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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길 colour Jun 01. 2021

Here  And  Now

2021. 05. 31. 월











가볍게 나선 마실길이었다.

집 앞 가게를 나서는 마음으로 슬리퍼를 장착하고

어슬렁거리는 발걸음을 들어 올렸다.


도깨비불에 홀렸는지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한 바람이 귓가를 스쳤고,

함께 걷는 이는 유독 말이 없었다.


바다를 향해 내려가는 비탈길을 가볍게 걸어내려가며,

낯선 장소를 여행하는 듯한 감흥이 일렁였다.

목적 없이 나선 길에 무엇도 기대할 것이 없는 마음은 가벼웠고,

그렇게 내리 1시간 이상을 걸었다.

어제도 내일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고,

걷는 걸음과 오감으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했다.


돌아가야 할 것에 대한 걱정 역시 내려놓았다.

쉬엄쉬엄 걷는 길이라 그리 멀리 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가는 길 곳곳에 펼쳐진 낮은 지붕과 옛집의 정취가 느껴지는 풍경을 힐끔거리며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고

정겨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저, 하릴없이 나선 산책길에서 뜻밖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겼다.


느긋하게 왔던 길을 거슬러가지 않고

둘레를 천천히 돌아 다른 길로 나왔다.

발을 조이지 않는 슬리퍼가 오히려 불편해질 즈음에는

목을 축이기 위해 버스정류장에 걸터앉았다.


이르지 않은 시간 주위 풍경을 살피다

하늘 끝까지 솟아 끝이 없을 것 같은 하얀 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정류장 인근에 들어서는 개발 구간을 둘러싸고 있는 벽이었다.

평상 시라면 흉물스러웠을 듯한 백색의 벽에

영사기를 들이대듯 내 감흥을 투영시켰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감정들이 일제히 선명해지고

직관적으로 최근의 나에게 필요한 것 하나를 뽑아 들었다.


'Here And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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