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책장(冊欌)에서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발견하고 기억을 더듬어 책장(冊張)을 다시 넘기며 훑어보았다. 이 책에서 느리게 산다는 것은 단순히 동작의 느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서두르지 말고 매 순간을 온전히 즐기라는 의미이다. 현대인들의 삶은 뭐든지 빨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두 가지 예를 생각해 보았다. 그 하나는 차를 마시는 것이고, 두 번째는 등산이다. 차를 마실 때는 먼저 마음을 느긋하게 하고 차를 눈으로 마신다. 그런 다음 코로 향기를 맡고, 마지막으로 입으로 음미해야 비로소 우리는 차를 온전히 즐겼다고 말할 수 있다. 차를 단숨에 들이켠다면 제대로 차 맛을 음미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뭐든지 빨리만 하려 한다면 귀중한 시간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 채로 흘려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또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왔는데 아무것도 느낀 바가 없다면, 등산을 제대로 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삶을 대면하기 위해 산에 오른다고 생각한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산을 오르내리는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산을 오르면서 한 포기 풀과 한 그루 나무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것과 결국 내려오기 위해 땀을 흘리며 올라가는 여정 속에서 내가 잘 살아가고 있는지, 또 앞으로 어떻게 해야 더 의미 있게 살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묻고 답을 찾는 것을 포함한다.
읽던 책을 내려놓고 걷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바람이 조금 세다 싶을 정도로 불었다. 이런 날씨라면 한 시간을 걸어도 땀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은 천천히 걷기로 했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읽어서 그런지 오늘은 한 템포 느리게 걷고 싶었다. 걷는 순간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 내리막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천천히 걷다 보니 평소에 지나가면서 보지 못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느림’이 ‘온전함’에 이르게 한다는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이 조금씩 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내게 오는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고 싶다는 듯이.
그렇게 기분 좋게 느림을 만끽하고 있을 때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른 지방은 한 주 내내 비 소식이 있었지만, 이곳은 비가 비껴가는 것처럼 한 번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바람이 다른 때보다 세게 불고 있어서 혹시 비가 내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지금 올 줄은 몰랐다. 밖이라서 비가 오면 맞는 것이지 다른 방법이 없었다. 대기오염 때문에 비 맞는 것도 꺼림칙하지만, 그렇다고 비를 피해 어딘가로 들어가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비가 언제 그칠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되는 걱정일랑 날려버리고 비를 맞으며 집을 향해 걷기로 했다. 처음에 뛸까 생각도 해봤지만 뛴다고 해서 비를 안 맞는 것도 아니라서 그럴 바엔 차라리 느긋하게 빗속을 걷는 기분이라도 되살리고 싶어졌다.
어렸을 때는 종종 비 맞는 일이 있었다. 밖에서 뛰어놀다가 비가 내리면 그냥 비를 맞으며 놀았다. 빗속에서 뛰어노는 것도 마른날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재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에 흠뻑 젖으면서도 놀이를 멈추지 않았던 것은 지금은 없고 그때는 있었던 순수함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비를 맞을 생각으로 천천히 걷다 보니, 온몸으로 비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느릿한 걸음으로 빗속을 걸어갈 때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타인의 시선으로 인해 내 마음이 산만해지는 순간, 비를 맞으며 느리게 걷는 의미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 의미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기보다는 지금 빗방울이 내 피부에 닿는 순간순간의 감촉을 온전히 느끼는 데 집중해야 한다. 옷을 비에 젖게 한 대가로 이름 모를 환희를 느낄 수 있다면 나는 언제든지 빗속을 느리게 걷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느리게 산다는 것이 단지 게으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지금, 그리고 이곳에서 선물처럼 주어진 자신의 삶을 온전히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마음속 깊은 곳부터 서서히 차오르는 충만함으로 우리의 삶은 더욱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