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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 강물처럼 Apr 05. 2021

새로운 세상 꿈꾸기 (이사야15장)

이사야 15장에서 엿보다

Will Bullas, Peaceful Kingdom

"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룻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룻밤에 모압 기르가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 그들은 바잇과 디본 산당에 올라가서 울며 모압은 느보와 메드바를 위하여 통곡하는도다. 그들이 각각 머리카락을 밀고 각각 수염을 깎았으며, 거리에서는 굵은 베로 몸을 동였으며, 지붕과 넓은 곳에서는 각기 애통하여 심히 울며 헤스본과 엘르알레는 부르짖으며, 그들의 소리는 야하스까지 들리니 그러므로 모압의 군사들이 크게 부르짖으며 그들의 혼이 속에서 떠는도다.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 그 피난민들은 소알과 에글랏 슬리시야까지 이르고 울며 루힛 비탈길로 올라가며 호로나임 길에서 패망을 울부짖으니, 니므림 물이 마르고 풀이 시들었으며 연한 풀이 말라 청청한 것이 없음이로다. 그러므로 그들이 얻은 재물과 쌓았던 것을 가지고 버드나무 시내를 건너리니, 이는 곡성이 모압 사방에 둘렸고, 슬피 부르짖음이 에글라임에 이르며 부르짖음이 브엘엘림에 미치며, 디몬 물에는 피가 가득함이로다. 그럴지라도 내가 디몬에 재앙을 더 내리되 모압에 도피한 자와 그 땅에 남은 자에게 사자를 보내리라. (이사야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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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시작한 심리학과 종교 분과 박사 학위 과정을 공부할 때, 2년간의 교과 과정을 마친 후 4가지 종합시험을 준비하면서 전 박사 학위 논문 주제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사람은 대부분 한국에 관한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쓰는 게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전 한국과 관련 없는 주제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그때 즈음에 본 기록영화 <쿼바디스 Quo vadis>는 그런 제 마음이 실은 눈앞에 놓인 현실로부터 도망치려는 제 비겁함 때문이었음을 알게 해줬습니다. 쿼바디스는 "어디로 가십니까?"를 뜻하는 라틴어입니다. 원래 베드로가 예수님께 한 질문인데, 영화감독 마빈 르로이는 폴란드 소설가 헨리크 센키에비차가 쓴 제목이 <쿼바디스>란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 1951년에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이 영화는 세계 곳곳에서 흥행했고 이로 인해 '쿼바디스'란 말은 우리에게 제법 친숙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제가 본 <쿼바디스>란 영화는 방금 설명한 외국영화가 아니고 한국 기록영화 감독 김재환 씨가 만들어 2014년에 잠깐 동안만 극장가에서 상영할 수 있었던 기록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한국 기독교가 거세게 반대했기 때문에 극장가에서 잠깐 동안만 상영할 수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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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문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로마로 가서 제도가 되었고, 유럽으로 가서는 문화가 되었다. 미국으로 가서는 기업이 되었고, 마침내 한국에 와서는 대기업이 되었다." 김재환 감독은 차분하게 한국 대형 교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암세포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하나하나 찾아내 보여줍니다. 한국 교회의 대형화는 세상과의 타협을 암암리에 수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기업화, 곧 사람보다는 돈을 우선시하여 더 많은 헌금을 위해 더 많은 교인 확보에만 고군분투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이와의 관계 형성과 이윤을 만들어 줄 고객 확보, 삶의 애환 나눔와 이윤 추구 사이에서 좌충우돌해야 했고, 결국 교회는 자가당착의 오류에 빠질 수 밖에 없음을 냉철하게 보여줍니다. 대형 교회는 해가 갈수록 커졌습니다. 하지만, 중형 교회가 대형 교회로 변해 갈때, 작은 교회는 점점 더 작아져야 했고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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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아침에 함께 묵상한 그리 길지 않은 이사야 15장에 담긴 내용은 예언입니다. 모압이란 나라가 어떻게 멸망할지에 대한 저주로 가득한 예언입니다. 하룻밤 사이에 모압 민족이 사는 나라가 쑥대밭으로 변한답니다. 이로 인해 모압 민족은 남녀 노소 구분없이 거리에 나앉아 굵은 베로 몸을 동여매고 애통하며 심히 울게 되고, 나라가 사라져서 존재 가치를 상실한 군대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방황하고, 들판의 풀과 나라를 관통하며 흐르는 모든 강은 바짝 말라버려, 모압이란 나라가 세워진 땅은 더는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한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15장 이전에 전하는 예언에 따를 때, 모압 민족이 이 끔찍한 재앙을 속절없이 당해야 하는 까닭은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사는 영토에 침입했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신이 믿는 신을 강요하며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에 상처를 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유복한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이제 하나님은 모압 민족에게 엄청난 재앙을 내리기로 결단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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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이런 대목을 읽을 때면 구원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살짝 샘솟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잔인함에 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유복한 미래를 위해 다른 민족을 말살하겠다는 건 어찌 보면 히틀러가 위대한 독일 민족의 영구한 미래를 현실화하기 위해 행했던 유대인 대학살 사건과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을 우리 삶에 복을 내려주시는 특수한 존재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책에는 하나님을 그렇게 묘사하는 부분이 적잖게 있긴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전 성경책에 적혀 있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한 복이 언제나 돈과 명예, 권력을 뜻하지는 않음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깨달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복은 대부분 다른 이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복 받을 때, 다른 이는 고통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많은 이가 경제적으로 힘들다고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그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경제적 호황을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과 딸이 좋은 회사에 지원했을 때 우리는 엄청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들과 딸이 좋은 직장을 얻게 해달라고. 아들과 딸이 좋은 직장을 얻으면 하나님께 감사 헌금을 바치기도 합니다. 도와주셔서 고맙다고. 그런데, 우리 아들과 딸이 좋은 직장을 얻을 때 다른 이의 아들과 딸은 좋은 직장을 얻을 수 기회를 놓쳐야만 합니다. 우리가 축복이라 부리는 건 대부분 다른 이의 고통을 전제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에 점점 더 많은 교인이 생기면 부흥이고 축복이지요? 그런데, 우리 교회의 부흥과 축복은 우리 교회 주변 작은 교회의 몰락과 직결되어 있다는 걸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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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세상을 '조화(調和)롭게' 창조하셨습니다. 서두르지 않으셨고, 차분하게 하나씩, 하나를 만든 후에는 꼭 그걸 바라보며 감상하는 시간을 일부러 가지셨고, 새로운 걸 창조하기 위해 충분히 쉬시면서, '조화'라는 창조 질서를 우주 만물에 담으려고 애쓰셨습니다. 조화라는 단어는 한자 두 개가 결합해서 만들어졌는데요. 조화라는 단어에서 '조(調)'는 '고르다, 적합하다, 조절하다'를 뜻하고, 화(和)는 '화목하다, 온화하다, 화해하다'를 뜻합니다. 조화라는 단어는 그래서 정해진 기준이 없습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최선의 선택을 끊임없이 해나가려는 노력이 바로 조화입니다. 이왕 한자에 관해 말했으니 한 가지만 더 말하려고 합니다. 한자말 최선(最善)은 최상 혹은 제일 좋은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최선은 가장 선한 것을 뜻합니다. 무슨 일을 기획하고 계획할 때, 최선의 선택을 한다는 건, 손익에 따라 가장 많은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그 일에 관련한 사람 사이의 관계성에 부담이 가지 않는 상태를 찾아내는 심사숙고를 뜻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재앙을 내리실 때는 이 조화와 최선이라는 창조 질서가 인간의 욕망과 탐욕으로 철저하게 망가졌을 때입니다. 인간이 존재의 기반인 유한함을 망각하고 무한함을 쟁취하려 할 때, 자기를 하나님과 동일시할 때, 하나님은 인간 역사에 직접 개입하셨습니다. 인간이 바벨탑을 쌓을 때,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를 비웃을 때, 인간이 다른 인간을 철저하게 도구로 사용할 때,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자연 또한 하나님의 진노를 다양한 기상이변으로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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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인이 이스라엘 민족을 철저하게 도구로 전락 시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사용할 때,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세워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인의 압제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훈련소에 이스라엘 민족을 보내셨습니다. 40년 광야 살이. 이 광야 살이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주시는 일용한 양식에 감사하는 삶을 배워나갔습니다. 더욱 낫고 화려한 미래를 꿈꾸는 마음속 야망을 도려냈으니 이스라엘 민족은 도태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머뭇거리지 않고,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 나갈 수 있는 용기와 인내를,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배웠다는 사실을 곱씹으면, 참살이에 필요한 도구는 야망보다는 인내와 용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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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압 민족을 말살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훈련하여 만들어나가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이사야 11장 6절에서 9절에 그 훈련 일정이 아주 자세하게 적혀있는데요.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들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리와 어린 양, 표범과 어린 염소, 암소와 곰, 독사와 어린아이가 조화롭게 어울려 사는 세상을, 우리가 과연 이 세상에 만들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명령하신 거죠.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 꿈만 같은 세상을 어떻게 현실로 옮길 수 있을까요? 오직 한 가지만 기억하면 할 수 있습니다. 40년 광야 살이처럼 적잖게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이 꿈만 같은 세상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서는 사자가 풀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사자'입니다. 아니요. 전 어린 양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는데요.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는 어린 양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사자입니다. 우리가 모두 아무런 부담 없이, 아무런 꺼리김 없이,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사자로 돌변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아이들입니다. 여러분의 남편과 아내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새로운 인간 삶과 새로운 공동체를 구상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은 오늘 아침 새로운 공동체 형성 훈련의 필요성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가정에서 살점을 뜯어 먹는 사자가 아닌 풀을 뜯어 먹는 사자가 되십시오. 여러분의 아이가, 여러분의 남편이, 여러분의 아내가 가정에서 자유롭게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을 때, 여러분은 현실에서 사라져가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 조화와 최선을 재정립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이사야 선지자는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새싹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새싹의 역할을 힘겹지만 검질기게 훈련해나갈 때,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너무나 당연하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우리 아이 마음속에, 우리 아이가 살아가며 만들고 형성할 관계 속에, 그 아이의 세상 속에 가득하리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잠깐 눈을 감고 오늘 함께 묵상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닫는 기도

하나님, 조화와 최선이 사라지고, 발전과 성장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뜸 들임과 숙성이 비생산적 행위로 전락한 시대에서 우리는 하루하루 생존에 갈급한 채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어린 양의 탈을 뒤집어쓴 사자인 우리 모습을 잊고 살 때가 너무 많습니다. 삶에 대한 분노는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한 분노인데, 우리는 그 분노를 다른 이가 아닌 삶의 여정을 끝까지 함께 나눌 우리 가정에 쏟아부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당신께 나와 찬양하고, 기도하며 예배드렸습니다. 자라난 아이는 우리 품을 떠났고, 우리 품을 떠날 때, 그 아이는, 하나님, 당신의 품도 떠났습니다. 오늘 이 아침 이사야 선지자는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가장 먼저 세워져야 할 곳은 우리 가정이라고 말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어린 양처럼 집에서는 사자처럼 두 가지 얼굴을 가진 채 살아가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아이들 마음속에 담긴 하나님을 향한 지식이 실은 우리가 어떻게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척도임도 깨닫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풀을 먹는 사자, 새싹이 돋아나는 그루터기. 우리가 살면서 완성해야 할 대상을 건네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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