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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 강물처럼 May 29. 2021

배부른 신앙에서 배 고픈 신앙으로

요한계시록 10:1-11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0:8-11)"


1

모두 아시다시피 성경 66권 중 마지막을 장식하는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이 에게 해에 위치한 그리스의 한 섬 파트모스Patmos에서 유배 중일 때 쓴 글을 모아 만든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왜 파트모스 섬에서 '요한의 묵시록'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도 불리는 이 책을 집필했는지에 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주 후 60-70년 사이 로마 네로Nero 황제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기독교 박해는 90년대에 이르면서 자기를 포함하여 로마의 모든 황제를 신으로 만들려 했던 도미티아누스Domitian 황제에 의해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그 시기에 로마 군인에게 붙잡힌 사도 요한이 유배된 곳이 파트모스 섬이라는 의견이 그 첫 번째 해석이라면,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할 장소를 물색하던 중 사도 요한이 선택한 곳이 파트모스 섬이었다는 두 번째 해석이 됩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쓸 당시에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는 때였습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걸 각오해야지만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시대였죠. 지천으로 널린 게 교회이고, 조금만 마음이 뒤틀리면 언제든 다른 교회를 찾아 떠날 수 있기 때문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혹은 돈으로도 무언가가 쉽게 해결되지 않을 때, 약국이나 병원에 가듯이 교회를 선택하는 시대를 사는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 사도 요한이 요한 계시록을 집필했음을 미리 마음에 새기고 책장을 넘길 필요가 있습니다.

 


2

오늘 함께 읽은 요한계시록 10장에는 천사가 한 명 등장합니다. 오른발은 바다 위에 왼발은 땅 위에 두고 서 있는 천사는 손에 펼쳐진 두루마리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전쟁, 살인, 기근, 돌림병, 지진 같은 재앙이 일어남(요한계시록 6, 7장)과 지구의 삼분지 일이 불타 없어지고, 바다의 삼분지 일이 피로 변하고, 태양의 삼분지 일이 어둡게 변하는 천재지변(요한계시록 8장)을 요한에게 알려준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기록하여 남기지 말아라. 대신에 저기 저 천사가 쥐고 있는 두루마리를 받아서 읽어라." 자기에게 다가온 요한에게 천사는 손에 든 두루마기를 건네며 말했습니다.


"가져가서 먹어라. 네 입에는 꿀 같이 달지만, 네 배에는 쓰리라. (요한계시록 10:9)"


천사가 요한에게 요구한 건 두루마리를 조금씩 찢어 입에 넣어 먹으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두루마기에 적힌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헤아리고 곱씹으며 차분하게 읽어서 그 뜻을 온몸으로 받아내라고 요구했습니다.


 

3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이다."라는 말 다 아시죠? 이 문장에서 영장이란 '영묘한 힘을 가진 우두머리'를 뜻합니다. 인간이 가진 영묘한 힘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건 생각하는 능력, 이성입니다. 이성에 반대되는 개념이 감성이란 걸 모르는 이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보통 우리는 감성보다는 이성을 더 대단한 능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최첨단 과학 장비를 사용하여 뇌를 연구하는 뇌 심리학자와 신경생물학자는 한결같이 말합니다. 건강한 이성은 건강한 감성이 전제되었을 때만 가능하다고. 어찌할 바를 몰라 엉엉 울고 있는 이를 지켜보면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이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엄청나게 화가 날 일인데도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는 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거 같은 이를 지켜보면 어떤 느낌이 생기나요? 존경심이 샘솟을까요? 경외감이 몰려올까요? 그런 이를 대할 때, 제 마음에 드는 첫 번째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돌아서서 대체 무슨 짓을 할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고요. 두 번째 찾아오는 감정은 정말로 그런 순간을 아무렇지 않게 참아낼 수 있을까란 호기심입니다. 건강한 이성을 가지기 위해서 갓난아기에게 필요한 첫번째 조건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자극입니다. 자극도 무조건적 자극이 아니라 갓난아기의 몸과 마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변화에 시기적절하게 반응하는 자극입니다. 배가 고프다고 울 때는 음식이란 자극이 주어져야 하고, 잠이 올때는 잠을 잘 수 있는 평안한 환경이란 자극이 주어져야 하고, 대소변으로 몸이 축축하고 질퍽해졌을 때는 이를 깨끗하게 닦아주는 자극이 필요합니다. 네, 맞습니다. 이 모든 일은 엄마가 아기를 위해서 해주는 일입니다. 자기 몸과 마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변화를 차분하게 잠재울 수 있는 자극이 외부에서 규칙적이고 지속적으로 주어졌을 때만 아기는 건강한 감성 위에 이성이란 집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이성이란 집을 세우는 첫 단계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자극이 실은 엄마라는 한 존재라는 걸 알아가는 일입니다. 배고픔을 없애주고, 토닥거려 잠들게 하고, 몸을 깨끗하게 유지해 주는 이가 환상 혹은 꿈에 존재하지 않고 자기 앞에 혹은 옆에 존재하는 한 명의 인간이란 걸 깨달았을 때, 이성이 인간 마음에서 생기기 시작합니다. 자기보다 자기에게 더 관심 많은 존재가 꿈과 환상이 아니라 필요할 때면 언제든 자기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확신했을 때 아기는 그 대상을 '엄마'라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복잡다단한 갓난아기 마음의 발달 과정은 우리에게 믿기 힘든 사실을 하나 알려주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현실은 우리가 믿지 않으려고 애쓰는 환상 혹은 꿈이 충분하게 만족될 때만 진실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곧, 건강한 이성은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싶은 불필요한 생각, 불현듯 찾아오는 섬뜩한 느낌, 잊으려 애쓸수록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소중하게 대하고 품을 때 자라납니다.

 


4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이를 조금 더 명확하게 옮겨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바람이 언젠가는 현실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고,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언젠가는 분명하게 볼 수 있다는 장담이다." 이 말씀을 붙잡고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삼박자 축복 신학, 번영신학을 만든 한 목사님을 모르는 분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목사님은 믿음을 강렬하게 바라는 걸 손에 쥐는 거라고 짤막하게 정의했습니다. 바라는 바가 있으면 하나님께 간구하고, 이미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셨다고 믿으며 살다 보면 바라는 모든 게 이루어진다고 주장했지요. 그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한 예 한 가지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1970년대 군부정권은 여의도를 미국의 맨해튼처럼 만들 계획을 세우고 그곳에 세워질 모든 건물을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의도의 맨해튼화를 위해 필요한 건물 중 하나가 종교시설이었는데요. 정부는 공고를 내어 여의도 종교 시설 용지 사용 허가를 희망하는 종교 기관을 모집했습니다. 그 목사님도 지원서를 냈지만, 며칠 후 지원서가 등록조차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자기에게 주실 거라 굳게 믿었던 그 목사님은 그 믿음으로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그는 서울시 부시장이 여의도 토지개발 사업을 주관한다는 소식을 알았고, 부시장 장모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 또한 알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서울시 부시장 장모에게 접근했고 얼마 후 부시장 장모를 자기 교회 성도로 만들었습니다. 부시장 장모의 마음을 산 목사님은 장모에게 딸을 교회에 데려오라고 권고했고, 얼마 후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나온 부시장 아내를 자기 교회 성도로 만들었습니다. 얼마 후 이번에는 부시장 아내에게 남편을 교회에 데려오라고 권고했고, 부인을 따라 교회에 나온 부시장 역시 자기 교회 성도로 만들었습니다. 얼마 후 자기 교회가 건축용지를 애타고 찾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된 서울시 부시장은 그 목사님에게 찾아와 여의도 종교시설 부지 사용 허가를 교회를 따낼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고, 얼마 후 그 목사님은 단일 교회로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를 여의도에 건축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설명한 후 그 목사님은 이 모든 게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굳건한 믿음이 하나가 되어 이룬 기적이라고 말했고, 우리 또한 믿기만 하면 원하는 걸 모두 쟁취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5

얼마 전 한국 사회는 한국토지공사 직원이, 고위급 간부에서 말단 사원까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조직적으로 재개발토지사업 정보를 오용하여 재산을 부풀리는 데 집중했다는 사건으로 떠들썩했습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일해야 할 공무원들이 연줄과 정보력을 사용하여 사리사욕 채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밑 낯이 만천하에 드러났지요. 한탕만 제대로 성공하면 한평생 먹고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주변 친구에게 자기의 능력을 자랑했던 신입사원부터 부인의 명의를 도용하면 쉽게 꼬리가 밟힐 수 있기에 사촌과 팔촌, 사돈까지 엮어 가족 토지 투기 회사를 만든 고위급 간부까지, 한탕주의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사로잡힌 한국토지공사 직원의 이성은 무쇠보다 단단하게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여의도에 교회를 세운 목사님이 외쳤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한국토지공사 직원의 집단 투기가 왜 동시에 제 머릿속에 떠올랐을까요? 바라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손에 넣고 말겠다는 멈출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이 한쪽에서는 '투자'라는 이름 아래, 다른 한쪽에서는 '믿음'이란 이름 아래 숨겨져 있었던 건 아닐까요?

 


6

천사가 요구한 대로 두루마리를 입에 댄 요한은 꿀 같이 단맛을 느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몸에 들어온 말씀은 소화하기가 쉽지 않았고, 요한은 소화할 수 없는 말씀으로 쓰린 배를 움켜쥘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의 이러한 행동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자라나서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배만 생각하여 눈앞에 놓인 음식을 마구 뱃속에 쑤셔 넣으면 결국 배탈이 날 수밖에 없지요. 요한은 쓰린 배를 잠재우는 방법에 관해 생각했을 겁니다. 그때 전사가 말했습니다.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요한계시록 10:11)"

천사는 요한에게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게 예언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마지막 때에 일어날 천재지변에 관해 말할 수 없다면, 대체 무엇을 예언해야 할까요? 천사는 요한에게 마지막 때에 다른 이와 함께 살아갈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나 자신, 내가 하는 사업, 내가 키운 아들과 딸, 내가 다니는 교회만 잘 먹고 잘살게 해달라는 신앙에서 한 걸음 더 내디뎌 어떻게 하면 나와 너, 우리가 계속해서 함께 더불어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두고 고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7

영성 신학의 대가라고 불리는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사실 영성이란 단어를 싫어했습니다. 영성에 관해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우리 몸의 반응을 억누르고, 다른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자기 속으로 함몰되어 들어가서 현실로부터 점점 더 멀리 도망치기 때문입니다. 마틴 부버가 쓴 책 <나와 너I and Thou>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하나님은 나와 너 사이에만 존재한다.”가 됩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쉽지 않지만, 진정성을 가지고 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관계 속에 거하는 하나님을 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할 곳은 하늘도 아니고, 땅속도 아니고, 우리 마음도 아니라 우리 옆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건 귀에 듣기 좋은 말을 쉽게 내뱉는 단내나는 입이 아니라 듣기에 거북하고 곱씹을수록 배가 아프지만 제대로 소화한다면 쾌변같이 시원한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진정성 있고 인내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함께 묵상한 요한계시록 10장은 이러한 마음은 성숙한 신앙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신앙 여행을 시작할 때, 처음 내뱉은 말은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차분하게 생각하면 우리 삶은, 매일 매 순간이 종말의 연장선일 뿐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대했던 이를 소중하게 대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볍게 여겼던 이를 진중하게 여기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단맛을 추구하지 말고 배앓이를 추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잠깐 눈을 감고 오늘 함께 묵상한 말씀을 곱씹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이 아침에 종말의 때에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간직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발생한 이후 몇 개월이 지났을 때 다짐했습니다. 세상이 다시 좋아지면 다른 이와의 관계에, 접촉에, 왕래에 더 많이 신경 쓰면서 살아야지. 하지만, 이제 조금씩 우리가 일상이라 생각했던 삶의 방식을 되찾는 이 시점에 오니, 사실 우리가 원했던 건 다른 이와의 관계, 접촉, 왕래가 아니라 우리가 하고 싶은 걸 다른 이의 시선일랑 생각하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폐쇄성 짙은 자유였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하늘도 땅도 아닌 다른 이와의 관계임을 깨닫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진솔함과 진정성이 다른 이와의 관계에도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이 깨달음은 당신의 말씀을 맛만 보고 버리는 가벼운 신앙이 아니라 뱃속 쓰라림을 감내하며 당신의 말씀을 몸과 마음으로 소화하는 능력에 달렸음을 오늘 이 아침에 마음에 새깁니다. 오늘 하루를 진정성 있는 삶의 마지막 하루처럼 살겠습니다. 오늘 하루가 당신의 자비로 넉넉한 하루이길 소망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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