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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암 Nov 02. 2020

한두 번이 아니었구나?!

어른이 되고 처음 읽어 본 그림책

지난 주말 아내의 산부인과 진료차 부산에 방문했을 때 처가에 들렀다. 고맙게도 처남이 아내가 슬쩍(?) 부탁한 그림책 두 권을 사다 주었는데, 아내 말로는 요즘 인싸 엄마들 사이에서 핫한 그림책으로 통하는 그런 유우명한 책이라 한다. 오랜 세월의 풍파와 워낙 무덤덤한 우리 집 가풍 탓에 동심과 섬세함이 다 말라버린 나로선 어떤 면이 인싸와 아싸를 결정하는 그림책의 요소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아내가 아기도 태어나지 않은 지금 이 시점에 그림책을 갖고 싶다고 처남에게 슬쩍(?) 말한 이유는 이제 슬슬 태교를 위해 아빠의 그림책 읽어주기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가온 바로 다음 월요일이 뱃속의 아기를 위해 처음 그림책을 읽어 주는 날이 되었다. 아무리 아기가 뱃속에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침대 위에 아내와 나, 다 큰 어른 둘이 비스듬히 누워서 그림책을 펴고 있자니 괜스레 뭔가 어색했다. 낯간지럽달까. 그래도 평소 그림책 읽어주는 것이 무엇이 어렵냐고, 재미있는 목소리로 바꿔가며 적당히 하이텐션으로 읽어 주면 되는 거지 하며 큰소리쳤던 이력이 있었기에 자신 있게 책을 폈다. 

 "큼큼. 에헴." 

목소리를 가다듬고 아내의 옆에서 이야기의 화자인 엄마와 아이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책은 간단하게 한 장에 한 문장씩 적혀있었고, 그에 맞는 삽화가 크게 배경으로 들어가 있었다. 맨 처음 아이가 "비는 왜 오는 거야?"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엄마가 그에 대한 해답을 아이 눈높이에 맞게 내어주는 내용이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유치원에서 하원 하는 엄마와 아이의 여정이 그림으로 이어지고, 대화는 실제 아이들이 그러하듯 질문에 대한 어른의 대답과 그에 또다시 '그건 왜 그런 거야?' 하고 이유를 물어보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아이들이 보는 그립 책답게 낭독(?)하는 것이 어려울 건 없었지만, 워낙 책을 소리 내서 읽어본 지가 오래되어 어색하게 느껴지긴 했다. 특히 다른 목소리를 흉내 내니 더욱 그랬다. 이리저리 목소리를 바꿔가며 낭독을 마쳤고 첫 공연으로 훌륭했다는 자화자찬을 하고 있는 차에 아내는 그림에 대한 설명이랑 삽화 속 의성어 의태어도 모두 모두 다 읽어주면서 더 재미있게 해 줘야지! 하는 아이 눈높이를 고려한 따끔한 감상 후기를 남겼다. 쇠뿔도 단김에 뽑아라 했던가, 바로 앙코르 공연을 시작했다. 피드백을 적극 수용하여 삽화 속 인물의 행동을 따라 하고, 의성어든 의태어든 하나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읽어갔다. 마지막 남은 열정까지 하얗게 불태우고 책을 덮는 순간, "또 읽어줘" 하는 아내의 말. 아내의 귀여운 장난이었지만, 과연 내 아이가 또 읽어 달라고 했을 때 세 번, 네 번 또 읽어 줄 수 있을까? 하며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게 뭐가 어렵나 하고 무심하게 생각했는데, 나의 오만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바야흐로 미디어의 대홍수 시대인 지금과 달리 가정용 비디오테이프나 티브이, 동화책 말고는 아동용 콘텐츠를 접하기 어려웠던 나의 어린 시절. 나는 유난히 옛날이야기 듣는 걸 좋아하고, 그래서 누군가가 동화책을 읽어주는 걸 몹시 사랑했던 아이였다. 

하루는 엄마가 설거지를 하던 중 단칸방 한편에서 내가 혹부리 영감 이야기를 소리 내어 읽는 걸 듣었다고 한다. 이제 막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내가 벽에 기대앉아 혹부리 영감 동화책을 들고 있더랬다. 한글을 가르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동화책을 들고 줄줄 읽는 모습에 접시를 닦으며 그 짧은 순간, 천재 아들에게 어떤 교육을 해줘야 할지 설레었다고 했는데, 20대 후반의 엄마가 허둥지둥 설거지를 마치는 모습을 상상하니 조금 재미있다. 설거지를 서둘러 마친 엄마는 재빨리 내 곁으로 다가와 살펴보니, 책은 거꾸로 들려있었고, 읊고 있는 내용과 문장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동화책 속 삽화를 보면서 그 장면에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던 거였다. 워낙 여러 번 반복해서 들은 내용이라 다 외워버린 거다.

지금은 당시 엄마, 아빠가 나에게 얼마나 많이 책을 읽어줬는지, 어떤 방식으로 목소리를 바꿔가며 읽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 마지막 기억 속 나의 최애 동화책 혹부리 영감은 겉표지 마감이 다 떨어져 너덜너덜하게 낡아 있었다. 그때의 그 단칸방에서 엄마와 아빠는 도대체 얼마나 많이 나에게 그 이야기를 반복해 읽어줬을까? 나도 그런 큰 사랑을 나 아닌 다른 존재에게 줄 수 있을까? 나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일까?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고, 커서가 깜빡이는 모니터가 점점 촉촉하게 차오르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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