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마지막 호랑이
지리산에 살았던 사냥꾼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다. 지리산에 살았던 조선 마지막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다. 지리산에 살았던 조선 마지막 호랑이와 사냥꾼에 대한 이야기, 곧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야기다. 음, 그것도 아니라면 조선 마지막 호랑이를 잡으려는 일본 장교와 일본의 압제에 끝까지 저항했던 지리산에 살았던 한 사냥꾼과 그의 삶에 기구하게 얽혀 있던 조선 마지막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에서 다중적 의미를 지닌 영화는 종종 흥행에 실패한다. <기생충 (2019)>과 <미나리 (2020)>처럼 해외에서 호평을 받아 한국에서 흥행한 영화를 보러 가는 한국인 관객은 마음을 제대로 단속한 후 극장에 들어간다. '외국 사람, 그것도 미국 사람이 호평을 했다고 하니 틀림없이 '대단한' 영화일 테니 정신 바짝 차리고 봐야지.'라고 생각할 테다. 영화 <대호>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기생충>과 <미나리>를 대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호랑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지만 결코 호랑이에 관한 영화가 아닌 영화가 <대호>다.
한국인은 호랑이를 '산군(山君)'이라 불렀다. 인간 사회에 있어서 대장이 임금이라면 자연에 있어서 대장은 호랑이라고 생각했기에 동물인 호랑이에게 임금에게만 사용하는 칭호를 붙여줬다. 덕과 힘을 가진 영물이라 여겨진 호랑이를 한국인은 예부터 경외시 했다. 옛날에 밤늦게까지 잠들지 않고 칭얼거리는 아이에게 엄마는 자꾸 밤늦게 울면 호랑이가 와서 잡아간다고 겁을 줬다.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속담. 호랑이를 흔히 볼 수 있는 환경에서만 가능한 말이다. 시베리아 호랑이는 한반도까지 내려왔고 한반도 호랑이는 시베리아 호랑이보다 더 크고 웅장했단다. 직선도로를 찾아보기 힘든 한반도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 깊은 산속을 열심히 달렸을 호랑이를 상상해보고, 이로 인해 시베리아에 사는 호랑이보다 더 단단한 체격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추측도 해본다.
1907년 조선 군대를 해산한 일본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제정하여 조선인이 총기를 소지할 수 없게 했다. 1913년 총독부는 호랑이처럼 해로운 짐승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조선인에게는 총포류를 빌려줄 수 있는 지침을 마련했다.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란 책을 쓴 엔도 기미오는 한반도에서 호랑이가 사라진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1897년부터 1926년에 걸쳐 일본인은 신식 연발총을 들고 밀어닥쳐 (한반도에서) 호랑이를 멸종시켰다." 공식 기록을 찾아봐도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호랑이를 마지막으로 한반도에서 호랑이 씨는 바싹 말라버렸다. 호랑이를 산신으로 숭배해 온 조선인의 민족정기를 꺽으려는 의도와 고가로 거래되던 호피를 가능한 한 많이 만들기 위한 의도가 합쳐진 결과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알고 있어야지만 왜 지리산 깊은 산골짜기에 영험하게 살아있는 호랑이에 일본 간부 마에조노와 그의 조선인 부하 류는 이리도 애달프게 집착하는지를 알 수 있다. 지리산 자락에 사는 사람에게 지리산 호랑이는 동물 한 마리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지리산 호랑이는 일제도 건드릴 수 없는 민족의 정기이자 혼, 민족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지리산에 호랑이 일가족이 있었다면, 지리산 자락에는 호랑이 전문 사냥꾼 천만식(최민식)이 있었다. 인간과 자연 사이를 오갈 수 있는 문지방에 해당하는 지역에 집을 짓고 사는 만식은 '순리', 곧 자연의 흐름을 따른 삶을 바른 삶이라 믿으며 살았다. 아들 석이에게 가르친 삶을 대하는 자세는 그의 한 마디에 모두 담겨 있다. "올무에는 눈깔이 없다. 잡을 것만 잡는 게 산에 대한 예의여." 그랬기에 그는 젊은 시절 어미 호랑이를 잡은 후 그 옆에 딸려 있는 새끼 호랑이 두 마리를 살려주었고, 먹거리를 가져다주었다. 새끼 호랑이 두 마리는 건강하게 자라났고 일본 간부 마에조노가 애달프게 가지고 싶은 호피의 원형이 되었다.
만식은 지리산 호랑이의 엄마를 빼앗았고, 엄마를 빼앗긴 호랑이가 어른이 될 수 있게 옆에서 돌봤다. 그렇게 어른이 된 호랑이를 잡으려 했던 만식은 아내를 호랑이로 오해하여 방아쇠를 당겼고, 아내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만식의 아들 석이는 호랑이를 잡으려다 호랑이에게 공격을 당해 죽었고, 호랑이는 시체가 된 석이를 만식에게 데려다주었다. 나쁜 호랑이? 멍청한 만식이? 우리네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 오늘의 적은 내일이면 친구? 삶은 이렇게 쉽게 이등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삶은 이율배반이다. 순리를 따름은 운명론에 대한 의지일까?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에게 자유란 주어질 수 있을까? 만식과 지리산 호랑이의 관계를 따라가면 이리도 복잡다다한 질문을 나도 모르게 나에게 묻게 된다. 삶 그 자체가 어쩌면 영험한 대상이다. 지리산 호랑이는 어쩌면 우리네 삶 그 자체일 수도 있겠다. 그제서야 마지막 장면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만식과 호랑이는 지리산 꼭대기에서 함께 하나가 되어 땅으로 떨어진다. 자살이다. 하지만, 자살 같지 않는 자살이다. 호피를 얻기 위해 산꼭대기까지 기어 올라오는 일본군에게 털 하나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처절한 저항의식이 담긴 자살이기 때문이다. 만식 역을 맡은 영화배우 최민식은 "단순한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호랑이가 아니라, 대자연과 더불어 호랑이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그 시대의 정신적 상징성에 매료돼 출연을 결심했다."라고 말했다. 영화 <대호>는 줄거리를 따라 보고 감상하고 잊어버릴 만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 곳곳에 숨겨진 호랑이와 인간, 자연과 인간, 일제와 조선, 독재와 자유, 압제와 저항, 야심과 민심. 다양한 이분법적 구도에 녹아든 상징 기법을 상상하며 봐야지만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영화다. 무엇을 느껴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상징'이라고 말하고 싶다.
2021년 4월 4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