 숲 밖에서 바라보는 산길은 등산화 깔창에 찐득하게 달라붙는 진흙, 바지에 달라붙고는 떨어지지도 않는 도깨비풀, 좁은 길 가장자리 스치면 쓰라린 찔레꽃 가시 줄기, 그리고 미처 피할 수 없이 얼굴에 달라붙는 거미줄...이었다.


수년 전부터 시 경계 등산로를 연결하여 누비길이라 이름 짓고 등산로를 정비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누비길을 모른다. 등산로에 테마를 부여하면 사람들이 좀 더 많이 찾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무슨 스토리텔링을 엮을 수 있는지 한참이나 옥신각신했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운영하는 걷기여행길 안내 포탈 이름이 두루누비(www.durunubi.kr)다. 그 사이트에 소개된 둘레길만 해도 전국에 550개가 넘고 코스별로는 1,400개에 이른다. 경기도만 해도 61개 길 193코스가 있다. 그중 누비길은 1개 길 7코스에 불과했다.
오래된 마을들은 풍부한 향토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그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아 스토리텔링을 쉽게 엮을 수 있다. 서울 북한산 둘레길이나 깊고 깊은 지리산 둘레길, 아니면 화산섬 제주도 올레길이야 워낙 유명하다. 지난달 전국 여러 길 중에서 걷기 좋은 여행길이 몇개 추천되었다. 상쾌하게 거닐 수 있는 숲길로 서울 인왕산 자락길, 인제군 원대리 자작나무 숲길을 포함하여 10개소가 뽑혔다. 한결같이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의 배경이 되거나, 숲의 여왕이라는 자작나무 70만 그루가 빽빽하게 자라나 그 자체로 멋진 숲길이다.
그런 길 틈바구니에서 성남누비길은 어떤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지 다들 고심했다.
[나는 누비길을 걷는다 中]


누비길을 떠나게 된다.

봄이 오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가고. 누비길을 걷고 또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그리고 또 다른 해가 와도 누비길을 걷는다. 길은 걸을 때마다 다르다. 같은 길을 걸어도 풍경이 달라진다. 철 따라 다르고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고 숲에 적응할수록 또 다른 모습이 보인다.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앞 누비길


끊임없이 이어지는 산길

누비길 63.1km는 숲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길. 산 능선 따라 오르고 고개 따라 내려가고 길은 이어진다. 도로로 산길이 끊어지면 등산육교가 숲을 잇는다. 남한산성길의 산성등산육교, 이배재도로를 연결하는 육교, 갈마치생태육교, 태재고개등산육교, 구미로등산육교 그리고 하오고개 등산육교. 길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영장산과 불곡산을 잇는 태재고개등산육교

제3구간 영장산길과 제4구간 불곡산길을 연결하는 등산육교는 아치형의 조형물이 산길을 걷는 사람들의 포부를 크게 갖게 한다. 마치 개선문을 통과하는 장군처럼 누비길 종주를 하는 사람을 맞이한다.

응달산과 국사봉을 잇는 하오고개등산육교

영장산과 영장공원을 잇는 산성등산육교는 헌릉로를 지나간다. 공원 산책로를 잇는 육교는 경관조명으로 밤늦게 하산하는 사람을 안전하게 지하철역까지 인도하기도 한다.

영장산과 청량산을 잇는 산성등산육교


들어가도 나가도 한 마음이 되는 문

누비길 7개 구간마다 들어가는 곳과 나가는 곳에 문이 있다. 지나갈 때마다 마치 산속 사찰의 불이문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 다른 점이라면 절의 불이문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는 것이라면 누비길의 문은 자연과 사람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점이라면 분별과 대립하는 속세를 떠나는 문이다.

누비길 구간 시종점 출입구

길에 들어서는 문이 꼭 현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바위가 문이 되기도 한다. 돌문바위는 세 번 지나가면 소원을 이룬다고 하여 등산객은 바위문을 들락날락하곤 한다. 그리고 웃는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며.

매바위 아래 바위로 된 돌문

조선 세조 임금이 소나무 아래 지나갈 때 나무가 가지를 위로 들어 임금이 무사히 지나가게 했었다. 그 공로로 정이품의 벼슬을 소나무에 내렸다고 했는데, 영장산의 소나무는 스스로 몸을 꺾어 문을 만들어 주니 정일품의 벼슬로 그 충정을 기려도 과하지 않다.

영장산 소나무 자연 문


고봉준령이 따로 없는 선계

성남누비길은 산을 넘는 길. 이웃 용인, 광주, 의왕, 과천, 서울과 경계를 짓는 산봉우리와 산 능선을 다니는 길이라 항상 산 정상을 지난다. 7개 구간의 7개 높은 봉우리. 도시 근교 둘레길로 생각하고 여유 부리며 다니다가는 그 험난한 산길에 좌절하고 만다. 대신 극복하고 묵묵히 걷는다면 값진 선물을 받을 수 있다.

국사봉 정상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인 나라.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산 너머 큰 산이, 큰 산 너머 더 큰 태산이 겹겹이 진을 치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산은 높고 높은 산이 아니라 깊고 깊은 산으로 부른다.

석기봉 정상

석기봉 가는 길은 바위를 붙잡고 암벽 타듯이 기어올라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정상에 오르 동서남북 사방이 확 트여 기어오른 수고로움이 단박에 사라지고 가슴이 다 시원하다. 남동쪽 성남 방면은 나무가 우거져 있는 데 반해 북서쪽은 의왕 과천 너머 서울까지 멀리 조망된다.

범바위산 정상

시선이 닿을 수 있을 만큼 볼 수 있다면 산과 하늘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산 아래 둘러싸여 살다가 산을 넘어선 기쁨은 쳇바퀴 돌 듯 반복된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을 만끽하게 한다.

인릉산 정상


길 따라 서로 다른 색계

누비길은 길마다 새로운 색을 만들어 낸다. 탄천을 건너는 누비길은 가을 코스모스로 울긋불긋 변한다. 하천 사면 따라 꽃 많이 심어놔 봄철에는 벚꽃을 비롯한 목련 등이 만개하고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장관을 이다. 하천 가에도 조경석과 갈대를 심어 청둥오리나 백로도 날아들고 물속에는 팔뚝만 한 잉어들이 유유히 헤엄다. 누비길은 산에서 내려와 탄천 따라 걸어갈 수 있어 산과 물을 골고루 접할 수 있다.

탄천 코스모스 길

탄천 따라 내려가 물 가운데 놓인 커다란 징검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징검다리 사이 붕어 수십 마리가 빠른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느라 지느러미를 팔랑이는 것이 보다.

동막천 돌 징검다리 길

숲길 산 아래 비탈면은 나무에서 떨어진 잎사귀로 흙이 보이지 않을 만큼 수북다. 한밤중에 낙엽 덮고 잠들어도 춥지 않을 정도로 푹신하다. 멧돼지나 고라니 같은 큰 짐승이 몸을 숨기며 잠들기 안성맞춤이다. 기슭으로는 누가 훑고 간 것인지 이리저리 낙엽더미가 패인 곳을 볼 수 있다. 간밤에 멧돼지가 나무뿌리나 도토리를 찾느라 낙엽을 헤집고 다닌 자국이리라.

낙엽 쌓인 형제봉 숲길


눈 덮인 검단산 숲길


사계절 철 따라 색다른 길

봄에는 생강나무 노란 꽃망울이 누비길에서 처음으로 봄소식을 알린다. 그리고 진달래와 개나리가 순서대로 피어나고 완연한 봄기운을 느낄 때 철쭉의 아름다운 자태가 눈부시게 드러난다.

봄 석기봉 철쭉

여름 짙은 녹음이 산에 드리울 때는 쪽동백나무 둥근 잎이 더욱 커지는 것이 반갑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드리운 고봉의 계단에 오를 때 따가운 햇살은 쪽동백 넓은 잎사귀가 그늘을 만들어 준다.

여름 이수봉 쪽동백나무

가을 누비길은 낙엽으로 두터워져 걷는 발걸음 푹신하다. 가을 산행은 울긋불긋 화려한 단풍을 기대하고 오르지만, 수수하게 노랗게 물든 가을 나무도 시선을 빼앗는다.

누비길은 고즈넉한 숲이다. 조용한 숲은 역설적으로 많은 소리를 들려준다. 산에서 부는 바람은 소리도 있다. 낙엽도 가지에서 떨어질 때 소리가 난다. 바람에 나뭇잎이 나부끼면 바람 소린지 잎사귀 비벼대는 소리인지 헷갈다. 소리가 서로 엉켜있지만 조화로워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가을 태봉산 개옻나무

겨울. 눈 내리고 난 순수는 누비길 산행을 경이롭게 한다. 나뭇가지마다 순백의 눈이 덮이고 나무는 백의로 옷을 갈아입는다. 산은 거대한 수묵화로 하얀 여백을 더하여 그림을 완성한다.

겨울 청량산 귀룽나무


나무 사이로 떠나는 구도의 길

누비길은 번잡하지 않다. 여럿이 무리 짓고 가면 즐겁고, 홀로 떠나도 호젓하게 산길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길마다 다양한 나무가 산행하는 사람과 벗하며 자연과 이야기 나눌 기회를 준다. 더구나 피톤치트가 뿜어 나오는 잣나무 숲길을 걷게 되면 몸과 마음의 상처도 치유받는다.

불곡산 잣나무길

전나무의 원산지는 우리나라. 수피에 젓이 흐르는 나무라 하여 젓나무라 부르다가 전나무로 불렸다. 곧게 자라며 수형이 아름다운 전나무가 좌우 도열하여 산객을 맞이하는 길은 언제 지나가도 가슴이 벅찬다.

숲길에서 느릿하게 걸어가노라면 나무 사이에 지저귀는 새들이 많이 있음을 느낀다. 비로소 발걸음을 늦출 때만 들을 수 있는 소리다. 더불어 인생의 걸음걸이도 느릿느릿해져 내가 지나온 길 주변에 있던 사람, 꿈, 좌절, 그리움을 회상할 수 있다. 그러면 내가 앞으로 나갈 길을 가늠해 보는 여유가 생다.

검단산 전나무길

나무로 우거진 숲길 걷는 내내 걷다가 하늘이 열리는 순간이 있다. 그때는 발길이 멈춰진다. 첩첩산중. 지리산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깊고 깊은 산.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러 번 마음속에서 외쳐진다.

영장산 정상 아래 무명산이 안개 너머 보인다.


누비길을 걷고 난 후 숲길을 걸어도 이름 모를 나무가 우거졌다고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대신 높다란 상수리나무 아래 층층나무와 쪽동백나무가 나란히 서 있고, 그 뒤로 신갈나무와 졸참나무, 산벚나무가 사이좋게 가지를 맞닿아 자라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걷는 만큼 숲은 풍요로워졌고 아는 만큼 살아가는 터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길에서 내려온 후 누비길의 감동은 도저히 나 혼자 간직할 수 없었다. 누비길을 걷고 나면 어쩌면 숲길에 대한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어 우리 산하 곳곳으로 배낭을 메고 자연과 접하려 할 것이다. 그럴 여유가 없더라면 근교 한갓진 숲길을 걸으며 자연과 대화를 나누고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연과 말동무하는 사이 마음속에 숨겨진 상처를 보듬 치유 수 있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
-마르셀 푸르스트-




그 후 성남누비길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서 추천하는 여행하기 좋은 걷기 여행길로 선정되었으며 많은 사람이 찾는 길이 되었다.



[걷기 여행길 선정 자료]


[신문보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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