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정신적 외상과 종교 경험
난 내가 겸손하다고 생각했다. 겸손하지 않다면 자기 자랑질을 피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 "침묵은 금이다."란 동양 군자의 가치 기준에 입각한 삶을 살아내려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싶었다. 정신분석학을 배우고, 다른 이를 상담하며 그 사람의 정신구조(습관화를 지나 고착화된 사고방식)를 관찰하고 분석하면서 서서히 깨달았다. 내가 겸손함이라고 믿었던 건 어쩌면 단단하지 못한 내 자존감을 감추기 위해 사용한 도덕화moralization란 방어 과정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한 가지 사실이 내 마음에서 한 순간에 살아났다. 어린 시절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일어나 나 자신을 드러내야 할 순간이 오면 내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 불안, 얼어버림. 내가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두 번씩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환자들은 이런 순간을 공황발작panic attack이라 불렀다. 무슨 모임이나 위원회에서 중직을 맡을 때도 난 노자에 기대어 드러나지 않은 채 한 공동체를 움직이는 이가 공동체를 가장 잘 다스리는 이라고 믿고 싶었다. 뒤돌아보니 어쩌면 단단하지 못한 자존감에서 비롯된 도덕화란 방어 과정은 드류신학대학원 한인학생회 회장직을 맡았을 때, 예기지 않은 상황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었겠다란 생각도 든다. 좋은 글을 썼지만 남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했기에 난 논문 발표를 주저했고, 시간과 함께 유행에 뒤쳐진 글로 변한채 내 컴퓨터 어딘가에 저장된 채 사장되었다. A 혹은 A+를 받았던 수업에서 썼던 소논문들이었지만, 그때 난 그렇게 생각하질 못했다.
작년 9월에 드류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을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여 만든 책이 출간되었다. 세계적 출판기업 펄그레이브Palgrave 철학과 종교 항목에 해당하는 책이다. 책의 내용이 독창적이면서도 흥미로와 아시아 곳곳에 퍼져 지역 문화에 적응하며 성장한 기독교Asian Christianity in Diaspora란 연재물로 출판되었다. 연재물이 살아있는 한 내 책은 영원히 연재물의 한 꼭지로 살아남을 거다. 영어로 썼다. 박사 학위 논문 세 번째 지도 교수 크리스토퍼 앤더슨Christopher Anderson이 해준 첨삭 지도를 제외하면 다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직접 영어로 썼다. 신학과 철학책만 읽었더니 끝없이 이어지는 글쓰기에 능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글은 옛날 글이 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걸 깨달은 후 매일 뉴욕 타임스The New Times 사설을 한 편씩 통째로 베껴 썼다. 안정효 선생님의 충고를 믿었다. 글쓰기는 기술 연마와 마찬가지로 배워야 하기에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글을 많이 읽을 뿐만 아니라 좋은 글을 많이 베껴 써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그래서 누구도 하려 하지 않는 진리를 난 그분으로부터 배웠다. 얼마나 많은 글을 베껴 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무수한 베낌이 결국 내 몸에 들어와 영작문을 위한 잔근육이 되어줬고, 그렇게 키운 잔근육을 사용하여 Religious Experience in Trauma 정신적 외상과 종교 경험(2020) 이란 책을 써서 출간했다.
책에서 난 20세기 한국 개신교의 급속한 성장은 20세기 한국인의 비극적 역사 경험을 토대로 이루어진 기적처럼 보이는 처절한 집단적 몸부림이었다고 주장했다. 조선이란 나라 상실, 일제식민기, 형제가 형제를 뚜렷한 이유도 없이 살해해야만 했던 집단 학살과 살해로 가득한 한국전쟁기(미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속절없이 사라져야 했던 한반도의 자연과 그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았던 한국인은 한국전쟁기에 사라졌다), 한국인 모두가 상실에서 우울감, 우울감에서 우울증으로 떨어져 고통스러워할 때 나타나 한국인의 정신구조를 개조해야 한국이 "미국처럼" 부유한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우기고, 억압하고, 철저하게 통제했던 군부 정권기. 20세기 맘 놓아 쉴 곳 없던 한국인에게 교회는 마음껏 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살아있음 자체가 죄스러웠던 한국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과 환상이 묘하게 뒤섞인 확신을 교회는 심어줬다. 독재정권을 허용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며" 미국인처럼 잘 살 수 있게 된다고 교회는 한국인을 설득했다. 과거로부터의 도망, 과거로부터의 단절, 죄책감에 시달리는 자기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자식이자 하나님이 복 주시는 자식이라는 확신으로의 망명, 대한민국 민주주의 북한 공산주의를 연상케 하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 극심한 가난과 불안, 이를 미끼로 한국인을 세계에서 제일 근면한 노동자로 개조한 군부정권과 군부정권을 종교적으로 지지했던 교회. 이 모든 요소들이 복잡하게 뒤섞였을 때, 한국 개신교는 폭발했다.
난 왜 이런 책을 써야만 했을까?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뛰놀았던 교회 앞마당이 그립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하나님이 내 삶을 "쉴만한 물가"로만 인도할 거라는 철부지 신앙심을 이제는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함께 목놓아라 울고 불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매달리려고 발부둥치던 그때 그 열정과 진정성이 여전히 내 기억에서만큼은 맛있는 된장찌개처럼 구수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회기 할 수 없는 과거. 하지만 회기하고 싶은 우리의 한계 지어진 삶.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 기어이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삶을 마감하는 연어처럼 내 삶은 내가 태어난 날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 시작했다는 중압감을 끝끝내 확인하여 없애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 난 이 책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한국에 사는 기독교인들을 위해서. 그리고 내 두 부모님을 위해서. 두 분이 이 세상에 들어온 문을 지나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내가 쓴, 아들이 쓴 책을 읽게 해드리고 싶다. 공교롭게 오늘이 식목일이다. 나무를 심는 날.
2021년 4월 5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