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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 강물처럼 Aug 14. 2020

의로움에 관한 우리의 편견 (이사야 26:1-21)

노아는 왜 방주를 지었을까?

Nicolas Poussin, Winter or the flood (1660,1664)



1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처음으로 '의롭다'는 형용사로 그 사람의 됨됨이가 평가된 이가 누구인지 아시나요? 대홍수 사건 주인공 노아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사야 26장을 읽고 나서 불현듯 노아에 관해 말하는 절 이상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요. 방금 함께 읽은 성경 구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알려준 노래 가사입니다. 이사야 26장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하나님이 우리 삶 한가운데로 내려오셔서 우리를 이끄는 분임을 대대손손 잊지 않고 기억하라고 이사야 선지자가 손수 지은 시 한 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쓴 노래 가사는 두 부분으로, 그러니까 1절에서 10절, 11절부터 21절로, 나누어 읽을 수 있습니다. 11절부터 21절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내릴 멸망과 재앙을 설명하고 있다면, 1절부터 10절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민족이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할 한 가지 가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새로운 세상을 꾸려나갈 이스라엘 민족에게 필요한 삶의 가치를 의로움이라고 정했습니다. 이제 왜 제가 불현듯 노아라는 이름을 언급했는지 아시겠죠?


 

2

사람이 모이는 곳은 어디나 문제투성입니다. 에덴동산에 살았던 유일한 인간인 아담이 짝 하와를 만나 인류 역사상 첫 번째 공동체를 이루었을 때부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성경책은, 특별히 창세기 1장에서 4장은 우리 삶에 언제 문제가 발생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지 못했을 때, 우리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만족하지 못했을 때,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고 경험하지 못할 때,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지 못할 때, 자꾸만 조금 더 조금만 더에 집착하여 이미 가지고 있는 걸 무가치하게 여길 때, 다른 이를 부러워하여 자기를 무능력자로 규정할 때, 이로 인해 생기는 감정인 화와 분노의 원인을 자기가 아닌 다른 이에게 돌리기 시작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우리됨을 우리가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했을 때 우리는 자기를 향해 거짓말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향해 거짓말하면,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가진 이를 질투하게 되고, 이 질투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누군가를 파괴하고픈 충동에 휩싸일 수도 있다고 성경책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교회도 사람이 모이는 곳이기에 문제투성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모여 이룬 집단이 교회이기에, 교회에 가면 착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고 교회를 찾아온 이는 위선자와 사기꾼, 싸움쟁이로 가득한 교회에 혀를 내두르며 황급히 떠나가기도 합니다. 저 또한 이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왜 교회에는 착한 사람보다 나쁜 사람이 더 많을까요? 왜 교회에 다니는 사람보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 더 대하기가 편할까요? 



3

어느 날 목사님들의 목사님이라 불렸던 유진 피터슨 Eugene Peterson 목사님이 쓴 <현대어로 쓴 성경책 The Message> 한 꼭지를 읽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피터슨 목사님 역시 저와 같은 문제로 오랫동안 고심했기 때문인데요. 한 가지 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전 그 문제를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여긴 후 잊어버리려 했다면, 피터슨 목사님은 끈질기게 그 문제와 씨름하여 스스로 납득할 만한 해답을 찾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피터슨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나 세상이나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죄인이 아닌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죄인으로 가득한 세상이 싫어서 교회로 도망 온 사람 중 열에 열은 죄인으로 가득한 교회에 실망하고 돌아선다. 하지만, 교회에 모인 죄인은 세상에 있는 죄인과는 다르다. 적어도 교회에 있는 죄인은 자기의 부족함을, 자기의 나약함을, 자기의 불완전함을 알고 있다. 적어도 자기 됨됨이를 직시하고 인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만이라도 교회에 모인 죄인은 세상에 있는 죄인과 다르고, 더욱 나은 자기를 꿈꾸며 교회에 모인 죄인 속에서 우리는 세상에 끼칠 선한 영향력이란 불씨를 확인할 수 있다. 교회 다니는 우리가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과 다른 점은 자기가 세운 옳고 그름의 가치에 따라 다른 이와 자기를 진단하고, 판단하고, 험담하고, 비난하지 않는다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따르라고 전해주신 가치를 거울삼아 자기 모습을 진단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인생이 무르익어갈수록 다른 이를 향해 겨누고 있던 날카로운 진단, 판단, 험담, 비난의 화살을 자기에게로 돌려낼 수 있는 능력을 마음속에서 길어 올려내야 합니다. 



4

2016년에 돌아가신 신영복 선생님이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인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교도소에서 20년 20일간 머무는 동안 쓴 글이 담긴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한 꼭지가 생각납니다. 교도소 또한 인간이 사는 곳이기에 오는 이가 있으면 떠나는 이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신영복 선생님이 거하는 방을 찾아와 머물렀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어디론가 떠났습니다. 새로 세워진 교도소로, 혹은 새로 만들어진 교도소 운영 제도로 인해 신영복 선생님이 거처를 옮길 때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 보금자리를 틀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한 사람이, 유독 한 사람이, 선생님 마음에 거슬리기 시작했답니다. 그 사람과 헤어지길 바라며 긴 시간을 참아냈고, 마침내 그 사람과 헤어져서 이제는 속이 시원하다고 생각할 때 즈음이면, 어느새 새로운 누군가가, 유독 딱 한 사람이, 어떤 명확한 이유도 없이 다시 선생님 마음에 거슬리기 시작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영복 선생님은 깨달았습니다. 당신 마음속에 인처럼 박혀 있는 누군가를 향한 분노와 미움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살아있기 때문에 항상 함께 살아가야 할 마음속 대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신영복 선생님이 한 일은 조금 특별했습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처럼 거짓 친절과 거짓 사랑, 거짓 자선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믿으며 그 순간이 기억 속으로 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분노와 미움 또한 살아있음에 가능한 감정 상태이기에 이를 너무 나무라지도, 그렇다고 애써 외면하지도 않은 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기복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있는 그대로 경험하며 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5

노아라는 사람이 의롭다고 여김을 받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우리 기억 속에 남은 노아의 의로움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다른 모든 이가 하나님을 배신했을 때 노아는 하나님을 신뢰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산꼭대기에 방주를 하나 지었기 때문입니다. '순종'에 대한 강조는 결국 우리 마음에 노아하면 순종이라는 수학 등식을 하나 새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신앙 등식을 잠깐 옆으로 제쳐두면, 노아라는 사람이 써 내려간 인생 이야기가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옵니다. 악함으로 가득한 세상에 한탄한 하나님은 대홍수로 천지 만물을 새롭게 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때 문득 한 인간이 하나님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이 인간만큼은 살려야겠다는 절박함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찾아가 당신의 계획을 자초지종 설명한 후, 대홍수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창세기 6장을 차분하게 읽어보시면 알게 될 텐데요. 우리 머릿속에 각인된 이야기와는 달리 하나님은 노아에게 배를 어느 산꼭대기에 만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배를 한 척 지으라고 말씀하신 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고, 배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무덤덤하게. 주변 누군가가 다가와 노아를 향해 비웃으며 배 짓는 걸 그만두라고 말했다는 기록은 성경책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단지 노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배를 지었다는 한 구절만 적혀 있습니다. 노아는 누구로부터 비난을 듣지 않았고 칭찬도 듣지 않았습니다. 노아와 같은 시대를 산 사람은 노아가 하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한 가지 더 의미심장한 건 천지 만물이 뒤집어질 날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을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지만, 이를 주변 사람에게 알렸다는 기록 또한 성경책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노아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그저 덤덤하고 묵묵하게 해나갔을 뿐입니다. 사람이 해야 할 일과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이 차이점을 덤덤하게 받아들여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하게 해나갔을 뿐입니다. 



6

2019년 12월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처음 확인된 코로나바이러스가 한국에 상륙했을 때, 한국은 마치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일사천리로 확진자 치료와 방역 및 예방 활동을 수행하여 전 세계 이목을 사로잡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민첩한 대처를 국가 차원에서 수행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다양한 조사와 분석이 이루어졌었죠. 조사와 분석은 결국 몇 가지 요소로 좁혀졌는데요. 먼저 2015년에 한국 사회를 공포로 떨게 했던 메르스 MERS에 대한 후조치로 한국은 국가 차원에서 긴급 전염병 발생에 대한 행동 강령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었다는 점에 사람들은 주목했습니다. 다음으로 이웃 나라 중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가 처음 확인되었을 때, 이를 가볍게 흘려 넘기지 않은 의료진과 연구진이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개발된 코로나바이러스 진단기는 실전에 투입될 준비를 마친 채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준비성을 두 번째 요소로 들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요소는 2000년을 기점으로 해가 갈수록 심해지는 미세먼지 현상으로 인해 한국 국민은 마스크 착용을 어느 정도 생활화하고 있었고 코로나바이러스 비상사태가 선포되자 자기를 위해서 그리고 다른 이를 위해서 외출 시 모두 마스크를 적극적으로 착용했다는 사실입니다. 



7

다시 노아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면, 노아는 천지 만물이 뒤섞일 상황을 인식한 후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해야 할게 무엇인지를 빠르게 판단했고, 이를 실천에 옮겼습니다. 이 행동은 지극히 자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함이었지만 동시에 다음 세대가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일이었습니다. 노아의 삶과 그가 살면서 해낸 일을 종합해 보면, 지금까지 우리가 비판 없이 믿어왔던 의로움과는 조금 다른 새로운 의로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옳은 일만 해나가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노아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의로움도 생각해 볼 여지를 마련했습니다. 눈앞에 불어닥친 현실만을 바라보지 않고 한 세대 이후의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자질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굳게 믿는 바를 검질기게 물고 늘어질 수 있는 용기와 인내 또한 의로운 사람이 갖추어야 할 자질입니다. 이 자질에 꼭 덧붙여야 할 한 가지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검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용기와 인내에는 나와는 다른 생각, 나와는 다른 태도를 보인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배포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삶이 산산조각이 날 때가 머지않은 상황 속에서도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그 일에 몸과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천지 만물이 뒤집어지는 순간에 자기가 지은 방주에 들어가 평안하게 거할 수 있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노아라는 이름의 뜻이 '휴식' 혹은 '쉼'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모두가 생존에 혈안이 되어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쓰지 못할 때, 하나님이 이때를 위해 지으라고 명령한 방주를 마음속에 지어 그 속에 들어가 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언제 끝이 날지 아직은 알 수 없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뒤흔드는 이때, 이사야 선지자가 예견한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하며, 하나님이 지으라고 하셔서 지은 우리 각자의 방주 속에서, 가정 속에서, 허심탄회하게 삶의 애환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이 혼돈도 파괴할 수 없는 소박한 우리 일상 속에서, 성도님 모두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눈을 감고 이 아침에 함께 묵상한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새기는 기도

하나님 이 아침에 이사야 26장을 함께 읽고 의로움에 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노아라는 성경 속 인물이 살아낸 삶을 통해 살펴본 의로움은 지금까지 우리가 습관적으로 생각했던 의로움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의로움은 옳고 그름 중 옳음에만 집착하여 그름을 뜯어내고, 잘라내어 반드시 고치야 분이 삭는 이분법적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의로움은 옳음과 그름을 극복하여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란 걸 알았습니다. 의로움은 오늘이 아닌 내일을 향한 기대와 희망에서 시작했습니다. 의로움은 내일 꼭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깨달아 이를 향해 끈덕지게 걸어 나갈 수 있는 용기와 인내였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혼란과 불안함 속에서도 오늘 우리가 해야 할 게 무엇인지를 구별하여 그 일에 몸과 마음을 다할 수 있는 태도가 의로움이었습니다. 하나님,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로 인해 우리 삶은 조금씩 조금씩 조각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대한 그림이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에 한숨만 내쉴 때도 있습니다. 노아의 삶을 곱씹으며 깨달았습니다. 천지 만물이 뒤집어지는 순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노아처럼 방주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 '쉬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라고 명령한 방주, 곧 우리 가정 속에서, 다음 세대를 키우며 다음 세상을 준비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깊숙이 찾아와 행하시는 바를 차분하게 지켜 보며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의로움을 갈망하는 우리 삶 속에 찾아와 우리와 함께 거해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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