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 좋은 날>

'마약'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

by 흐르는 강물처럼

<손석희의 질문들 3>에서 배우 이영애 씨를 봤다. 화를 내도, 얼굴이나 몸짓을 보지 않으면 화가 났다고 생각하기 힘들 것 같은 잔잔하게 흐르는 시냇물 같은 목소리가 여전해서 놀랐고, 세월의 흔적이 눈가와 입술 주변에서 풋풋하게 드러난 채 보톡스를 맞지 않아 자연스럽게 세월의 흔적이 배여 한층 더 아름다워진 모습에 한 번 더 놀랐다. 고등학교 시절 길거리에서 방송국 관계자의 눈에 띄어 광고 속 등장인물로 텔레비전에 처음 나타난 그녀는 이제 30년 넘게 연기를 갈고닦고 있는 배우가 되어 있었다. 사춘기 시절 처음 접한 이영애 씨는 내 머릿속에 청순하면서도 예쁜 얼굴을 가진 배우였지만, 40대 중반에 다시 만난 그녀가 손석희 씨와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저 얼굴만 예쁜 배우가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을 잘하기 위해 진지하게 생각하며 노력해 온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첫인상으로 누군가를 판단하면 큰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첫인상이 남긴 선입견과 편견은 쉽게 떨쳐지지가 않는다. 결혼 후 십 년 넘게 가정을 꾸리고 가꾸는 데 집중했던 이영애 씨가 다시 배우로서 돌아왔다. 그렇게 시작한 첫 번째 작품이 <은수 좋은 날>이다. 20대 초반부터 사회적 문제를 다룬 연극에 등장하여 다양한 비평과 비난을 이끌어냈던 그녀는 배우가 연기로 사회를 향해 할 수 있는 말이 지닌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광고했던 한 신용카드가 신용불량자 1,000만 명을 양산하는 데 일조했음을 여전히 잊지 않고 있었다. <은수 좋은 날>이란 연속극도 현재 한국 사회에 큰 문제로 자리 잡은 마약이란 요물을 다루고 있다는 소개 말을 듣고 시청했다.



벼랑 끝에 서면

이영애 씨가 주인공 역을 맡아 연기한 연속극 <은수 좋은 날>의 주인공 강은수는 외면과 내면이 모두 고운 동네 아주머니다. 대학교 졸업장이 없기 때문에 은수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주로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몸을 굴리는 일이다. 은행에 계약직으로 입사해 정규 직원이 되기 위해 노력도 했지만 함께 계약직으로 입사한 친구가 정규 직원이 되기 위해 은행 간부에게 바친 육탄공세에 밀려 계약 기간 만료 후 은행을 떠나야 했다. 다행히도 그곳에서 남편 박도진(배수빈 분)을 만나 결혼하여 딸 수아(김시아 분)를 낳아 나름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가꾸며 살아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은수는 법원에서 날아온 강제 재산 차압고지서를 받아 읽는다. 남편이 재산의 전부인 집을 담보로 대출한 돈을 전자화폐에 투자했다가 모든 걸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후 남편이 췌장암 말기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찾아다닌 은수는 남편이 퇴직금도 일찌감치 다 받아 전자화폐에 투자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남편의 췌장암을 치료하고, 압류 위기에 놓인 집을 구하고, 그림에 소질을 보이며 화가가 될 꿈을 키우는 딸 수아를 지원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돈이었다. 하지만 그 돈은 은수의 손에는 없었다. 급기야 이 모든 상황을 자기 탓이라 여긴 남편은 병원 옥상에서 떨어져 죽겠다며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은수는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가장이었다.

이 세상에 신이란 존재는 과연 존재하는 걸까? 지금 은수에게는 이런 질문도 사치처럼 여겨진다. 그럼에도 살아야 하고 이를 헤쳐 나가야만 한다는 은수의 다짐은 어릴 때 집을 떠난 엄마, 그 후 일찍 돌아가신 아빠, 그로 인해 홀로 살아낸 세월이 은수의 마음에 새긴 탄탄한 마음 근육에서 비롯되었다. 이 또한 지나갈 거고, 그 순간까지는 반드시 버텨야만 한다고 은수는 다짐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버텨 내려면 그럴 수 있는 기반이 있어야 하는데, 은수에게는 기댈 수 있는 대상도 없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지푸라기

그때 하늘에서 가방이 하나 은수의 집안으로 떨어졌다. 특수 제작된 신종 마약을 약속 장소까지 배달하던 마약 조직원은 자신을 쫓아오는 경찰을 피해 어느 한 가정집에 잠입해 옷가지가 담긴 상자 속에 수백억 원에 달하는 마약이 든 가방을 숨겼다. 병원에 입원한 남편이 필요로 할 몇 가지 용품을 담을 수 있는 가방을 찾던 중 은수는 처음 보는 가방을 하나 발견했고, 거실로 가지고 나와 그 속에 든 걸 확인하려 지퍼를 열다 깜짝 놀랐다. 그 순간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가방 안에 담긴 박하사탕 모양의 하얀색 물체가 실종된 신종 마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순간에 현금으로 환원했을 때 수백억 원에 달한다는 마약을 말없이 놀란 토끼 눈으로 바라보던 은수는 이를 기회로 삼기로 결심한다. 마약 판매업에 뛰어들어 범죄자가 될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은수는 완치까지 필요한 남편의 치료비와 딸아이 그림 그리기 지원비로 딱 2억을 벌 때까지만 이 일을 하겠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마약은 일시적으로 극단적 쾌감을 인간에게 안겨주는 물질로서 그 유래와 사용 방법은 선사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교 혹은 공동 제의를 위해 필요한 물질이 보통 마약과 유사한 기능을 했는데, 탈아, 곧 자아를 벗어나는 경험을 얻기 위해 인간은 이런 특수 물질을 사용해 왔다. 현재 우리의 내외적 모습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한 인간이 살아내야 할 삶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수많은 갈등 중에서 상상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되고 싶은 자기와 현실 속에서 끝없이 마주 해야 하는 지금의 나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이겨낼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마약은 이 둘 사이의 갈등을 일시적으로나마 확실하게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준다. 사회적 관계망이 우리 삶을 상당 부분 지배하는 이 시대에 24시간 다른 이의 삶을 훔쳐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건 그 어느 때보다 되고 싶은 나와 그렇지 못한 나 사이의 갈등이 고조된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다른 수많은 이유 역시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시대적 맥락이 마약 유통과 확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난 생각한다.


‘탈아’ 현상을 마약을 통해 경험하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게 한 가지 있다. 마약 물질은 인간의 뇌 신경체계를 교란시키고, 결국에는 완전히 파괴한다. 쾌감을 유발하는 다양한 신경전달물질을 만드는 방법을 뇌는 수천 년의 진화를 통해 개발했다. 하지만 마약 물질이 몸에 유입되어 뇌로 들어가면 바로 이 신경전달물질이 신경 세포 간에 주고받을 수 있는 상호작용이 일시적으로 정지한다. 생물학적으로 뇌가 한순간에 만들어낼 수 있는 쾌감 유발 신경전달물질의 수십 배에 달하는 인공 신경전달물질이 마약 물질을 통해 과다 유입되어 뇌는 정상적 기능이 일시적으로 정지한다. 이 순간 인간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극단적 쾌감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 그 맛은 태어나 처음 맛본 금단의 열매이기에 이 세상에서 경험한 그 어떤 것보다도 달고 상큼하며 그 순간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 그 순간을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갈망은 대부분의 경우에 ‘한 번만 더’로 이어진다.


한 번만 더가 다시 딱 한 번만 더로, 딱 한 번만 더가 이번에는 진짜 딱 한 번만 더로 이어지면 뇌 신경전달체계는 외부에서 강제로 주어지는 마약 물질에 담긴 인공 신경전달물질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생명을 계속해서 유지하길 원한다. 항상성이란 생명체가 살아 있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몸의 구석구석을 안정감 있게 유지하려는 첫 번째 생명 원칙을 일컫는 말이다. 항상성이 잘 유지될 때만 우리는 식욕과 성욕을 넘어선 새로운 욕망을 꿈꿀 수 있다. 마약 물질이 지속적으로 신체에 유입되면 이 항상성이 깨진다. 몸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신경전달물질보다 훨씬 많은 양이 몸속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면, 몸은 깨진 항상성을 복원하기 위해 외부에서 유입된 인공 신경전달물질을 몸의 일부분으로 인식하여 자체 생산량을 줄인다. 내성이라고 불리는 마약 중독으로 가는 첫 번째 지름길은 이렇게 수천 년간 진화하여 발전해 온 인간 뇌의 정상적 기능을 비정상적으로 만드는 데서 닦이기 시작한다.

강제로 몸에 집어넣은 마약 물질을 우리 몸은 결국 분해하여 대소변으로 내보낸다. 이 또한 항상성을 위해서다. 문제는 마약 물질에 대해 내성이 생긴 신체는 체내 마약 물질이 모두 사라진 후에 이와 유사한 자연산 신경전달물질 자체 생산량을 정상치로 곧바로 돌리지 못한다. 외부에서 강제로 주입된 신경전달물질을 감당할 수 있는 새로운 항상성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신진대사를 계속할 연료가 떨어지면 신체 기관은 뇌에게 배고프다는 신호를 보내고, 뇌는 이를 인지하여 음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마약 물질을 음식으로 생각해 볼 때, 갑자기 일시적으로 폭증한 신경전달물질은 동일한 방식으로 급감한다. 신체 기관은 긴급 상황을 뇌에게 알리고 뇌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금단 증상을 유발하여 필요한 신경전달물질이 다시 몸속으로 강제 주입되길 강요한다. 이 상태가 몸에서 습관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면 이제 중독 현상은 다른 이가 아닌 내 몸속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때다.



지푸라기는 결코 혼자 들 수 없다

수백억 원에 해당하는 마약이 든 가방을 양손에 들었지만 은수는 이를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제임스(이경, 김영광 분)라는 마약 중개업자와 손을 잡았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 집 마약 파티에 갔다가 마약 과다 복용으로 죽은 아이의 살해자로 지목되어 교도소에서 저지른 적 없는 죄값을 치러야 했다. 복역 후 그가 마음에 담은 단 한 가지 목적은 자신에게 살해 누명을 뒤집어씌운 녀석에게 복수하는 일이었다. 대기업 회사 차기 사장으로 부상 중인 친구를 따라잡기 위해 이경은 밤에는 제임스라는 마약 중개업자로 일하고, 낮에는 고등학교 방과 후 교실에서 그림 그리기를 가르치는 미술 선생님으로 산다. 은수의 딸 수아가 무척 좋아해서 잘 따르며 열심히 그림을 배우는 선생님이 이경이었고, 은수가 마약 판매업을 위해 손잡은 이는 제임스였다. 은수가 손을 맞잡은 이는 제임스 이외에도 한 명 더 있었다. 마약 단속반 장태구(박영우) 형사는 이혼으로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기 위해 마약상 뒤를 봐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이 세 사람을 하나로 엮어 준 건 마약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을 하나로 엮은 건 마약이 아닌 마약에 잠재한 현금이었다.


양심의 갈등을 느끼며 안절부절못하는 은수에게 제임스가 말했다. “난 단 한 번도 이들을 강요한 적이 없어요. 다들 못 사서 안달이 나 있잖아요. 난 이들을 돕는 거라고요.” 자본주의 시장은 공급과 수요의 원칙으로 돌아간다. 마약 시장은 언제나 수요가 공급을 압도한다. 마약 가격이 내려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게다가 마약은 아무 데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마치 고가로 몇백 개만 생산하여 한정 판매하는 유명 디자이너의 이름을 상품화한 제품처럼 희소성이 있는 물건인데, 구입 후 오랫동안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사용하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는 일회용품이다. 가격이 비싸면 자연스레 고급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마약은 상류 사회에서 간간히 즐기는 고급 오락거리처럼 인식되었고, 희소성과 고급성에 대한 갈망을 묘하게 자극하기에 이제 모두가 한 번씩은 꼭 경험해 보고 싶은 특별한 물건으로 탈바꿈했다.


<은수 좋은 날>은 마약 속에 우리가 넣어 밀봉한 희소성과 고급성 이외에 한 가지 더 위험한 요소가 숨어 있다고 지적한다. 그건 비밀성과 익명성이다. 누구도 알지 못할 거라는 비밀성과 익명성은 구상부터 실천까지 두근거림과 짜릿함을 건넨다. 그런데 우리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비밀성과 익명성 뒤편에는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가족이, 우리의 친구가 희생양이 되어 마약이 우리를 안내하는 도살 장소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2025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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