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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에 홀리다 Jul 08. 2018

미국의 비경, 벅스킨 걸치 2

협곡을 걷는 사람들


"별이 빛나는 밤에"


드디어 아침이 밝았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해는 동쪽에서 떠 올랐고, 하늘은 맑고 푸르다.


'아, 별 일 없이 하루가 시작되었구나.'


안심도 잠시, 마음이 분주해졌다. 출발 시간은 오후 4시지만, 오전에 일정이 있으니 집에서는 아침에 나서야 한다.  어제 대충 챙겨놓은 짐을 다시 정리하고 빠진 것 없나 점검하고, 부지런히 집을 나섰다. 바삐 오전 일정을 마치고 나니 어느덧 오후 네 시가 가까워오고, 한 사람 두 사람 약속 장소로 모이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얼굴도 있고 아는 얼굴도 있고 잘 아는 얼굴도 있고, 알든 모르든 함께 고생을 하고 나면 모두 잘 아는 사이가 될 테니 처음 만나서 데면데면 해도 상관은 없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오고 확인한 시간이 5시가 다 되었다.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었으니, 다들 서두르는 눈치다. 처음엔 10명이 두 대에 나눠 타고 가려고 했지만, 장거리인 데다 밤샘 운전 후 쉬지도 못하고 장거리 트레일을 해야 하는 고된 일정이다 보니 팀원의 부인들이 나섰다.


"진짜, 들어갔다 아무도 안 나올 겁니까?"


그 한 마디에 우리는 두 말 않고 차를 한 대 더 배정해서 가는 동안 돌아가며 운전을 하기로 했다.

            

날이 어두워져 세상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갈 무렵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해서 늦은 저녁을 먹으며 팀원들 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트레일에 참여하는 여섯 명의 면면을 살펴보니 이런 어려운 트레일에 참여할 만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넷은 마라톤 동호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풀 코스를 완주한 경력이 꽤 여러 번이고, 거기다 그 넷 가운데 한 사람은 지난해 한번 다녀왔고, 두 사람은 산악 마라톤 완주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또 한 사람은 마라톤은 하지 않지만 매주 등산을 하는 데다 '존 뮤어 트레일'을 다녀왔고, '까미노 데 산티아고' 도보 순례에다 지난해 벅스킨 걸치를 한번 다녀온 사람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혹시 대열에서 떨어지지는 않을까, 다른 사람에게 짐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가 앞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으니 결과야 어떻게 나오든 부딪혀보는 수밖에...


밤샘 운전은 겉으로는 아닌 척 하지만, 실제로는 많이 피곤한 일이다. 아무리 운전을 좋아하고 잘한다고 해도 거기다 중간중간 충분한 휴식을 취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만큼 잠을 자지 않고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며, 신체 대사의 주기를 바꾸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 밤샘 운전을 하고 목적지인 '와이어 패스 트레일 헤드'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네 시, 아직 주변은 칠흑이고 하늘엔 휘영청 달이 밝았다. 지난 1기 팀(지난해 다녀온 사람들을 이렇게 부르기로 했었다... 잊었었네)이 이와 비슷한 시기에 도착해 별 사진을 찍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별 사진을 찍기는 어려워졌다. 저렇게 철없는 달이 휘영청이니 별이 보이기나 할까? 어쨌거나 터덜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타고 들어와 보니 우리 말고도 이미 서너 대의 차가 더 들어와 있었다. 물론 그들이 벅스킨 걸치를 목적으로 온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트레일 헤드에서 벅스킨 걸치 말고 또 하나, 바로 그 유명한 '더 웨이브 트레일(The Wave Trail)이 출발하기 때문이다.

▲ 우리 말고도 몇 대의 차량이 더 보였지만, 사람은 보이질 않아 그들이 어디로 간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아, 좋구나!"


좀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다른 일행이 올 때까지 눈 좀 붙일까 싶어 차에 잠시 누웠다. 밤을 도와 달려왔으니 몸이 고단한 것은 당연한 일, 금세 잠들기를 바랐는데 무심하게도 밝은 달이 눈을 간질여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기대가 커지고 마음이 싱숭생숭해도 꿋꿋하게 한 이십여분 누워있자니 밖이 시끌벅적하다. 실눈 뜨고 내다보니 다른 팀원들이 모두 도착했다. 각자 맡은 대로 테이블을 펴고 불을 피우고 찬거리를 준비한다. 한동안 북적대더니 드니어 뜨끈한 국물이 완성되고 점심 도시락이 지급됐다. 도시락의 주된 메뉴는 주먹밥 몇 덩이, 그리고 삶은 달걀과 알록달록 파프리카 등 푸짐하게 담겼다. 뒷정리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맡기고 드디어 출정할 시간이 왔다. 트레일 헤드를 알리는 안내판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드디어 장도에 올랐다. 이제 출발하면 죽으나 사나 앞으로만 나가야 한다. 뒤로 돌아설 수도 없다. 혹시 마음이 바뀌어 돌아선다한들 이동수단도 없다. 차량은 이미 차량팀이 가지고 떠난 뒤고, 전화는 터지질 않는다. 그러니 마음 한 구석은 비장으로 가득하고, 다른 구석엔 기대감으로 가득 채운 채 어정쩡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 떨어지는 별들 사이로 푸르스름한 아침이 오고, 출발하기 전 입장료(1인당 $6)를 내고 방명록에 서명한 뒤 포즈를 잡았다.


아직 어스름 달빛이 길을 비추는 길엔 먼발치에서 푸르스름한 아침이 오고 있었다. 계절이란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다만 자신들의 속도에 맞출 뿐 너와 나를 가리질 않는다. 비록 잔나무들과 덤불들 뿐인 이 길가에도 어느 구석에서는  꽃이 피고, 봄내음을 피워 올린다. 비가 드물어 바닥은 푸석거리고 먼지가 폴폴 나도 생명은 그들의 방식대로 그곳에서 꿋꿋하다. 발을 내딛는 길은 평탄했다. 저마다 수다를 떨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걸었다. 평범한 등산로 입구를 떠올리게 할 만큼 편안한 길은 바위 사이로 이어지다 너른 평지를 내달리기를 반복하면서 계속됐다. 아직도 해는 어둠을 헤치지 못했는지 희뿌연 하늘은 살랑 거리는 바람과 어울려 상쾌함을 더해준다. 불현듯 여기가 협곡(Slot Canyon)이라는 것을 일깨우기라도 하듯 좁은 바윗길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이내 또 평지와 다름없는 길이 섞바뀌며 처녀 방문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아! 좋은데?"


이 정도라면 어렵지 않겠다 싶었다.

▲ 그저 덤불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사이엔 다양한 모습의 생명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 트레일의 처음엔 이처럼 간간히 좁은 구간도 있지만,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다.

                 

"아직은 걸을 만 해!"


해는 이미 중천, 몸이 조금씩 덥혀지기 시작할 무렵, 트레일은 이제 초반을 지나 본격적인 협곡이 시작되고 있었다. 사실 벅스킨 걸치에는 두 개의 합수머리가 있다. 하나는 이미 말했듯이 파리아 강(Paria River)과 만나는 지점이고, 또 하나는 와이어 패스(Wire Pass)에서 약 1.3 마일쯤 가면 나오는 조금 널찍한 광장으로, 벅스킨 걸치 트레일 헤드 쪽에서 오는 길과 만나는 지점이다.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벅스킨 걸치의 시작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마 벅스킨 걸치 전 구간 가운데 가장 넓은 곳이지 않을까 싶다. 아침나절 햇빛이 직접 들어오지 않아 조금 어둑하고 침침한 곳에서 햇빛이 곧장 떨어지는 널찍한 곳으로 나가는 것은 참 경이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신비롭기까지 한 그 경험, 막혀있던 것이 확 트이는 느낌, 몸은 조금 덥기는 해도 저곳으로 나가면 따스해서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다. 지나온 곳은 이제 가야 할 곳에 비하면 그저 맛보기에 지나지 않았고 할 수 있다.

▲ 말은 맛보기라고 했지만, 어느 구간이라도 있는 그대로 그들의 모습일 뿐 맛보기란 없다.


합수머리를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으로 물웅덩이가 나타났다. 한 번 나타나기 시작한 물웅덩이는 수시로 등장했다. 어떤 웅덩이는 물이라기보다는 그냥 진흙이고, 또 어떤 곳은 진흙이 좀 덜 섞여 그래도 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개중에는 더러 좀 더 물인 웅덩이가 있었는데, 이런 곳을 만나면 진흙이 잔뜩 뭍은 신발을 헹궈내느라 정신없이 발을 흔들어대다 보니 뒤에서 따르는 사람들은 또다시 흙탕물... 그래도 진흙보다는 훨씬 나아 그런대로 발이 깨끗해진다. 그러면 얼마 못가 진흙 구덩이가 나오고 신은 다시 더러워지기를 트레일 내내 계속했다. 그러나 트레일이 중반을 넘어서면서는 이조차도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다.


"발이야 아무러면 어때, 그저 안전하게 걸을 수 있으면 되지."


가끔씩 신 안으로 들어오는 자갈을 빼주기도 하고, 휴식 시간마다 양말을 벗어 맨발을 모래에 비벼 말리기도 하면서 진흙 구덩이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 계곡 안엔 진흙이 널려있다. 잘못하면 넘어질수도 있을 만큼 찰지다.


어쨌든 계곡을 걸으며 물웅덩이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살면서 물에 들어간 것이 처음이 아닌데도 새롭게 느껴진 것은 다 갖춰 입고 신을 신은 상태로 물에 걸어 들어갔다 나온 데 있다. 밖으로 나와 추스르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로 그대로 걸으며 물기가 빠질만하면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하다 보면 마치 어떤 중간지대에 있는 것처럼 물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거기다 진흙탕은 물과는 또 달라 신발끈을 꽉 묶었는데도 벗겨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겨우겨우 빠져나와 한숨을 돌리고는 했다. 처음 몇 번은 진흙이건 물웅덩이건 그저 즐거웠다. 팀원들 모두 서로의 발을 보며 낄낄거리기도 하고,


"한번 굴러봐!"


진흙에서 넘어지면 공짜로 머드팩 하는 거니 한번 넘어지는 것도 괜찮겠다는 둥 농담도 하면서 기껍게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낄낄거리는 일은 중간쯤을 넘어서면서부터 부쩍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헉헉 거리는 숨소리만 들리기 시작한다.

▲ 진흙이 발목을 잡아도 즐겁기만 하다.


항상 좋은 일만 있으면 바랄 게 없겠지만, 사람 일이란 게 어디 그렇던가? 


그렇게 물웅덩이와 진흙탕을 번갈아 건너고 좀 마른 곳에는 모래가 잔뜩 있어 발을 내딛는 것이 더딘 데다가 일부러 균형을 맞추려는 것도 아닌데 때를 맞춰 자갈밭도 등장한다. 게다가 길이 곧게 뻗어있는 것이 아니라 이리 굽었다 저리 휘돌고 갑자기 커다란 바위가 등장하여 오르내리기를 하다 보면, 언덕을 오르거나 등산을 하는 것도 아닌데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하고 숨이 가빠온다. 수시로 물을 꺼내 목을 축여보지만, 그것도 트레일을 마칠 때까지 모자라지 않도록 잘 조절하며 마셔야 하니 벌컥벌컥 마실 수도 없다.  이쯤까지 오니 팀은 자연스럽게 두 패로 나눠졌다. 마라톤을 하는 세명은 씩씩하게 저만치 앞서 나가고, 또 한 명은 맨 뒤에서 처지지 않도록 독려하는 팀장과 나머지 두 명이 한 패를 이뤄 앞 팀을 따라가는 형국이다.


장거리 트레일을 할 때 주의할 일은 지치지 않도록 수시로 쉬면서 물도 마시고, 도시락도 먹으며 열량을 보충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앞으로 나가는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무리해서 그들을 좇아가려고 하게 되면 빨리 지치결국은 낙오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체력을 잘 파악하여 한도를 넘어서지 않도록 스스로 보폭도 조절해주고, 휴식도 취해줘야 한다. 무엇보다 무리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앞서가는 패거리에 들어있을 경우 뒤에 처져 따라오는 사람들을 고려하여 천천히 걸음으로써 배려해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선두와 맨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이 서로를 확인할 수 있거나 연락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 벅스킨 걸치 같은 경우는 첫머리의 합수머리를 제외하고는 곁길이 없으므로 길을 잃을 염려는 없지만, 많은 경우 걷는 동안 많은 갈림길이 나와 방향을 잘 선택해야만 제대로 목적지까지 갈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거나 최악의 경우 길을 잃게 되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으므로 항상 조심해야 한다.

▲ 다양한 조건의 트레일을 걷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다리가 뻐근해지고, 숨이 가빠오는 경우가 있다.



양 옆은 까마득히 높은 바위가 우뚝 솟아있고, 길은 좁아 그저 몇 사람 비껴갈 정도밖에 되질 않는 길을 몇 시간 동안 걷다 보니 문득 드는 생각이다.


"저 바위 위는 어떻게 생겼을까?"


분명 입구를 지날 때만 해도 그저 평지였던 곳인데 어느 순간 높은 바위가 등장하면서 길이 협곡으로 바뀌어 있었다. 주변의 풍경과 길의 상태에 신경을 쓰다 보니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그 깎아지른 바위 사이에 있는 틈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바위의 모양과 무늬와 빛깔, 가끔씩 바위를 뚫고 들어오는 햇살로 빚어내는 사암들의 현란한 빛잔치에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조차 없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바닥을 보면 물웅덩이가 보이고, 그 탁한 물을 거울삼아 바깥세상, 깎아지는 바위 사이를 뚫고 뻗어내려 오는 쪽빛 하늘,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사암들의 행렬들이 마치 어둠 속으로 비처들어오는 천국의 모습인양 반짝이고 있다. 그 언뜻언뜻 보이는 바깥세상의 편린들을 근거로 그들의 모습을 유추해내는 것은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저 드는 생각, 아니면 기대는 '아마도 평지일 거야'라는 정도다.  

▲ 물은 탁하지만 반사된 면을 보면 마치 거울처럼 맑고 깨끗한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몇 시간을 걸었지만 아직 날거나 기어 다니는 것을 전혀 보질 못했고, 움직이는 동물을 관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런 곳에도 벌레나 짐승이 살 수 있을까?"


두세 가지 근거로 여기에도 동물은 아니지만, 적어도 곤충은 있을 거라는 판단을 해본다. 지나오면서 죽은 새의 사체를 지나쳤는데  이것은 여기서 사는 새라기보다는 저 위쪽에서 떨어졌다고 보는 게 맞다. 여기서 돌아다니는 새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좀 전에 지나온 깎아지른 바위 위쪽에 천정처럼 생긴 부분에 정확히 어떤 곤충인지는 모르겠지만 곤충의 집이 있었고, 어떤 물 웅덩이에  번식하고 있는 곤충 애벌레를 보았는데, 이를 근거로 여기에 최소한 한 두 종류의 곤충은 살고 있을 것으로 판단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눈으로 곤충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니, 어떤 벌레가 살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떤 험한 조건에서도 그 환경에 적응한 생명은 있게 마련인가 보다. 듣기로는 빛이 거의 닿지 않는 깊은 바다에서도 살아가는 생명체가 있고, 펄펄 끓는 온천수에서도 살아가는 생명체가 있단다.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해 보았지만,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들은 이곳에도 부지기수로 많지 않을까 싶다. 생명의 신비와 존엄함을 단지 인간의 눈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 왼쪽이 벌레 집, 오른쪽이 애벌래들이 번식한 물웅덩이다. 그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그들의 먹이가 있다는 말이 된다.


"식물들은 어떨까?"


생명체란 물론 움직이는 것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햇빛이 들어오는 곳엔 어김없이 나무나 풀들이 자라고 있다. 여기저기 꽤 많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가만히 살피면 이 식물들도 바깥세상에 사는 식물들처럼 평범한 여건에서 자라기도 하지만, 대체로 어려운 조건을 극복하고 푸르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식물은 바위틈으로 흘러나오는 축축한 물기를 따라 번식하고 있었는데, 가까이서 볼 수 없어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도 이끼나 지의류(Lichen)일 것이다. 이들은 약간의 습기만 있어도 살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바싹 마른 상태에서도 몇 년을 견디다 습기에 노출되면 다시 생명활동을 재개하기도 한다. 사람이나 다른 동물들에 비하면 얼마나 질기굳은 생명력인지 모르겠다.

▲ 바위 중간 쯤에서 배어나오는 습기를 바탕으로 번식하고 있는 푸르른 생명들


"질기굳은 생명력이 그들만의 일일까? "


평소에도 거주지 주변에 서식하는 식물들을 관찰하기를 즐겨하는 편이다. 인간의 끊임없는 방해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이어가는 식물을 볼 수 있다. 관리하기 번거롭거나 보기에 잔디보다 못하거나 하면 제초제를 뿌려 뿌리째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그런다고 그들의 뿌리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물론 좀 더 강력한 제초제를 사용하면 그것도 가능이야 하겠지만, 그 정도까지는 돈을 들이고 싶지 않았는지 늘 그 정도에서 멈추고는 하는데, 제초제를 뿌리고 며칠 지나면 어김없이 푸른 새싹이 돋아난다. 이런 일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비라도 내리면 그들은 마치 우후죽순에 버금가도록 경쟁적으로 몸을 키우고 꽃을 피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런 일이 몇 해를 반복하더니 어느 해 부턴가는 그 식물들의 몸집이 작아지고 키도 작아지고 꽃도 작아졌다. 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그들의 치열한 노력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런 일이 오랜 세월 지속한다면 아마도 그 종은 그 환경에 맞게 진화를 할 것이다.


이러한 생명체들의 치열한 노력의 결과를 여기서도 볼 수 있다. 어떤 나무는 겨우 씨앗 하나 들어앉을 틈 밖에 되질 않는 그 좁은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어떻게든 위로부터 떨어지는 햇살에 노출돼야 하므로 바위 절벽과 직각으로 자라 앞으로 자라고 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자라면 그들은 마치 해바라기처럼 그 햇살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릴 것이다. 얼마나 더 자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들의 생명력이 어디까지 미칠지 오랜 시간 관찰을 하지 못했으니 쉬이 속단할 수는 없겠지만, 좀 널찍하고 흙도 있고 햇빛도 잘 비치는 곳엔 제법 많은 나무들이 파랗게 자라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도 몸집이 꽤 커질 때까지는 자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 어디든 수분이 좀 있는 곳에 떨어진 씨앗은 싹을 틔우고 생명활동을 시작한다.


사방이 어둑어둑한 곳을 걷다 보면 그저 바닥을 내려다보며 걷거나 좌우 살피기에 여념이 없다. 한 번 다녀간 사람들은 감회에 젖어 지난번에 여긴 어땠고, 저긴 저땠는데 이건 여전하네... 등 작년과 비교하는 마음이 생기는 모양이다. 처음 발을 들인 사람들이야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으니 그곳에서 이뤄지는 온갖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현상들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지난번에 나녀온,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앤틸로프 캐니언이 생각났다. 그곳은 현지 직원의 안내에 따라 여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관광을 하게 되어있다. 특히 그들은 앤틸로프 캐니언의 특징을 잘 살려 좁은 협곡 사이로 들어오는 빛들이 굴곡진 사암들 사이에서 어떻게 춤을 추는지, 사진은 노출은 어떻고, 각도는 어떻게 하면 좋다는 둥 조언을 해준다. 어디서 찍으면 사진이 멋있는지도 잘 알고 있으며, 어디에서 하늘을 찍으면 모양이 어떻다는 둥둥 그곳에서만큼은 그들을 따를자가 없어 보였다. 사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벅스킨 걸치도 사암으로 형성된 협곡이기 때문에 그곳의 풍경과 비슷해 보이는 곳이 있기도 하다. 그때 안내원들이 했던 말이 생각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깎아지는 바위들 사이로 언뜻언뜻 파란 하늘이 보이고, 흰구름도 지나다닌다. 하늘이야 변할리 없지만, 여기서 바라보니 그 하늘이 더 파랗게 보이고, 더 신선해 보인다.

▲ 바깥에서 보던 하늘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웅덩이의 정체는?"


물웅덩이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벅스킨 걸치에서 물웅덩이는  '있으면 불편하고 없으니 흥미가 떨어지는' 묘한 존재다. 어느 만큼 가면 한동안 웅덩이가 없는 구간이 있는데, 이곳을 지나면서 느낀 것은 웅덩이를 들어갔다 나오면서 다리의 열이 식기 때문에 조금 불편하지만 오히려 걷는 데는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처음엔 야트막하여서 발목 정도를 적시는 웅덩이가 몇 개 등장하여 쉽사리 지날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굳이 워터 샌들을 신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빛의 양이 줄면서 웅덩이 숫자도 늘고 깊이도 깊어지기 시작한다.  협곡에 있는 물웅덩이다 보니 물도 차갑다. 가장 깊은 곳은 가슴까지 잠겨 그곳을 지나면서는 온몸이 덜덜 떨리기까지 한다.


이 지역에 비가 내리면 주변의 물들이 협곡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 그때 주변에 있는 모래나 진흙이 함께 쓸려 들어오게 된다. 물은 바닥으로 스미고, 햇볕에 날아가 시간이 지나면서 바닥은 물이 마르게 된다. 그러나 바닥이 깊거나 진흙이 많으면 더 이상 바닥으로 스며들지 않고 고여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곳에 물웅덩이가 생겨난 까닭이다. 왜 이 이야기를 하냐 하면 그렇게 웅덩이로 남으려면 좀 시간이 필요하고, 물이 오랫동안 괴어 있다 보면 물이 썩게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그렇다! 이곳에 있는 물웅덩이 중 상당수에서 냄새가 나고 어떤 곳에는 곤충 애벌레가 서식하고, 어떤 웅덩이에는 각종 부유물이 있어 악취를 풍기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나중 얘기지만 다녀와서 종아리에 발진이 생겨 한동안 애를 먹기도 했다.

▲ 마지막 사진은  썩은내가 진동하는 최악의 웅덩이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세밀한 시간의 흔적들 ◎ 파리아 강의 대 혈투 ◎에필로그 등이 실릴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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