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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 강물처럼 Apr 09. 2023

2023년 1월 9일

마흔세 살이 되던 날

빠른 팔공. 내가 태어난 년도 앞에 붙은 "빠른"이란 형용사는 나이는 한 살 어리지만 초등학교에 7살에 입학했다는 걸 뜻한다. 빠른 팔공인 내가 학교에서 만난 친구 대부분은 79년생이었다. 9일 차이로 79년생이 되지 못했음이 억울하지는 않았지만 자기소개를 할 때 내가 태어난 년도를 말하면 '어, 이 녀석 봐라. 나보다 한 살 나이가 어리잖아.'라는 주변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그런 것에 끄떡하지 않는 날 과장해서 보여줘야 할 필요를 느꼈다. 한 순간 움찔하면 같은 학교에서 같은 걸 배우지만 영원히 동생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 서른에 하고 싶은 바를 정하지 못했고, 나이 마흔을 넘어섰지만 갈대처럼 사정없이 흔들리는 내 마음을 발견할 때면 공자 할아버지의 위대함과 이에 반비례하는 나, 칼을 손에 쥐고 있지만 여전히 무엇을 어떻게 썰아야 할지를 놓고 번뇌하는 우유부단한 나와 마주친다. 삶을 마감하기 전에는 철드는 게 무엇인지 한 번쯤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까? 내 속에 존재하는 너무 많은 나를 어떻게 화해하고 통합하여 하나로 만들 수 있을까? 현대 과학은 이제 '자기 self'라는 개념은 개념일 뿐임을 발견했다. '자기'란 나를 나로 규정하는 의식 습관의 산물이자 신기루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난 칼 구스타브 융 C. G. Jung이 한평생 연구 과제로 삼았던 개성화/개인화 individuation란 연구 과제가 마음에 든다.


"인생, 백세 시대"라는 말을 어린이 같은 들뜬 심정으로 받아들일 때, 난 아직 중간 지점에도 미치지 못했다.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다. 그런데, 어제까지 건강하게 살아있던 내 또래의 한 인간이 소리소문도 없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세상이고 이를 인정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게 삶이라고 생각하면 역시나 "인생, 백세 시대"라는 과학/수학적 개념에 의존하여 꾸며 만든 신기루 같은 개념일 뿐이다. 장수가 하늘이 내린 복이라고 믿었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다. 장수는 인간이 반드시 이루어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성취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2007년 미국 땅에 마음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돈을 좇아 정처 없이 떠돌며 일할 때, 6년 간 양계장의 닭처럼 갇혀 하루에 10-12시간까지 일했던 세탁소에서 만났던 성수 형이 어느 날 뜬금없이 건넨 질문이 생각난다. 

"야, 넌 가늘고 긴 인생과 굵고 짧은 인생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뭘 선택할래?"

답을 찾는 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굵고 짧은 인생이 멋있어 보이긴 하지만 돌봐야 할 처와 아들이 있으니까 전 가늘고 긴 인생으로 갈래요."


돌봐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던 두 아들은 이제 고등학생과 중학생이 되어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판단하여, 비판하고 비난해야 할 순간이다 싶으면 여지없이 날카로운 뼈가 담긴 말로 응수한다. 두 아들은 이제 돌봐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대상으로 변하고 있다. 권위 있는 아버지로서 날 대하지 못하셨던 아버지의 뒷모습에 스산하게 고인 그늘이 싫었기에 난 두 아들에게 엄격한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이제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 못난 아빠를, 가끔은 녀석들보다 더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녀석들에게 화를 내는 아빠를 여전히 아빠로 받아들여 사랑하고 존경해 주는 아이들. 처에 관해서는 그리 할 말이 많지 않다. 내가 가지지 못한 선함과 인자함, 넉넉함과 쾌활함만 보더라도 난 변함없이 그녀를 존중한다. 내가 내 어머니에게서 경험하지 못한 모성애를 대신 채워주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 온 아내는 아내라는 단어의 뜻 그대로 '내 안에 깃든 해'다. 이 세 사람과 함께 인생이란 길을 투벅투벅 걸어갈 수 있어서 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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