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왕언니들 바람났다

#팔색조를 아시나요?

by 이마리 정환

70 넘은 할머니들이 바람났다. 그것도 한국이 아닌 호주에서.

"깜놀이라고요?"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이 몸이니 책임을 지라고요?"

벌써 5회째니 북 치고 장구 쳤으니 그저 지켜볼 수밖에요.

호주는 목하 찜통 삼복더위. 어제 앵커가 이런 날씨를 스티미(steamy) 웨더라 표현했다. 말 그대로 32도인데 체감온도 37도로 찜통더위가 이런 더위 아닐까. 사막에서 불어오는 열풍 때문에 문이란 문은 꼭꼭 닫아걸고 바깥 활동 일체 사절. 호주에는 무조건 방콕 해야 하는 무시무시한 날들이 여름에 며칠씩 있다. 그런데 올해엔 그 열풍이 산불 대신 무더운 수증기와 오미크론을 모시고 온 거다. "조심해. 우리 대접 잘해야지. 너희들 꼼짝없이 죽는다."라고 스티미 웨더가 속삭였다.

마침 나는 장편 600매를 탈고한 후였다. 그간 부족한 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맥이 빠져 마당만 뱅뱅 맴돌았다. 그러다 덥석 주저앉아 담장 옆에 제멋대로 자란 잔디를 박박 뜯어냈다. 숨이 턱 막혔다. 삽시간에 온몸이 땀으로 목욕했다.

몸을 식힐 겸 호스를 틀어 얼굴에 뿌리고 비쩍 마른 상추에 물도 주어보고 상추 깻잎을 한 소쿠리 뜯어도 보았다. 박경리 선생처럼 고추를 가꾸어보겠다고 심었던 고추도 대여섯 개 땄다. 꿈도 야무지지.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이 허전함. 탈고한 후의 이런 멍 때리는 기분 아실지 모르겠다.

뭔가 나를 감동시키는 일거리를 찾아야만 하는 시간이다. 두어 달 컴에 짱 박혀 글쓰기에 집착할 때는 탈고 후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이 엄청 많다. 맨 먼저 할 일. 남편이 해주던 식사에서 탈피해 악녀의 홈메이드 음식 맛 보이기. 떫은 와인 한 잔의 즐거움도 빠질 순 없지. 그러나 이번엔 음식이고 뭐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장편 완성에 다른 때보다 더 열을 쏟아서인가. 그렇다고 해서 더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는 비정함도 이미 숙지했건만.

얼마나 괜찮은 작품으로 탄생할지는 이제 독자의 몫이다. 이제 내 손을 떠났으니 신경 끄자면서도 탈고한 원고를 뒤적거린다. 집안으로 들어와 다음 작품을 위해 다시 책을 뒤적인다. 책은 읽히지 않는다.

그러다 독서그룹에서 빌린 책에 손이 갔고 문득 여덟 부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은 이민 온 지 20,30여 년씩 되니 호주에 체류하게 된 지 몇 년 안 된 나에 비해 엄청난 고수들이다. 나이로도 내가 제일 막내니까. 8인의 70대 부인들의 어마어마한 독서량에 소인이 그저 탄복했던 기억이 새롭다.

코로나로 거의 1년간 오프라인 모임이 없었지만 그들은 온라인으로 정보를 교류하고 독후감도 올리곤 했다. 독후감은 마음 내키는 대로 올리고 전혀 강제성이나 의무감도 없었다. 나처럼 얽매이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딱 안성맞춤인 자유로운 영혼들의 연대였다. 영어권 나라에서 반평생을 살며 한글 책을 필사적으로 읽어대는 그분들의 정열에는 지금도 가슴이 숙연해진다. 나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글을 써왔지만 그분들은 컴에 아래한글도 안 깔아져 한글 글쓰기와 수십 년 동안 멀어진 분들이다. 겨우 카톡 정도나 간단한 감상만 톡으로 교류하면서도 계속해서 한글 책 읽기를 운명처럼 여기며 살아온 그들이었다. 이민자의 외로움을 한국 책 읽기로 승화시켜온 이민 1세대. 그들의 치열한 한글사랑에 나도 덩달아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들의 독후감 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우리 글쓰기 한 번 해보실래요?"

"전 호주에 온 지 30년 동안 글쓰기 같은 건 모르는데..."

"독후감 쓰시는 능력으로 능히 하실 수 있어요. 제가 그 능력을 보았거든요?"

이분들의 감성과 지성을 끌어내 글쓰기 방을 만드는 데 일단 성공했다. 호기심 반 열정 반으로 시작한 8인이 한 달에 한 편씩 글 내고 합평 시간을 가진 게 어언 5회째다.

그들 중 두어 분은 글을 써오신 분이고 몇 분은 평생 글을 쓰지 않았다며 수줍게 고백했다. 컴퓨터 한글 워드도 첨 접해보시는 분도 있었기에 처음에는 글을 모으는 게 막막했다. 일단 이메일로 글을 주고받게 하고 아래한글 없으니(외국 컴퓨터는 거의 워드만 설치. 아래한글은 별로 사용하지 않는 추세) 워드로 글을 쓰도록 했다.

맨 처음 작품의 주제는 손주 이야기였다. 본인에게 제일 잘 맞는 글 소재를 잡으라 했거늘. 역시나 손자 손녀 이야기로 신이 난 8인방. 다음 주제는 음식, 두 나라 간의 문화의 차이, 내 삶은 현재 진행형 등 다양한 주제였다. 삶을 찬미하고 나이 들어가는 아름다움을 당당히 노래하는 그들의 숨은 열정은 내 마음에 불을 질렀다. 그들의 인생이 글이 되더니 봇물 터지듯 콸콸 쏟아져 내렸다. 동면해 있던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나둘씩 빨랫줄에 걸기 시작했다. 쨍한 호주 햇살 아래 그것들이 속살거리며 보송보송 말라가고 있다. 눈부시게 빛나면서.

호떡집처럼 <수필 대작전> 단톡방이 불난 김에 옷장 속 묵은 옷들을 다 꺼내 거풍 시키면 좋겠다. 내 마음대로 지은 단톡방 이름이라 미안하지만 모두 그 이름을 애용하니 작명자인 나는 그저 행복하다. 온라인 글쓰기가 힘든 세대이긴 하지만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과 자세에 가슴이 애틋하고 뭉클하다. 그건 갓 시작한 소녀의 첫사랑 같아서다. 우리 글을 사랑한 그들의 정열에 기꺼이 조용한 안내자가 되고 싶다.

미술가, 패셔니스타, 독서광, 셰프, 수놓는 농부 , 전직 간호학 교수, 손자 돌봄이 영문학도 등이 한 맘이 되어 글쓰기에 돌입했으니 그저 기대하시라. 지금 반짝이는 눈동자와 갓 글쓰기 입문한 문학소녀의 콩닥거리는 가슴 떨림이 간간이 들리는 듯하다. 5회째를 부지런히 써놓고 합평 날을 기다릴 예쁜 할머니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이제 글만 봐도 누구 글인지 알아차릴 수 있으니 그들의 개성을 엿보는 것 또한 은밀한 즐거움이다. 그들의 일취월장 글쓰기가 내 것인 양 의기양양해진다. 그들의 부산한 속삭임이 들려온다.

"호주에서 이 나이에 글쓰기의 기쁨을 발견하다니 제2의 생을 사는 듯해요."

"평생 이민자로 살면서 느낀 기쁨과 슬픔을 나도 쓸 수 있다니. 그것도 우리 한글로요."

"내 인생의 반전이 이 늘그막에 이루어졌어요!"

나는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함이 넘쳐난다.

"고마워요. 한글을 사랑하고 아껴주셔서요."

같은 언어와 같은 문화를 공유한 진한 향수 같은 게 떠도는 왕언니들 수필 방이 참 좋다.

멍 때리던 나는 수필 방 생각에 불쑥 힘이 솟는다. 산속을 걷다가 지쳐 있을 때 바위틈에서 솟는 생명수를 만난 듯 생기 덩어리가 된다. 손우물 만들어 너도 먹고 나도 먹고 천리는 더 걸을 듯 날아가듯 발걸음이 가볍다.

언젠가 영상으로 만난 예쁘고 어린 새의 날갯짓이 떠오른다. 오묘하고 선명한 8색을 지닌 작은 새 팔색조. 나는 날기를 배우는 팔색조의 맨 꽁지에 달린 작은 깃털일 테지만 그래도 좋다. 멋진 8인방의 막내이니까. 그들은 글 쓰는데 서로 욕심을 부리면서도 위로하고 격려하며 팔색조의 한 깃털씩을 차지하고 있거든. 대륙을 가로질러 태평양을 횡단할 꿈을 꾸며 조금씩 나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아. 팔색조가 닿는 곳은 어디일까.

"시드니 왕언니들 글 바람났다!"

손 나발을 만들어 시드니 파란 하늘에 외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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