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우먼이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 그런 거 없다고?
전통 사회에서 옳고 그름의 기본적 척도로서 기능했던 종교는 지구촌 현상과 함께 다문화, 다종교의 공존 현상을 불러왔다. 절대적 가치에서 상대적 가치로 전락한 종교는 상대화와 다원화를 통해 더는 인간에게 실존적 삶이 부딪히는 질문에 관해 명확하게 답변할 수 없게 되었다. 19세기 이전까지 종교가 담당했던 기능을 대중문화는 빠르게 습득했고 자본주의 논리에 적응을 마친 후 대중의 의견, 곧 촉각에 기반한 자극에 반응하여 한 집단이 동시에 느끼는 쾌감을 삶에 있어서 따라야 할 절대적 기준으로 만들었다. 부모는 어떻게 자녀를 키워야 하는지, 아이들은 어떻게 부모를 따라야 하고 다른 친구들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며 자라나야 하는지, 직장 생활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이상적인 배우자는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어떻게 늙어가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이제 우리는 끝없이 변하고 무수하게 쏟아져 나오는 만화, 노래, 영화, 시간 때우기 놀이판 영상에서 배워야 한다. 원더우먼Wonder Woman 1984 역시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기 위한 교훈을 환상 속에 담아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영화의 첫 장면은 다이애나Diana가 어렸을 때 참여했던 장애물 달리기 같은 운동 경기 실황 중계다. 1등으로 앞서가던 다이애나는 한순간 방심하여 말에서 떨어졌다. 자기를 버려두고 앞서 달려가는 말을 말없이 바라보던 다이애나의 눈이 갑자기 반짝거렸다. 말을 타고 달려가야 할 한 구간을 건너뛰고 다시 앞서갈 수 있는 지름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이애나는 지름길을 택했고, 다시 말 위에 뛰어올라 결승점까지 1등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심판관은 다이애나를 막아섰다.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을 어겼기에 1등을 따낼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흐느끼는 다이애나를 버려둔 채 돌아섰다. 원리와 원칙, 규칙의 중요성을 시청자는 다시 한번 의식 혹은 무의식에 새기게 된다.
두 번째 교훈은 바람을 현실로 옮겨주는 신기한 원석 꿈의 돌Dreamstone을 둘러싼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 워싱턴 D. C.에 있는 스미소니언 박물관Smithsonian Institution에 새로 합류한 지질학자이자 신비(미지) 생물학자인 바바라Barbara는 부임한 날 연방수사국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 (FBI)으로부터 얼마 전 도둑맞았다가 다시 찾은 고대 유물의 출처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숫기가 없고 말수가 적은 바바라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게 어렵다. 다른 이로부터 사랑받으며 살고 싶지만 그게 그리 말처럼 잘 되지 않는다.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다이애나를 만나 함께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 후 바바라는 다이애나를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당당하고, 힘차고, 상냥하고, 날씬하면서도 아름다운 다이애나처럼만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바람을 품었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자기가 그런 바람을 혼잣말로 내뱉었을 때, 양손에 꿈의 돌이 쥐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누군가 꿈의 돌에 접촉한 채 바람을 말하면 그 바람이 현실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몰랐다. 다음날부터 바바라는 자기도 모르게 다이애나처럼 당당하고, 당돌하고, 상냥하고 힘찬 여자가 되기 시작했다. 다이애나도 바바라가 확인 작업 중이던 꿈의 돌을 손에 들었을 때, 사랑했지만 죽음으로 이별한 옛 남자 친구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물론 그 바람이 다음날 곧바로 현실이 될 거라는 건 상상하지 않았다. 꿈의 돌의 실체를 아는 한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다이애나와 바바라는 몰랐다. 유명한 연예인으로 대중에게 다가갔지만, 운영하던 회사가 부도 직전에 이른 맥스Max에게 유일한 희망은 꿈의 돌을 손에 넣어 자기가 꿈의 돌 화신이 되는 일이었다. 다이애나의 바람이 현실이 되었다. 바바라의 바람도 현실이 되었다. 맥스의 바람도 현실이 되었다. 꿈의 돌 화신이 된 맥스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의 바람을 현실로 옮겨주는 일을 감행했고, 한 순간 전 세계는 아비규환(阿鼻叫喚)으로 변했다. 원리, 원칙, 규칙을 무너뜨리는 주범이 인간의 끝없는 욕망임을 영화는 일관성 있게 시청자에게 전한다.
세 번째 교훈은 욕망을 버렸을 때만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단순하지만 실천하기 힘든 일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다스Midas 왕이 생각났다. 가질만한 게 더 없는 그는 거기에서도 만족하지 못했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Dionysus을 찾아가 손으로 만지는 모든 걸 황금으로 변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간청했다. 술에 취한 디오니소스는 미다스 왕의 바람을 현실로 옮겨주었다. 그 순간부터 미다스 왕은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만 했다. 만지는 모든 게 황금으로 변했기에 생존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물질인 음식을 먹을 수 없었고, 사랑하는 딸아이도 잃어버렸다. 안아주려 했는데, 그만 황금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를 다시 찾아간 미다스 왕은 다시 간청하여 뒤틀린 자기 삶을 원상태로 되돌릴 수 있었다. 욕망을 내려놓았을 때, 뒤틀린 삶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네 번째 교훈은 다이애나의 희생정신이다. 사랑했던 여인 스티브Steve가 자기에게 다시 돌아왔지만 세상을 위해서, '지구촌' 식구를 위해서 다이애나는 스티브를 포기했다. 자기가 그렇게도 바랐던 바를 그보다 더 크고 소중한 '의미'를 위해서 희생했다. 다이애나가 스티브를 포기했을 때, 그녀는 옛날 전설의 전사가 남기고 간 갑옷을 꺼내 입을 수 있었다. 그 전설적 전사는 다이애나가 속한 민족을 구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했다. 희생을 감내한 다이애나가 전설적 전사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희생정신만이 인간을 전설적 용사로 만든다고 영화는 넌지시 제안한다.
마지막 교훈은 '관계'의 소중함이다. 꿈의 돌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바람을 가진 사람의 몸이 돌과 접촉해야 했다. 꿈의 돌 화신으로 변한 맥스는 직접 사람을 찾아가 손을 맞잡고 접촉했다. 다른 누군가와 접촉해야만 우리 바람도 현실로 옮겨질 수 있다. 인간 삶이 있는 곳에는 관계가 있고, 관계의 시작은 접촉이다. 다이애나가 지구촌 식구를 구할 수 있었던 방법도 맥스와의 접촉이었다는 사실은 제법 의미심장했다.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게 접촉이고 관계다.
교훈은 아니지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건 원더우먼 다이애나는 파괴보다는 보호를, 공격보다는 수비를, 내침보다는 포용을 통해 사람을 변화시키는 '모성애'를 무기로 사용하는 개인적으로 만나본 적 없는 영웅이라는 점이다. 적을 무찔러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먼저 설득하고, 설득할 수 없다면 분노를 표출할 수 기회를 마련해주며 기다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스스로 깨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어 교화하는 게 다이애나가 하는 일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래서 나지막한 웃음을 자아낸다. 슈퍼맨처럼 하늘을 나는 방법을 터득한 다이애나는 스티브와 함께 구름 위를 나른 순간을 회상하며 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 저 아래에서 들려오는 경찰차 출동 소리를 듣는다. 원리, 원칙, 규칙은 인간 사회의 존속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견고하게 유지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원더우먼 다이애나가 있다. 나도 언젠가 원더우먼을 한 번 만날 수 있을까?
사실 난 원더우먼과 함께 산지 14년이 지났다. 내 원더우먼은 내 아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