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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 강물처럼 Mar 11. 2022

그대 그런 스승 가졌는가?

누가복음 12:49-56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누가복음 12:49-56)


“4월은 잔인한 달”이란 말 들어본 적 있죠?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이 자신의 시 『황무지』를 이 말로 시작해서 유명해진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근대사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군부독재 시절, 군정에 반대한 학생들도 이 시 구절을 빌려와 자신들이 산 시대의 암담함을 표현했습니다. 4월은 봄이 왔음을 알리는 계절입니다. 봄이 와야 하지만 봄이 오지 않는 4월이 잔인했기에 엘리엇은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하긴 올 4월 뉴저지 기온을 생각하면 4월은 잔인했습니다. 이상 기온 현상으로 겨울과 봄 사이에 갇힌 자연은 우리에게 잔인했습니다. 그래도 결국 생각 거리로 가득한 봄 5월은 왔습니다. 어린이 주일, 어버이 주일, 스승의 주일, 그리고 부부의 주일이 매 주일 우리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스승의 주일이자 동시에 성령강림절입니다.


        드류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하는 후배 전도사님들과 함께 밥을 먹다 보면 종종 듣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어쩌다가 미국에 올 생각을 하셨어요?” 전 그 질문에 답을 하려면 보통 한 시간 정도 걸립니다. 미국에 오기 위해서 특별한 무언가를 하진 않았지만, 2년이란 시간이 걸렸고 그동안 한 여자를 만나 결혼도 했습니다. 모든 이의 인생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끊어진 길, 새로 만들어야 하는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긴 대답을 좋아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기에 짧게 답을 하려고 전 마음속에 품고 사는 한 선생님과의 만남을 이야기합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한 후 어디로 가야 할 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친구들은 같은 대학원에 진학하여 목사가 되는 과정을 진득하게 걸어나갔습니다. 회사에 취직하고 싶었지만, 신학대학교 졸업장으로 취직할 수 있는 곳은 없었습니다. 여기저기 면접을 봤지만, 상담원 혹은 전화 판매사원 이외에는 절 정직원으로 채용해 주려는 곳이 없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 때 시작한 영어공부를 조금 더 열심히 해 토플이라는 시험에서 적당한 점수를 획득하면 영어강사는 할 수 있다는 형들의 말을 곧이듣고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기 위해 결국 전 집 근처 엘지 25시 편의점에 취직했습니다.


        어느 날 그런 저의 근황을 전해 들은 선생님은 제가 친하게 지낸 형을 통해 당신을 한 번 찾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찾아갔습니다. 그만큼 제 마음은 갈팡질팡 어디로 가야 할지를 두고 엄청나게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제 근황을 묻고 제 고민을 한 참 동안 말없이 듣던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자네, 쓸데없는 생각은 인제 그만 하고 미국에 가서 공부를 좀 더 해보는 게 어떻겠나?” 이 말이 제 몸속에 들어와 뿌리를 내렸고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9년 후 전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전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을 믿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말씀이 실체가 된다는 성육신의 진리 또한 믿습니다. 왜냐하면, 삶에서 그걸 실제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2: 51~53)


        이 구절을 읽은 이가 제대로 된 ‘상식’을 가지고 있다면, 읽자마자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올라야 할 생각은 “뭐라고?”가 되어야 합니다. 평화와 사랑, 연민과 공감의 상징인 예수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모여 서로서로 떠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말씀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한 게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든 모든 사람에게 하셨습니다. 만인이 만인을 향해 분쟁하는 세상을 만들기 나는 이 세상에 왔다. 온 세상을 전쟁터로 만들겠다. 이게 예수님이 오신 이유일까요?


        전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당혹스러웠습니다. 먼저 저부터 이 구절을 쉽사리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었기에 제가 이해한 걸 다른 이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도 없었습니다. 스승의 주일이자 성령강림절인 오늘 이 예배를 준비하면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성령의 불꽃처럼 뜨거운 스승님의 말씀을 성경에서 찾고 싶었습니다. 이 구절이 제 마음속에 찾아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함께 읽은 구절을 통해 전하고자 하신 바가 무엇인지는 누가복음 12장을 통째로 삼켜야만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눅1:1)” 이 구절을 읽을 때 우리 마음속에 그려지는 모습은 예수님 주변에 모여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모여들었을까요? 누가복음 12:1절의 첫 말인 “그 동안” 예수님이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과 율법학자에 대한 비판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추측할 수 있는 건 예수님께서 바리새파 사람과 율법학자의 잘못된 모습을 조목조목 언급하셨을 때, 길을 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의 외식(外飾)을 누룩에 비유하셨습니다. 누룩은 밀을 굵게 갈아 내버려 두면 자연이 자연스럽게 만드는 발효제입니다. 마태복음 13장 33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 누룩에 비유하여 설명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표가 나지 않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서서히 자신의 세력을 기하급수적으로 늘여가는 누룩의 생명력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전파되는지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럼 여기서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바리새파 사람의 주특기인 외식(外飾)도 누룩과 같은 성질을 가졌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손쉽게 사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가식과 외식을 누룩처럼 확장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에 맞서기 위한 분쟁과 투쟁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 선언을 시작으로 예수님은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 분쟁의 행동지침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나, 이 세상에 영원토록 감출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행동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외식과 가식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결국 밝혀질 수밖에 없다는 걸 지적하셨습니다.


둘, 육체를 해치는 자가 아니라 영혼을 해치는 자를 두려워하라. 우리의 몸이 아닌 영혼을 지키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셋, 인간의 삶은 물질의 풍족함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자신을 위해서만 재산을 비축하는 사람에게는 부자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부자일 수 없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수천 억 돈을 끌어모았는데, 오늘 밤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물으셨습니다.


넷, 밤이 늦도록 주인을 기다리는 하인처럼 경각심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라. 삶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 찾아올지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아무도 없기에 항상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마지막을 준비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네 가지 가르침을 전하신 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한 이해하기 힘든 구절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눅 12:51)”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향해 분쟁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가식과 외식으로 삶의 소중함을 망각한 사람들에게 분쟁을 선포하셨습니다. 중심을 잃어버린 후 재산과 명예 불리기에만 집중하는 교회를 향해 분쟁을 선포하셨습니다. 중심을 상실한 후 사랑과 연애를 혼동하여 가정파괴를 집안의 유산으로 이어가는 가정을 향해 분쟁을 선포하셨습니다. 중심을 버린 후 텅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해 숨 고르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해 분쟁을 선포하셨습니다.


        성령강림절과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신 분쟁의 불씨를 우리 마음속에 받아 잃어버린 중심을 다시금 되찾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식과 외식을 타파하는 분쟁, 내면을 살찌우는 투쟁, 가정의 중심을 되찾는 분쟁, 마음속 중점을 되잡는 투쟁에 동참합시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예수님께서 세상에 건네신 ‘분쟁’은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우리 마음속을 뿌옇게 만든 가식과 외식이란 안개를 걷어내기 위한 운동이었습니다. 참살이를 거짓살이로 만든 허례허식을 가려내기 위한 운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밭에 잘 심어 우리의 하루하루를 참살이로 만들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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