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존된 형식이 주는 안정감
* 영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1993년, 대학생이 된 주인공 노리코는 자신이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정작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노리코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고, 그녀의 집에는 사촌 미치코가 종종 놀러 오곤 했습니다.
노리코는 진지하고 까다로운 성격이었지만, 끈기나 섬세함은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반대로 시골에서 올라와 도쿄에 홀로 살고 있던 미치코는 사람들의 의견을 잘 따르면서도, 자신의 생각은 언제나 당당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노리코의 부모님은 두 사람에게 다도를 배워보는 것을 권하셨습니다. 미치코는 평소처럼 시원하게 “해보고 싶다”고 말했고, 노리코는 주위 분위기에 휩쓸려 마지못해 해보겠다고 답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스무 살 봄, 다도와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굽이굽이 이어진 골목 끝에서 마주한 고즈넉한 옛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단정한 기모노 차림의 다케다 선생님이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여덟 장의 다다미가 깔린 다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정원의 차경, 그리고 한쪽 구석에 가지런히 놓인 다구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케다 선생님은 첫 수업인 만큼 직접 차를 내어주셨습니다. 노리코와 미치코는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렀기에, 선생님이 설명해주시는 다과와 차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만 제대로 먹고 마실 수 있었습니다.
차를 마시기 전에 다과를 먼저 먹어야 한다는 것, 다 먹을 즈음에는 소리를 내어 알려야 한다는 것, 모든 과정에 정해진 형식이 있다는 것. 다도의 이러한 형식 앞에서 두 사람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는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어쩌면 조금은 이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노리코와 미치코는 서투르게 다도를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직 젊었고, 쉽게 형식에 물들기에는 당찼습니다.
이후 미치코는 프랑스와 영국으로 여행을 떠나며 한동안 다도를 쉬게 되었습니다. 미치코도 없는 상황에서 혼자 수업을 받기 싫었던 노리코는 망설였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다시 마지못해 수업에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어색하고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던 순서들이 어느새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노리코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고 순조롭게 차를 내었고, 그 안에서 작은 성취를 맛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가 해낸 것은 수많은 다도 형식 가운데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다음 수업에서 또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그 어려움은 취업 문제와도 이어졌습니다. 노리코는 출판사에 취직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관심 없는 일을 하며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미치코에게는 노리코와는 다른 생각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분명한 동기는 알 수 없었지만, 미치코는 회사원이 되어 사회생활을 해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흘렀습니다. 노리코는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미치코는 무역회사에 취직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제 다도 수업이 조금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서툰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수업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난 뒤, 노리코와 미치코는 큰 역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미치코는 회사원 생활을 직접 경험해보았지만 만족하지 못했고, 결국 결혼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노리코는 출판사의 정규직 채용에 지원하며 여전히 자신의 꿈을 좇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미치코는 결혼했고, 노리코는 다시 다실로 향했습니다.
다실에는 이제 처음 다도를 배우는 사람들도 함께 있었지만, 노리코에게는 여전히 미숙함이 남아 있었습니다. 취업에도 실패했고, 약혼을 결심했던 연인과도 헤어졌으며, 직업으로서도 사랑으로서도, 다도로서도 자신이 더 나아지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결국 노리코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고, 그렇게 석 달이 흘렀습니다. 좀처럼 방에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던 어느 날 아침, 그녀는 마침내 결심한 듯 방에서 나왔습니다. 기모노를 입고 다시 다실로 향했습니다.
다실에서 다과를 먹던 중, 다케다 선생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한 조언을 건네셨습니다.
“언제든 그만두셔도 됩니다. 그저 맛있는 차를 마시러 오신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얼어붙은 겨울이 지나 봄이 오듯, 노리코는 다시 사랑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서른셋이 되었을 때, 마침내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게 됩니다. 전철로 30분 정도 걸리는, 아주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다도 수업을 들으러 간 노리코에게 다케다 선생님은 센노 리큐의 일기일회를 인용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평생 단 한 번뿐이라는 마음으로 대하셔야 합니다.”
독립한 뒤 노리코의 삶은 부모님과 함께 식사 한 끼를 나눌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을 만큼 바쁘게 흘러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전화 한 통을 받게 됩니다.
" 노리코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
벚꽃이 만개한 계절은 그녀에게 슬픈 기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비가 오면 빗소리를 듣고, 눈이 오면 눈을 바라보며, 여름에는 더위를, 겨울에는 추위를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처럼, 상황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일. 그것이야말로 ‘일일시호일’이 아닐까 하는 깨달음 속에서 노리코는 번뇌로부터 조금씩 해방되는 감각을 느끼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2018년, 다케다 선생님은 노리코에게 차를 가르쳐보라고 권하셨습니다. 가르침을 통해 또 다른 배움을 경험해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노리코는 다시 한번 새로운 배움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모리 타츠키 감독, 모리시타 노리코 에세이 원작 영화
영화 [일일시호일]은 도파민과는 상당히 먼 영화입니다.
느린 호흡과 템포로 이어지는 이 영화는
다도의 모습을 형식과 전통을 중심으로 다루며
어찌 보면 답답한 감정까지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사회적 흐름에 휩쓸리며 마음처럼 되지 않고 있어
잠시 속도를 늦추고 숨을 쉬고자 한다면,
오랜 기간 지켜진 다도의 순서를 지켜가며
뭉근하게 끓인 따뜻한 농차를 앞에 두고,
오늘 날씨의 온도와 소리에 귀 기울여 느껴보시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농차 濃茶, Koicha
고품질의 말차 가루(약 4g)를 소량의 뜨거운 물(약 30ml)에 넣어 뻑뻑하고 진하게 갠 일본 전통의 진한 차입니다. 거품을 많이 내는 연한 차인 박차(Usucha)와 달리, 농차는 부드럽고 쌉싸래한 맛과 묵직한 풍미가 특징이며 주로 귀한 손님 접대용이나 다도에서 사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