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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 강물처럼 Oct 14. 2022

넌 무한한 가치로 매일 빛난다

2021년 3월 10일 목요일

오늘 아침에 눈을 뜨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려는 참에 네 엄마가 내게 말했다.

"여보..."

"왜요?"

"어제 지누가..."

"지누가 뭘요?" '또 무슨 일이지?'란 질문이 번개처럼 대뇌를 스치고 날아갔다.

"어제 학교에서 아이 한 명이 지누에게... 뭐라고 했다더라. 정확한 말은 생각나질 않는데, 넌 가치 없는 새끼라고 말했데요."

"..."

"이건 분명히 인종차별인데. 이게 한 두 번도 아니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하죠?"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줄래요?"

"그러니까, 지누가 수업 시간에 자리에 앉으려고 하니까, 아니 자리에 앉으니까, 그 아이가 지누 옆에 앉으면서 "넌 일말의 가치도 없는 새끼야."라고 말했다잖아요. 이건 인종차별인데. 이런 말을 왜 지누가 들으면서 자라야 해요? 난 말해야겠어요. 거기 구역회(같은 지역에 속하는 목사들이 한 달에 한 번씩 감리사님을 중심으로 모이는 모임)에 갔을 때, 끝나고 감리사님께 잠깐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남으면 이 부분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할 거 같아요. 당신도 당신 감리사님한테 말하세요. 이건 말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부분이잖아요. 감리사님도 이런 걸 알아야지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줄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아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너 옆에 앉아서 아침을 먹었고, 너 옆에 서서 양치질을 했고, 언제나처럼 널 7시 40분에 학교 정문 앞에서 내려줬다. "아빠, 그럼 다녀오겠습니다."란 네 말에 "그래, 잘 갔다 와라."로 어제랑 다르지 않게 말했다. 그로부터 1분 후 미누 학교로 가기 위해서는 좌회전을 해야 하는데, 그걸 잊고서 직진을 해버렸다. 

"아이고, 미누야! 네 학교로 가려면 좌회전을 해야 하는데, 아빠가 직진을 해버렸다. 여기서 다시 좌회전을 하자."

미누는 말이 없더라.

"아빠가 그냥 계속 직진했으면 집으로 돌아가는 건데. 그랬으면 참 좋겠지?"

"네. 그랬으면 진짜 진짜 좋지요."


        미누를 학교 앞에 데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빠 중학교 시절이 생각나더라. 중학교 3학년 때 아빠 반에서 함께 생활했던 한 친구 아닌 친구가 생각났다. 이름은 생각나질 않는데, 녀석 얼굴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못생긴 얼굴이 아니었어. 오뚝한 코에 속 산꺼풀이 진 이쁜 눈을 가지고 있었고, 코였던가 아니면 코 옆에 점이 하나 박혀 있었지. 아빠보다는 키도 컸고, 아빠보다는 싸움도 훨씬 더 잘했다. 아빠가 그 녀석을 친구 아닌 친구라고 부른 이유는 친구로 두고 싶지 않았지만 같이 놀지 않거나 외면하면 힘으로 아빠를 구박했기 때문에 친구가 아니었지만 친구로 지낼 수밖에 없는 묘한 긴장감이 항상 감도는 관계로 묶인 채 함께 1년을 지내야 했던 녀석이었지.


        지금 내가 다시 중학교 3학년 시절로 돌아간다면, 지난 7년간 연마한 유도와 주짓수, 작년에 시작한 권투 실력을 고스란히 가지고 그때로 돌아간다면 녀석 크게 한 번 혼내고 싶다. 무릎 꿇는 엎어치기로 바닥에다 녀석 등을 쿵하고 내리찍은 후 팔 관절 꺾기로 녀석이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만들고 싶다. 풀어달라고 애원하길래 풀어줬더니 이때다 하고 기습 공격을 한다면 날렵하게 녀석의 주먹 혹은 발 사정거리 밖으로 피한 후 '왼손 살짝 오른손 힘껏, 왼손 살짝 오른손 힘껏, 왼손 살짝 오른쪽 힘껏 왼손을 활처럼 휘어 한 방 오른손을 아래에서 위로 힘껏 쳐올려 한 방'으로 다시 바닥에 눕히고 싶다. 당시에 아빠는 녀석에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거든. 녀석이 오라고 하면 가야 했고, 녀석이 친구 한 명을 지정해서 그 아이랑 놀지 말라고 하면 놀지 말아야 했어. 안 그럼 아빠를 때렸거든. 그 녀석은 자기보다 강한 이에게는 부드럽고 선했지만 자기보다 약한 이에게는 기분 내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했단다. 미웠지. 하지만, 밉다는 말도 직접 할 수 없었지. 


        그래서 4살 널 태권도장에 보냈고, 7살 널 데리고 뉴저지 매디슨 남산 무도장 South Mountain Marital Arts으로 찾아갔었다. 힘에 밀려서 싫은 걸 싫다고 내색하지도 못했던 아빠처럼 너랑 미누가 학교에서 당하고 살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특히나 미국이란 네게는 유일한 나라지만, 아빠에게는 여전히 낯선 남의 나라에서 태어난 너랑 미누가 덩치가 훨씬 더 큰 미국 아이들 틈에서 이리저리 밀리고 치이면서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그 바람 속에서 너랑 유도 대련을 할 때면 그리고 매정하게 널 바닥에 던지고, 기회만 보이면 목조르기와 관절 꺾기로 너를 불안하고 화나게 만들었다. 아빠랑은 다르게 강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나랑은 다르게 스스럼없이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누구에게나 말할 수 있는 다부진 아이로 자라나길 바랐다. 


        신 혹은 자연에게 감사한 건 실제로 네가 그렇게 컸다는 사실이다. 사춘기에 접어들기 전에 넌 엄마랑 미누처럼 환하고 밝은 웃음의 소유자였다. 뉴저지 매디슨 초등학교에서 난생처음 배운 영어로 아이들에게 다가가 말했을 때, "어, 넌 이상한 아이야. 넌 말하는 게 이상해."라는 말을 듣고 주눅은 들었지만 배우기 시작한 영어를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다. 대저택에서 태어난 친구가 엄마, 아빠가 국제학생으로 공부하며 너와 함께 살았던 학교 가족 기숙사에 놀러 온 후 다른 친구들에게 "지누는 집 하나 없는 떠돌이야."라고 놀렸을 때 화장실로 달려가 펑펑 울었지만 넌 학교 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뉴저지 주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힌 매디슨에서 태어나 자란 넌 엄마랑 아빠에게 묻지도 않고 귀천의 기준이 돈과 사회적 지위라는 걸 알아냈다. 매디슨 불스 Bulls 축구단에서 9년 동안 축구하면서 엄마랑 아빠에게 말하지 않았던 가난한 아이는 놀림감으로 삼아도 된다는 몹쓸 선입견과 편견에 번번이 흔들렸지만 단 한 번도 축구 연습을 거르지 않았다. 얼마 전 엄마가 너에게 왜 그랬냐고 물었을 때, 네가 한 말을 넌 기억하느냐? 네가 대답했다.

"가기 싫을 때가 참 많았지만, 내가 시작했으니까 내가 끝내야 한다고 매번 나 자신에게 말했어요."

        네가 미국에 사는 한 인종차별이란 단어는 항상 내 머릿속에 머물 거다. 인종차별은 관념적 개념이지만 그 이전에 생물학적 개념이다. 생긴 게 다르고, 먹는 게 다른 건 관념적 개념 이전에 존재하는 생물학적 존재다. 개는 개끼리 놀지, 개가 늑대랑 놀지는 않거든. 오해는 하지 말거라. 개가 한국인이고 늑대가 미국인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다름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란 다르니까 같이 있고 싶지 않아라는 자연적 반응보다 훨씬 더 고된 노력을 요구한다. 식민지라는 제국주의의 산물이 역사에서 발생한 후 다른 인종을 대하는 태도는 두 가지로 쉽고 간결하게 나누어졌다. 나보다 위. 나보다 아래. 그래. 넌 똘똘하니까 아빠가 하려는 말을 이해했으리라 생각한다. 나보다 위. 나보다 아래. 이 두 가지 구별법은 인종차별이 개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훨씬 이전, 인류가 생각하는 능력을 소유했을 때부터 사용되어왔다. 


        지금까지 널 힘들게 한 개념이 다른 이가 너에게 말한 '나보다 아래'라면 넌 그들에게 네가 그들보다 위에 있음을 알려주면 된다. 위스콘신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심혈을 기울이는 공부에 소홀해지지 말거라. 축구를 사랑하고 잘하고 싶은 마음 또한 소중하게 잘 간직하거라. 하지만, '나보다 아래'라는 개념을 '나보다 위'라는 개념과 맞바꾸려고 노력하지는 말거라. 위도 아래도 아닌 새로운 개념을 만들거라. 그건 누구의 아래에도, 누구의 위에도 거하지 않는 이지누가 되는 거다. 그래서 오늘 오전 9시 59분에 아빠는 네게 문자를 한 통 보냈다. 


지누, 밀림의 왕, 사자는 토끼가 눈앞에서 까불 때 괘념치 않는다. 
늑대가 알짱거려도 일단 내버려 둔다.
내버려 둠은 피함이 아니라 불필요한 일에 소중한 힘과 마음을 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자가 되거라.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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