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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에 홀리다 Jul 11. 2018

미국의 비경, 벅스킨 걸치 3

협곡을 걷는 사람들 


"얼마나 왔을까?"

협곡으로 스미는 햇살은 하늘 높이 치솟은 사암들 사이를 비집고 바닥으로 쏟아지고, 그들이 펼치는 빛잔치를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른다. 갈 길을 재촉하지만 않는다면 몇 시간이고 머물다 가고 싶을 만큼 햇살이 눈부시게 빛난다. 일상에서도 가끔은 그런 순간들이 찾아오고는 하지만,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는 않다. 여기라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정해진 거리를 해가 있는 동안 걸어야 한다는 부담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곳에 온 목적이 그저 이 협곡을 한번 걸어보는 데 있는 것은 아니므로 그럴수록 굽이를 돌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가려졌던 햇살이 바위틈 사이에서 반짝일 때마다 잠시 대열에서 뒤처지는 한이 있어도 그 짧은 시간만큼은 빛살 속으로 빠지고 싶었다. 


▲ 구비를 돌때마다 모퉁이로 떨어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협곡은 멀고 시간은 길다."


틈 날 때마다, 앉을 만한 바위가 나올 때마다 잠깐씩 쉬면서 물도 마시고, 도시락도 까먹고, 이온 음료도 마시면서 몸 상태를 유지해야 끝까지 갈 수 있다. 해가 지는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으므로 자기의 체력에 맞게 적절히 계곡 안의 풍경을 즐길 일이다. 무엇인가에 쫓기듯 바삐 걸어가는 일은 밤을 도와 먼길을 와서 잠도 자지 못하고 험한 길을 걷고 있는 진정한 뜻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충분하지는 않아도 적절히 현장의 느낌을 몸속에 간직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왜 이곳에 왔겠는가? 


마음과는 다르게 몸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물구덩이를 많이 지나고 진흙이며 바위며 모래를 지나면서 한참을 왔으니 꽤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자기기가 작동을 하지 않으니 걸어온 시간, 걸음 수 등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뿐이다. 미리 파악한 정보로는 걸치 중간에 드나들 수 있는 미들 트레일(Middle Trail)이라는 곳이 있어서 긴급한 사태가 생겼을 경우 유일하게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이라고 들었다. 그곳의 위치를 입구에서부터 시작하는 거리로 파악을 해놓고 시작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디쯤일까 찾아봐도 쉽사리 찾을 수 없다. 빠져나갈 수 있다면 쉽게 오를 수 있는 곳이어야 할 텐데 아무리 살펴도 나갈만한 곳이 보이질 않으니, 지금까지 걸어온 거리를 짐작해 내는 것이 쉽지가 않다. 결국 토포 맵을 펴 놓고, 지형상 비슷한 곳을 찾아 그곳까지의 거리를 짚어낼 뿐이었다.

▲ 유타와 애리조나의 오월 날씨는 한여름을 방불케 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에 따라서 계산해낸 거리가 제각각이다. 누구는 5마일 밖에 못 왔다고 하고, 또 누구는 10마일 이상 왔다고 하고... 이러다 뭔 일 나는 것은 아닐까 좀 흔들리기까지 했다. 이러기를 걷는 동안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걸치 안을 걷는 일이 쉽지 않았다는 방증일 것이다. 게다가 아침을 지난 햇살이 굵어지기 시작하더니 걸치 안으로 햇볕이 드는 곳은 기온이 상당히 높아져 있었기 때문에 체력 소모는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대원 한 명이 토포 맵을 유심히 살피더니 한 곳을 지목하며 미들 트레일이 틀림없다고 자신한다. 모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자신에 차있다. 그곳은 분명 다른 곳에 비해 바위가 낮고 중간중간에 짚을만한 곳도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곳 같지는 않다. 

▲ 토포맵을 유심히 보고 있는 대원 한 명이 지목한 미들 트레일. 확실치 않지만 확실하다고 해도 올라가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밥 먹고 합시다!"


땀이 비 오듯 하고, 물웅덩이 구간은 끝났는지 모래와 자갈, 바위가 뒤덮인 구간을 지나야 만 했다. 더 이상 전진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때 누군가 밥을 먹으며 좀 쉬었다 가자고 제안하자 모두 기다렸다는 듯 이구동성으로 찬성한다. 

▲ 달걀 두 개, 주먹밥 네 개, 파프리카 너댓 개가 지급됐다.  

그렇게 앉아 점심을 먹은 곳은 그나마 너른 바위가 있고, 나무 그늘이 있어 더위를 피할만한 곳이라서 잠시 휴식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밥을 먹기 전에 먼저 젖은 신과 양말은 벗어 땡볕에 널었다. 맨발은 햇빛에 내놓으니 따스한 볕이 축축한 발을 보듬는 듯했다. 


꿀맛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단출한 메뉴였지만 비타민이 풍부한 파프리카와 갖가지 영양과 열량이 가득한 주먹밥은 기력을 회복시키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물이었다. 삶은 달걀과 주먹밥은 물이 없으면 먹기 힘든 음식이라서 마시다 보니 점심 먹으며 마신 물이 거의 절반에 가깝다. 남은 물로 트레일 끝까지 버텨야 하는데 걱정이다. 조금씩 아껴 마셔야 할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 닥쳐보니 평소의 소비 습관을 생각하게 된다. 별 아낌없이 마시고 먹던 음식들, 먹고 남은 음식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버리던 습관, 너무 흔해 소중한 줄 모르고 함부로 다뤘던 음료와 각종 음식물들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야 철이 들려는지 자꾸만 그동안의 생활과 생각을 돌아보게 된다. 조금만 더 넓고 깊게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태초에 물이 있었다?"


걸치를 걷다 보면 가끔씩 눈에 띄는 것 가운데 하나는 협곡 중간에 가로로 걸려있는 통나무들이다. 처음엔 이게 무얼까 했는데, 가만히 보니 이곳에 홍수가 났을 흘러들어왔다가 바위에 걸린 통나무들이다. 이런 모습보니 전에 이곳의 물난리가 얼마나 대단했는짐작이 간다. 사람들이 날씨가 우중충하면 트레일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지 알 것 같다. 주변의 물이 좁은 협곡으로 몰려들면 순식간에 물이 불어날 테고, 피할 없는 곳에서는 그대로 조난당하기 일쑤일 테니 말이다. 물이 가지고 있는 파괴력은 일상 속에서도 익히 볼 수 있다. 바닷가의 파도가 그렇고, 여름철 쉴 틈도 없이 퍼붓는 장맛비가 그렇고, 고요하게 흐르던 시냇물이 뚝 떨어지는 낭떠러지를 만나면 엄청난 힘으로 바닥을 향해 내닫는 폭포수가 그렇다. 인류 역사에서 물을 어떻게 다루었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운명이 달라지는 경우를 보아왔다. 또한 자연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그들 문명의 성격이 달라지는 경우도 보았다. 그만큼 물은 사람들에게 없으면 안 될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 지금은 마치 설치 미술 작품 같은 느낌도 살짝 들지만, 닥치면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세밀한 시간의 흔적들"


물이 흐르며 남긴 흔적이 비단 걸려있는 통나무뿐일까? 따지고 보면 이 걸치도 흐르는 물이 만들어 낸 작품이 아니던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계곡, 이 바위들, 이 풍경들, 길 위에 흩뿌려진 모래들, 진흙들, 그리고 길 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바위들까지 어느 것 하나 물이 없었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들이다. 바위에 새겨진 세밀한 무늬들 하나하나가 물이 흐르며 그들을 비비고 만지고 깎아 새겨놓은 흔적들이다. 아주 오래전 폭풍 같은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보다 훨씬 더 많은 비가 내리고, 훨씬 더 자주 내리던 그 시절의 흔적이 이곳의 뼈대를 이뤘다면, 그 이후의 세월을 견디며 흐르고 멈추기를 계속하면서 지금 계곡의 다양한 빛깔과 모양을 이뤘을 것이다. 

▲ 협곡 자체가 흐르는 물이 만든 작품이다.


▲  그 이후 물은 흐르며 갖은 문양을 새기고, 흔적을 남겼다.


사람들은 물이 굽이를 돌면 바르게 피려고 하고, 바닥이 낮아지면 깊게 해주려 하거나, 샛길을 만들면 막으려 한다. 그러나 물이란 본래 저항하지 않는 속성이 있어서 땅이 어쩌면 그들도 거기에 맞춰 어찌해야지 , 사람이 나서서 그게 아니라고 어쩌고 저쩌고 참견하면 탈이 나게 되어있다. 그들이 흐르다 멈추면 그대로 둘 것이며, 괴어있다 넘쳐흐르면 또한 넘치게 놔둬야 한다. 웅덩이가 있으면 그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향할 것이고, 낭떠러지를 만나면 성난 사자처럼 바닥으로 내달릴 것이다. 

▲  물이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 땅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파리아 강의 대 혈투"


"아, 합수머리(Confluence)!"


일행은 드디어 벅스킨 걸치 구간이 끝나는 합수머리에 도착했다. 벅스킨 구간의 마지막 몇 마일은 어쩐 일인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마도 물웅덩이가 전혀 없었던 까닭일 것이다. 비교적 바닥이 평평하고 돌과 바위가 적어진 대신 모래가 많아졌다. 물은 조금씩 흘러 작은 시내를 이루고 협곡을 따라 구비구비 흐르고 있었다. 그에 따라 간간히 나무가 있고 때로는 제법 무성하게 자란 곳도 있다. 협곡에서 하루나 이틀을 머물러야 한다면 이렇게 좀 널찍하고 평평하여 나무도 좀 있는 곳이 야영을 하며 앉아 쉴 수 있는 적절한 곳으로 보인다. 다음에 그럴 일이 생기면 이 즈음에서 하루를 신세 지면 되겠다 싶다. 

▲ 구비구비 흐름은 곡선을 이루며 냇물이 되었다.


그 구간엔 말들이 다닌 흔적이 있었고, 합수머리에 도착할 무렵엔 말을 타고 들어오는 노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말들이 함부로 배설을 해대는 바람에 바닥엔 온통 말똥이 널려있어 다소 불쾌하기는 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조심스럽게 깨끗해 보이는 곳을 이용해 합수머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금씩 흐르던 그 물은 파리아 강의 하류 쪽으로 흐름이 이어졌다그런데 파리아 강 상류에서는 물이 내려오질 않는다. 작년엔 물이 많아 그 물살을 헤치고 걸었다고 했는데, 올해엔 가물어서 그런지 강바닥은 물 한 방울 없이 바싹 말라있다. 지난해 다녀간 사람들은 놀라는 기색이 역력하다. 비가 아무리 오질 않았다고 해도 강이 마른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물이 없는 것이 걷는데 어떤 영향이 있을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니 한편으로는 다들 긴장이 되는 모양이다. 

▲ 작년엔 물이 가득했던 파리아 강이 바닥을 드러냈다.


"전투 준비하듯이"


합수머리에서 잠시 쉬면서 전열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도착한 것이 아니라 갖은 애를 써서 바위 넘고 물 건너 걸어온 길인지라 모두들 지칠 대로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남은 구간은 약 7.3마일쯤으로 걸어온 거리에 비하면 매우 짧지만 이미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걷기에는 그리 짧지만은 않은 거리다. 지난해 다녀온 사람들 말에 따르면 이 구간을 가는 동안 심리적인 불안과 압박감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다고 했다. 예상 시간도 약 4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이므로 어두워지기 전까지 도착하려면 체력 안배를 잘 해야 한다.  예상대로 팀원 중 넷은 좀 덜 지쳤고, 존 뮤어를 다녀왔다는 팀원이 가장 많이 지친 상태이므로 다들 걱정하는 눈치다. 셋은 앞장서서 가고, 팀장과 가장 많이 지친 팀원은 뒤에서 천천히 오기로 했는데, 앞사람들을 따라가기에는 좀 부족하고, 뒤에 쳐질 정도는 아니니 중간에서 홀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을 2마일도 못 가서 후회하게 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 파리아 강 주변 바위에는 석회 성분이 많다. 마른 강바닥 일부도 석회 때문에 희끗희끗하다.


"파리아로 가는 길"


파리아 강은 협곡은 아니다. 강바닥이 제법 넓고 강변의 벽들이 제법 높기는 하지만, 벅스킨 걸치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편이다. 물론 낮다고 타고 올라가 강을 탈출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강이 휘도는 부분에는 꽤 넓은 모래톱이 있기도 하는 등 일반적인 강의 특징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벅스킨 걸치와는 다르게 파리아 강은 옆의 바위에 석회 성분이 많이 섞여 있어 바닥의 어떤 부분은 석회가 섞인 진흙이 소금처럼 말라있다. 합수머리와 가까운 쪽의 파리아 강의 벽들은 벅스킨 걸치와 매우 비슷하게 생겨 높직높직하면서 커다란 덩어리가 몇 개 모인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파리아 강 상류는 바닥에 물이 전혀 없다. 얼마 전까지 물이 흐르던 곳이기 때문에 그들이 데려다 놓은 모래가 주로 깔려있으면서 듬성듬성 말라 갈라진 진흙들이 모래 위를 살짝 덮고 있다. 겉보기와는 달리 강바닥은 전체가 모래로 덮여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 바위에 섞인 석회 성분이 녹아내려 바닥에서 말랐다.


▲ 파리아 강의 시작 부분은  벅스킨 걸치와 그리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사진 찍을 힘도 없어?"


바닥의 모래가 발목을 잡는 것 같았다. 이미 상당히 피로해진 다리로 모래사장을 걸으려니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진흙이 말라있어 좀 단단해 보이는 부분을 골라서 걸어본다. 그러나 그뿐 진흙은 껍데기에 살짝 묻어있을 뿐 단단하지는 않다. 그래도 모래보다는 좀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요리조리 진흙을 찾아 걷다 보니 걸음이 크게 지그재그를 그리며 걷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조금 편해보자고 걸음을 더 걷는 꼴이 돼버렸다. 잠시 그늘에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한숨을 돌려본다.


그랬다, 강을 통과하는 시간은 때마침 따가운 햇빛이 내리쬐는 오후였다. 앞서간 팀은 눈에서 멀어진 지 오래고, 뒤처진 팀을 지나쳐 온지도 꽤 되어 홀로 외로운 걸음을 옮겨야 했기 때문에 주변 경치를 살피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이 지날수록 피로가 누적되는 다리를 보살펴야 했다. 평소에도 걸음을 좀 빨리 걷는 편이라서 이곳에서도 체력이 허락하는 한 평소의 걸음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좀 늦춰야 한다. 의식적으로 걸음을 늦추고 걷다 보면 어느새 걸음은 빨라져 있고, 그만큼 체력 소모도 많아지는 일이 계속됐다. 

▲  벅스킨 보다 하늘도 많이 보이고, 아직은 괜찮다.


사진기를 들고 초점을 맞추고 노출을 맞춰 셔터를 누르는 일은 그리 힘든 일은 아니다. 평소에 고민하는 일은 어떤 구도로 어떤 화각으로 뺄셈과 덧셈을 잘 해서 셔터를 누르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지 그 자체가 힘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일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디테일을 살려내기가 어려웠다. 아니, 무거운 다리를 옮기는데 온 신경이 다 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일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 걸음 한걸음 옮기는 발밑에 모래가 있나, 그러면 피해서 좀 덜 빠지는 곳으로 가야지, 그늘이 어느 쪽에 있는지, 되도록이면 그늘로 걸어야지... 물은 얼마나 남았을까? 조금씩 아껴 마셔야 할 텐데...

▲  그래도 아직 쓰러질 정도는 아니다. 가끔씩 사진기를 들어올릴 힘은 있다.


"몇 시나 됐을까?"


하늘을 보니 해도 좀 기울고 구름이 많아졌다. "몇 시나 됐을까?" 시간을 확인하고 싶어 주머니를 뒤져보니 전화기가 없다! 그래, 트레일을 출발하기 전에 전화기를 차량팀에 맡겼던 것이 이제야 생각이 났다. 팀에 경험자들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전자기기를 잔뜩 가지고 왔으니 신호도 잡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화기의 카메라가 깨져 사진기로 사용도 못하는 전화기를 굳이 가져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홀로 있는 상황에서 전화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니 갑자기 불안해졌다. '조난당하면 어쩌려고?' '비상 상황이 생기면 어쩌려고?' 등등 극단적인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그러다가 '어차피 신호도 안 잡히는데 뭐' 하고 자신을 위로해 본다. '안 그러면 어쩔 건데?'  '얼마나 남은 거지?', '뒷사람들을 기다려볼까?' 별의별 생각을 하면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다리는 이미 천근만근에 햇살은 따깝게 내리쬔다.

▲ 구름이 조금씩 늘기 시작하자 불안해졌다. 해는 점점 기울고 트레일 헤드는 보이질 않는다. 


"휴, 일단은 안심이다!"


뒷사람을 기다리며 너무 쉬게 되면 더 힘들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일단은 앞으로 가 보기로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햇살이 더 따가워지고 있었다. 이게 맞는 것인지, 아님 느낌이 그런 것인지 분간할 여력도 없이 그저 따가운 햇살을 피할 궁리에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걷는 일에 몰두하다가도 왜 이렇게 발이 무거운지, 모래는 왜 이렇게 많은지 속으로 투덜투덜 도대체 종잡을 수 없다.  '얼마나 남았을까?' '왜 이렇게 안 나오지?' 조바심이 난다. 시간도 모르고 얼마나 남은 지 종잡을 수도 없고, 목적지는 나오질 않는다. 


그러다 눈 앞에 희한한 바위가 나타났다. 사람이 일부러 만든 건축물 같기도 하고, 현대 건축가의 작품 같아 보이기도 하는 구멍이 숭숭 난 바위를 발견한 것이다. 곰곰이 생각할 여력은 없었지만 석회 성분이 많은 바위가 물에 씻겨나가면서 생긴 자연의 조각품이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그러다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몇 시간 전 합수머리를 출발할 때 지난해 다녀간 팀원이, 합수머리 근처의 구멍 난 바위를 보며 신기해하는 날 보며, "여기서 한 참 올라가다 보면 이 보다 훨씬 더 깊고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있다."라고 말한 것이 기억났다.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일단은 안심이 됐다중간에 갈림길은 없었지만, 혼자 걷고 있고 전화기도 없었고 상황을 알릴만한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남은 거리도 짐작할 없어 얼마나 가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것을 발견한 것은 그나마 위로가 됐다. 일단은 가고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  파리아 강의 상징이라고 할만한 특이한 바위의 모습
▲  한 두 군데가 이런 것이 아니라 이 일대의 바위가 다 이랬다.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 사진을 찍고 나니 잠시 쉬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다리가 무거웠다. 그늘을 찾을 수 없어 강바닥에 뒹구는 통나무에 걸터앉아 마지막 주먹밥을 먹고, 신을 벗어 발도 좀 말리는 등 휴식을 하고 나니 좀 나아지는 듯했다. 얼마 남지 않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여장을 챙겼다. 저 앞 바위를 돌면 목적지가 나올까? 아니면, 저 멀리 좀 낮으막한 바위 어디가 목적지가 아닐까? 둘 중 하나는 좀 생생해야 하는데 몸과 마음이 함께 지쳐가고 있었다.


그때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모래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언덕 위 나무를 할퀴며 내는 소리가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든다. 뒤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어 바람소리겠거니 하면서 가다 보면, 또 저 앞 쪽 어딘가에서 시끌시끌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어, 다 왔나?" 싶어 가다 보면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좀 야트막한 바위가 나오면 그 바위 어디쯤 나가는 길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다가가도 길은 보이질 않았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심신이 더 지칠 수밖에 없었다. 

▲ 저 바위 위에 있는 바위가 마치 호텔 건물처럼 보여 다 왔지 싶었다.
▲  바위가 낮아졌으니 빠져나가는 길이 나올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컸지만, 모퉁일 돌아도 길은 나오지 않았다.


"길고 긴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길은 맞게 가고 있으니 염려할 것 없고, 이제 내 다리만 생각하면 됐다. 살아오면서 이런 경험을 했던 적이 있었던가? 환청에 시달릴 만큼 이렇게 심신을 극단으로 몰고 갔던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마음은 아직 기대와 희망에 물들어 있으니 좀 나았지만, 단련되지 않은 다리로 이렇게 먼 거리를 걸었던 적이 있었던가? 몇 년 전 거주지 인근에서 가장 높다는 마운트 발디를 오르면서 경험했던 체력이 고갈되는 상황도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는데, 이번엔 고산 등반을 하는 것도 아닌데 홀로 고갈된 체력으로 꾸역꾸역 앞으로 가려고 하니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다. 


그렇게 홀로 싸우며 한발 한발 내딛고 있는데, 저 앞에서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순간 깜짝 놀랐지만, 아마도 저쪽 트레일 헤드에서 반대로 트레일 하는 사람인가 싶었다. 그래도 사람을 보니 갑자기 기운이 솟았다. 이제 거의 다 온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이 상승하면서 힘이 났다. 가까워지면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해 볼 요량으로 천천히 걷는데, 돌연 그 사람이 먼저 말을 걸어온다. 가까이 가 보니 앞서서 간 팀원 중 한 사람이었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다 맨 나중에 쳐진 사람들이 걱정이 되어 마중 나가는 중이란다. 그는 이번 팀원 중 체력이 가장 좋은 것으로 평가받는 사람이었다.  반 마일만 더 가면 목적지라니 속으로 이제 살았다 싶어 쾌재를 불렀다. 그를 만나고 나니 주변 경치가 눈에 확 들어왔다. 때마침 해가 기울어 석양의 따스한 햇살이 저 멀리 바위를 감싸고 있었다. 모퉁일 도니 그의 말대로 캠프 그라운드를 알리는 팻말이 있었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보였다. 


드디어 도착했다. 하늘은 더없이 맑고 왠지 더 하얀 구름이 수놓고 있었다. 화이트 하우스 캠프장엔 평일인데도 캠핑을 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먼저 도착한 팀원들은 한편에 서서 차량팀을 기다리며 휴식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평온하고 정겨운 풍경인가? 몸에 걸친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모두 벗어버리고 잠시 휴식을 하고 있자니, 차량팀이 도착하고, 그 후 뒤처진 팀원과 마중 나간 팀원들 모두 무사히 도착했다. 캠프장에서 저녁 만찬을 마치고 숙소에 도착하니 밤 열 시가 넘었다. 이렇게 벅스킨 걸치의 긴 하루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 갑자기 눈에 들어온 풍경/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캠프 그라운드 주변의 풍경들.








고맙습니다. 다음 글은 애리조나의 화이트 포켓(White Pocket)에 다녀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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