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하나, 사랑 둘, 사랑 셋...
<미스터 선샤인 (2018)>은 2007년에 미국에 온 이후 처음 본 한국 연속극이었다. 드류 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미국연합감리교회 역사박물관에서 함께 일했던 마크Mark가 어느 날 세상에 이런 좋은 한국 연속극이 넷플렉스Netflex에서 방영하고 있고 영문 자막까지 제공되어 너무 재밌다고 말했다. 미스터 선샤인 Mr. Sunshine? 처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누리망을 몇 군데 찾아헤맨 후 난 무료로 연속극을 시청할 수 있는 공간을 한 곳 발견했다. 김태리라는 여배우를 내 머릿속에 각인할 수 있었던 ‘사건’이 되어버렸던 미스터 선샤인. 이 한국 연속극을 시작으로 처와 난 재밌다는 연속극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일본의 점진적인 조선침략, 서구열강의 노리개 감으로 전락하는 조선의 마지막 절개와 자존심을 상징하는 고애신을 김태리 배우가 연기했고, 여리지만 강직하고, 따뜻하면서도 날카로운 흠모할 만한 여인이 내 앞에 나타났다. <스물다섯, 스물하나(2022)>에서 김태리 배우는 펜싱을 사랑하는 나희도라는 이름의 태양고등학교 학생을 연기했다.
만남.
어린 시절 병으로 아버지를 잃은 희도에게 펜싱은 아버지와 한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자 아버지가 자기에게 아낌없이 건네줬던 격려와 칭찬을 재경험할 수 있는 통로였다. UBS 9시 뉴스 진행을 맡고 있는 엄마 신재경(서재희 분)은 펜싱을 향한 희도의 마음을 모르는 거 같다. 남편이 죽은 이후로는 패배만 거듭하는 희도를 이해할 수 없어 못마땅했다. 엄마와 펜싱, 순정만화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향해 힘차게, 덤벙거리지만, 앞뒤 재지 않고 나갈 기백이 가득한 희도가 마음에 숨겨둔 외로움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주변에 없는 듯했다. 그때 백이진(남주혁 분)이 나타났다. 1999년 외환위기 후 국가부도 사태로 회사가 부도나기 전까지는 양지에서만 살았던 이진이는 아버지 회사가 부도난 후 산산조각 난 가족이 함께 내린 결정대로 대학교 휴학 후 군대에 자원입대했지만 의가사 제대로 남들보다 일찍 사회로 돌아왔다. 그런 그가 맨땅에 홀로 서기 위해 구한 단칸방이 딸린 집이 있던 동네가 바로 희도가 엄마와 함께 사는 동네였다. 한 푼 두 푼 벌어서 방송국 기자 검정고시에 도전하기 위해 이진이가 택한 일이 동네 책방 사무직이었고 순정만화를 애독하는 희도가 새로운 만화책이 나올 때마다 찾아오는 만화방이 이진이가 일하는 곳이었다.
첫사랑.
제대로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내 첫사랑의 흔적이 곳곳에 숨어 있는 연속극이다. 관심이 있고 마음은 가지만 그런 복잡하고 묘한 마음속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내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니 이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또한 전혀 알지 못했던 사춘기 때 내 모습이 희도와 이진이, 유림이(보나 분)와 지웅(최현욱 분), 승완(이주명 역)의 모습에서 다시 살아나 내게 다가왔다. 무척 소심했기에 소심함을 감추기 위해 유달리 활발한 척 내가 아닌 날 상상하며 연기했던 내가 희도에게 담겨 있었고, 부드럽고 세심한 오빠 같은 남자로 자라고 싶었던 이상이 이진이 속에 담겨 있었다. 무언가를 남보다 잘하고 싶어 부단히 노력했지만 정작 나보다 잘하는 이가 앞에 나타나면 쫄아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이 유림이 속에 있었고 숨겨진 자아를 찾아서 떠나야 하는 그때 그 시절 압박감이 지웅이의 말과 행동에서 느껴졌다. 삶을 삐딱하게 바라보며 내 삶 또한 삐딱하길 바랐던 뒤틀린 선입견을 승완이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무엇이 그리 겁이 났을까? 관심이 있음을 관심 있음으로 인정하지 못했고, 마음이 달려감을 아니라고 거부했다. 그리고 세상과 사람만 원망했다. 원망을 통해 적어도 난 괜찮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수.
입맞춤과 몸 비벼대기. 결국 육체 뒤섞기. 두 아들에게 내가 가끔씩 해주는 말이 있다. 신비로 가득한 성관계로 인해 보다 소중한 걸 등한시할까 봐서. “어른이 되고 나면 성관계는 밥 먹는 것과 비슷해진단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말만이 아니라 몸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거란다. 너네 나이 때는 몸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성관계를 먼저 했다는 사실만으로 ‘대단한’ 아이가 될 때지. 그런데 말야. 5년, 6년만 참는 게 아니라 조금 연기하면, 그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분이 돼버린단다. 아빠 나이가 되면 성관계는 일상이 된다. 그러니 너무 집착하지 마.” 입맞춤 한 번이 심심풀이 땅콩이 아님을, 아니 입맞춤 한 번이 성관계를 향한 전초전이 아니라 입맞춤 한 번은 그 자체로서 성스럽고 신비롭다는 사실을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보여준다.
사랑.
이진이와 희도가 나눈 사랑은 육체적 사랑이 아닌 정신적 사랑이었다. 소유하기 위한 사랑이 아닌 내려놓기 위한 사랑이었다. 이진이는 희도를 지켜주고 싶었고 멋지게 자라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싶어 했다. 처와 함께 농담을 주고받았다. “어떻게 저렇게 이뻐하는데 가만히 끌어 안기만 할 수 있을까? 안 그래요?” 이진이가 자신의 성적 본능을 억제하는 장면은 연속극 그 어느 장면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진이가 희도를 아끼고 소중하게 보듬는 장면을 차분하게 관찰하고 있노라면 희도의 순수함과 쾌활함, 발랄함을 보호하기 위해 이진이는 20세 초반 남성의 꺽기 힘든 성적 본능을 꺾어나갔다는 걸 상상해 볼 수 있다. 희도는 이진이의 넓은 품 안에서 마음껏 남자를 탐색했고, 경험했고, 사랑했으며, 그 속에서 여인이 되어갔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으로 이진이와 희도의 사랑을 뒤틀어 읽는다면, 이진이는 자기의 억압된 성적 본능을 해야 하는 일, 주어진 일에 쏟아부었다. UBS 최초의 고졸 기자는 결국 UBS 최초의 고졸 9시 뉴스 진행자가 되었다. 희도는 다른 곳으로 떠났지만 이진이는 희도를 떠나 보내지 않았다. 희도가 자기에게 건넨 응원과 사랑을 고스란히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다. 헤어진 지 7년이 지난 어느 날 이진이는 한국에서 희도는 미국에서 화상으로 대화를 나누었을 때, 간단하게 안부를 나누는 찰나의 순간에 둘은 그 순간까지 함께 한 소중한 기억을 재경험했다. 내가 한 사랑이 진짜인지 거짓인지라를 알아낼 수 있는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기준은 세월이 지난 후 그때 그 사랑을 떠올릴 때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인지하기다. ‘조금 더 잘해줬어야 했는데…’란 후회는 아프지만 그때 그 사랑이 사랑이었음을 알리는 청신호다. 화, 실망, 분노가 밀려온다면, 그건 사랑이 아닌 집착이었다.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첫째 아들 지누를 중간에 둔 채 아내는 안락의자에 난 흔들의자에 몸을 기대고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시청했다. 우리 둘은 거의 어김없이 권도은 작가가 썼고 정지현 감독이 연출한 눈물자극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다. 내가 말없이 눈물을 닦을 때면 아내는 장단 맞추듯 짧게 흑흑거렸다. 문득 나에게 물었다. ‘처는 지금 누구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을까?’ 한 번 물어보고 싶었다. 갈팡질팡을 거듭한 후 난 묻지 않기로 결정 내렸다. 그게 아내가 살아온 삶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라 생각했다. 그런 후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건넸다. ‘난 대체 왜 울고 있었던가?’ 아내를 만나기 전에 난 ‘사랑’이란 단어를 가져다 붙을 수 있는 관계를 누군가와 만들어 본 적이 없었던 거 같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자기를 포기할 수 있는 용기는 자기를 자기로 인정하고 받아 들을 수 있는 능력, 자존감에서 자라난다. 내 변변치 못했던 자존감은 내가 끌렸던 여자들로부터 날 밀어냈다. 내 마음을 고백하지 못했던 건 부끄러움 때문이라고 말하며 쉽게 아무렇지 않게 덮어버릴 수도 있지만, 그런 부끄러움 속에는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한 신뢰가 없었기 때문이다. ‘난 대체 왜 울고 있었던가?’ 이진이에 비하면 늦었지만 끌림이 있던 여인에게 내 몸과 마음이 끌리고 있음을 말할 수 있었던 순간이 내게도 있었고, 그 여인과 결혼하여 지금까지 두 아들을 낳아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만족감에서 난 울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진이는 희도를 잃었지만, 난 내 사랑을 잃지 않았다. 난 내 사랑을 잃지 않을 거고, 그 사람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보호하고, 흘러가는 세월과 더불어 고귀하게 변하며 늙어가는 모습을 함께 할 거다. 진짜 사랑은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는 법이다.
2022년 11월 6일 일요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