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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 강물처럼 Apr 27. 2021

네 '뿌리'를 알라! (룻기 1:1-5)

뿌리에 대해 생각하는 어버이 주일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룻기 1:1-5)"


1

미국이란 낯선 땅에 얼마만큼 적응되었는지를 알고 싶다면, 한국에 살 때는 꼭 지켰던 명절에 얼마만큼 무뎌졌는지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미국에 와서 처음 맞이한 추석과 설날은 서글펐습니다. 미국에 와서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효하는 거라는 한 선배의 말에 공감했습니다. 하지만 어느덧 9년이 되었습니다. 추석과 설날에 대한 기대도 이제는 그다지 남아 있질 않습니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여 안부 전화 드리거나 선물을 사서 국제우편으로 보내드리는 것 말고는 뭐 특별하게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한국 명절과 관련해 미국에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미국에서 태어난 지누랑 미누 두 아이에게 한국의 전통 명절이 무엇인지를 말해 줄 수는 있지만 경험하게 해 줄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2

그렇기에 오늘 맞이한 어버이 주일은 특별합니다. 항상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어버이 주일 설교를 준비했는데, 오늘은 제 앞에 앉아 계실 부모님을 생각하며 설교를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난 3년간 전 제 가족을 위해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교인이 없는 개척 교회였지만 언제나 주의 깊게 제 설교를 들어주는 처, 한국에서 매 주일 제가 누리망에 올리는 설교를 종이에 인쇄하여 읽어주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며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제 앞에 두 분 부모님이 앉아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그래서일까요? 어버이 주일 설교를 준비하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거짓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설교를 쓸 수 없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지만 가끔은 누구보다 더 무시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해야 한다고도 쓸 수 없었습니다. 누구보다 더 미워했던 적도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쓸 수도 없었습니다. 저 또한 늙어가는 건 생각 못 하고 수 년 만에 만난 부모님의 노화를 받아들이지 못해 마음고생을 한 적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책을 뒤적거리며 성경 속 인물은 자신의 부모님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3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20:12)” 우리가 모두 잘 아는 십계명 중 한 계명으로 어릴 적부터 어버이 주일이 되면 어김없이 주일 예배 설교 본문으로 뽑힌 구절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 인물은 어떻게 부모를 대했는지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결과는 적잖게 당황스러웠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을 배신했을 뿐만 아니라 속이고자 노력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한 땅을 향해 떠나기 위해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난 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손자 야곱은 형 에서의 장자 축복 기도를 가로채기 위해 아버지 이삭을 속였습니다. 그냥 속이지 않고 어머니와 계획을 세워 철저하게 속였습니다. 요셉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이집트 총리가 된 후 형들과 재회한 후 아버지를 자신이 사는 땅으로 모시고 와 보살핍니다. 그런데 아버지 야곱이 자신의 둘째 아들에게 오른손을 얹어 축복기도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무척 조심했습니다. 물론 야곱은 요셉의 둘째 아들에게 자신의 오른손을 얹어 기도했습니다. 신약성서로 넘어가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어머니와 형제가 아닌 당신의 제자들을 둘러보신 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형제들이냐?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마12:48~50)” 

     

4

그런데 오늘 함께 읽은 룻기서의 주인공 룻은 다릅니다.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룻이 효도한 대상은 자신의 어머니가 아닙니다. 룻이 효도한 대상은 죽은 남편의 어머니 그러니까 더는 자신의 삶에 어떠한 영향력도 끼칠 수 없는 시어머니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흉년을 피해 온 낯선 땅 모압에 더는 머물 육체적인 힘도 마음의 힘도 없습니다. 남편 엘레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모두 다 모압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살기 위해 고향 베들레헴을 떠났는데, 죽음만을 등에 업고 다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두 아들과 결혼하여 며느리가 된 오르바와 룻에게 나오미가 말했습니다. “난 내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테니 너희들도 고향 집으로 돌아가거라. 너희들이 날 따라온다고 내가 다시 아들을 낳을 수는 없다. 나는 내 인생길을 찾아갈 테니 너희들은 너희 길을 찾아서 가거라.” 오르바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에 순종했지만, 룻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하겠답니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기 1:16~17)”


5

룻기서가 어떻게 끝나는지 다 알고 계시죠? 베들레헴으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간 룻은 이삭줍기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아니죠.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죽은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먼 친척에 해당하는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하여 아이를 낳습니다. 나오미 입장에서는 자기 남편의 대가 계속해서 이어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짊어져야 했던 사회적 불명예도 한순간에 벗을 수 있게 되었기에 무척 기뻤습니다. 룻은 삶으로 자신의 이름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했습니다. 룻이란 이름의 뜻은 ‘동행’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동행했습니다. 그냥 동행하지 않았고, 어머니가 본래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나오미란 이름의 뜻은 ‘즐거움’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간 나오미는 이름을 바꿉니다. 주변 사람에게 자신을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했는데, 그 이름의 뜻은 ‘괴로움’입니다.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여 오벳이란 이름의 아들을 낳아 나오미에게 진짜 이름을 찾아주었습니다. 오벳은 ‘종’ 혹은 ‘하인’을 뜻하는 이름입니다.


6

오 년 전 미국에 오신 부모님을 뵌 후 다시 만난 부모님은 제게 언제나 변함없는 아버지와 어머니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새롭게 보였습니다. 말도 없이 무뚝뚝하셨던 아버지 속에 장난꾸러기 남자아이가 한 명 살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 아이를 한평생 보살피며 살아오셨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머니도 새롭게 보였습니다. 억척스럽고 끈덕진 여대장부 속에 실은 혼자 조용히 방안에 앉아 공기놀이를 하는 여자아이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제가 참 많은 걸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제 속에 있는 욕심쟁이 아이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룻은 우리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건 뭐 그리 대단한 거 해드리는 게 아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건 우리 마음속에 숨어 사는 어린아이가 두 분 마음속에도 살아 있다는 걸 발견하는 일이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건 그 어린아이를 더럽힌 세월의 때와 상처를 깨끗하게 씻겨 드리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 몸에 묻은 때를 씻겨주신 최초의 어린아이가 우리 부모님이시기 때문이다." 해가 갈수록 쇠약해지시는 부모님을 슬픔없이 바라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결코 잊어서 안 되는 게 있다면 부모님 마음속에 살아 있는 어린아이는 영원히 늙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부모님 마음속에 사는 이 어린아이와 동행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효도가 또 있을까요?



기도

하나님, 늙어가는 부모님이 두려운 건 사실 우리 또한 부모님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자연의 섭리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늙어가는 부모님이 이유 없이 싫고 미운 건 당신의 창조 섭리를 거스를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간절하게 깨닫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을 미워하는 건 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미워한다는 말입니다. 부모님을 부끄러워한다는 건 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입니다. 부모님 속에서 우리를 발견하게 하시고, 부모님의 마음속에 사는 어린아이를 발견함으로써 우리 또한 우리 마음속에 사는 어린아이를 발견하기 원합니다. 용기와 지혜로 우리를 감싸주세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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