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길

by 이광

내 마음에는 아직도 어릴 적 걸었던 시골길이 핏줄처럼 뻗어 있다. 중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난희를 버스정류장에서 우연히 만나 그 시골길을 함께 걸었다. 초등학교 때 줄곧 긴 머리였던 난희는 이제 중학생이 되어 세련된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산들바람이 불어서 인지 걸을 때마다 난희의 단발머리가 유난히 찰랑거렸다. 초등학교 때도 옷 잘 입던 난희는 흰 바지에 연한 하늘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한 달만에 만난 우리는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무슨 일인지 나는 길 왼쪽으로, 난희는 길 오른쪽으로,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시골길을 걸었다.


난희는 같은 동네 딸 부잣집 화련이와 늘 붙어 다녔다. 화련이는 아들을 선호하던 딸 부잣집 막내답게 사내아이 같은 구석이 있어서 같은 반 남자애들을 쥐락펴락하고 다녔다. 그래서 반 남자아이들은 예쁘고 마음씨 고운 난희랑 놀고 싶어도 화련이 때문에 먼 발취에서 떨어져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괄괄한 딸 부잣집 화련이는 보이지 않고 혼자 있는 난희를 만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나는 난희에게 중학교 생활이 어떠냐고 물었다. 난희는 아직은 낯설지만 재미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난희는 내게 물었다.

“너는?”

나는 대답했다.

“나도 좋아.”

그 말을 하고 난 뒤로 왠지 모르게 내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난희를 좋아하고 있다고 고백이나 한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얼굴이 달아올라 혹시 난희가 내 얼굴을 쳐다보면 어쩌나 걱정하며 난희 있는 쪽으로 슬쩍 얼굴을 돌렸다. 난희는 내가 있는 쪽을 보지 않고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렇게 난희와 나는 말없이 한참을 걸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쉬지 않고 난희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6학년 담임 선생님 이야기, 점심시간에 함께 앉아 도시락 먹던 이야기, 둘이서 방과 후에 남아 환경 미화하던 이야기. 그러면서 내 얼굴에는 미소를 한가득 머금고 있어서 금방이라도 웃음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이쯤 해서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하지 않냐고 스스로 재촉했다. 나 혼자 속으로 난희에게 말하는 것도 충분히 행복했지만 이대로 간다면 난희와 나 사이는 더욱 어색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머릿속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 “너 누구 좋아해?”였다.

나는 그 순간 나 자신이 바보가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가, 가수 말이야. 가수 누구 좋아해?”

이렇게 재빨리 다시 고쳐 말하고 난희를 쳐다봤는데 그때 난희도 나에게 얼굴을 돌리려는 참이어서 서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나는 아버지께서 하지 말라고 하셨던 어떤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너무 놀라 재빨리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이상하게도 내 심장소리가 점점 커져서 듣자고 생각하면 난희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내 얼굴을 난희 쪽으로 조심스럽게 돌렸을 때 난희가 왼손을 왼쪽 볼에 대고 얼굴을 숙인 채로 걷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는 난희 집에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초등학생 세 명이 자전거를 타고 우리를 지나가면서 난데없이 “알나리깔나리”를 남발하는 바람에 우리는 더욱 화끈거리는 얼굴을 숨기느라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요즘 초등학생들은 한심 하기 짝이 없고 가끔은 정말 못 말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 없는 초등학생들이 던지고 간 ‘얼나리깔나리’ 때문에 우리는 난희 집에 다다를 때까지 얼굴만 붉힌 채 침묵 속에서 걸어야 했다.


난희가 집에 들어가려 할 때 나는 잘 가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오른손을 들어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난희도 잘 갈라고 말하면서 손을 들어 흔들어 주었다. 난희 집 대문이 닫히자 나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난희 집이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러서 달리기를 멈추고 숨을 헉헉거렸다. 내가 왜 달린 건지 도대체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어서 오늘 좀 망가진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집으로 걸으며 조금 전 난희와 함께 걸었던 순간을 되돌려 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알나리깔나리’를 들었던 순간이 떠올라 또다시 얼굴이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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