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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에 홀리다 Jul 27. 2018

미국의 비경, 화이트 포켓

시간의 간격

시간은 변화고, 변화는 움직임이다. 무엇이 움직이거나 변했다면 시간이 흘렀다는 뜻일 테니, 세상 모든 것은 시간의 한계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시간은 또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표현하고 수식하는 일종의 수식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변화, 곧 시간은 존재하지는 않지만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이다. 흔적의 실체를 추적하다 보면 어떤 과정으로 변해 왔는지, 언제부터 있었는지, 혹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세상의 모든 풍경은 이런 범주에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이번에 다녀온 화이트 포켓은 시간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어떤 주말

벅스킨 걸치(Buckskin Gulch) 트레일을 다녀오자마자 일상으로 돌아가 평상시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녀온 지 아직 채 한 주도 지나지 않았는데 작은 변화가 생겼다. 아무리 어려운 여행지라도 갈 수 있을 것만 같고, 제아무리 험한 트레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 것이다. 좋게 말하면 자신감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자만심이라고 할 그런 마음이 들었다. 인터넷을 뒤져 트레일 코스란 코스, 오지란 오지는 다 뒤적거리며 다음 여행지를 물색하다가 문득 그런 내 모습을 보니 헛웃음 나왔다. 벅스킨 걸치의 마지막 구간에서 환청이 들리는 경험을 했던 것이 오히려 자극이 되어 또 다음 여행지를 물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가 많을 것이다. 여행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저마다 가지고 있을 백만 가지의 사연과 이유와 사정과 형편이 끊임없이 이어져 날밤을 새워도 다 말하지 못해 결국 브런치에 열심히 글을 올리고도 모자라 책으로도 내고, 또 내고 그리고 또 여행을 다니려고 한다. 여행을 즐거워하는 다른 사람들 말이다. 다른 이야기보다 여행 이야기를 즐겨하는 필자도 결국은 이런 범주에 속할 것이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마는 사는 것이 따지고 보면 길고 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인생은 긴 여행 길이 아닐까...저 길 끝 지점에 서는 날이 오겠지?   [캘리포니아 앨라바마 힐즈의 아침 풍경]
▲ The Wave 퍼밋을 두 구좌로 신청해 두었다.

벅스킨 걸치를 다녀오면서 아쉬웠던 것은 같은 지역에 있는 '더 웨이브(The Wave)'와 '화이트 포켓(White Pocket)'을 다녀오지 못한 것이었다. 더 웨이브는 허가받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니 그렇다고 해도, 화이트 포켓은 다른 일행이 없었다면 다녀와도 될 만했는데, 그러질 못했기 때문에 아쉬움이 더욱 컸다. 이 참에 더 웨이브 퍼밋을 받으려고 알아보니 이게 참 어려운 일이다. 이곳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바람에 허가제로 운영하여 하루에 20명 씩만 들여보낸다. 그중 10명은 온라인 추첨을 통해 배정하고, 나머지 10명은 관리 사무소에서 매일 아침 다음 날 허가증을 추첨을 통해 발급한다. 온라인 추첨은 매월 1일, 신청하는 달 기준으로 4개월 후에 입장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발급한다. 매일매일 경쟁률이 수백 대 일에 달할 정도로 신청자가 많다. 현장 추첨은 매일 아침 관리 사무소에서 신청서를 제출한 사람 중에서 하게 되는데, 그다음 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 이틀은 체류해야 한다. 그러나 이틀은 아주 운이 좋은 경우고 대부분은 두세 번씩 시도하므로 너댓새는 머물 각오로 가야 한다. 한 번에 떡하니 당첨되면 얼마나 좋을까!


벅스킨 걸치의 여운이 너무 짙어 언제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 열흘도 지나지 않은 그다음 주말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화이트 포켓으로 가는 길 위에 있었다.


화이트 포켓이 뭐지?

화이트 포켓(White Pocket)은 벅스킨 걸치와 같은 지역에 있다.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좀 오래전에 그 이름을 들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주로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좀 나부대는 축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들었고, 온라인에서 검색을 해 보면 또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구석구석 찾아다니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되어 있었다. 이름이 좀 특이했다. '화이트 포켓?'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다가 사진을 보다 보니 왜 그렇게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그곳에 있는 바위들이 하얀 데다가 듬성듬성 골이 파여 있어서 비라도 오면 그곳에 물이 괴어 웅덩이가 되는데, 그 골을 주머니라고 표현한 것이다. 많은 땅이름이 그렇듯이 이곳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그런데 어떤 분의 설명을 보니, 이 경우 pocket이 외딴 곳을 의미해서 외딴 곳에 있는 하얀 바위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네요.)


온라인에서 사진을 검색하다 보면 참 다양한 사진을 볼 수 있다. 같은 장소와 같은 대상인데도 사람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사진을 찍어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번 여행은 그런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그것이 취미든 직업이든 상관없이-그러 그러한 사진을 찍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지 짐작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온라인에 올라온 사진들과 직접 가서 본 현장의 모습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다른 까닭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생기겠지만, 사진을 찍는 당사자의 노력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한다.


이렇게 마음에 담게 된 화이트 포켓은 그러나 쉽사리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화이트 포켓이 있는 지역은 애리조나와 유타를 여행하면서 많이 지나쳐야 하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한번 다녀올까 궁리를 하면서 지나다니고는 했었다. 그러나 워낙 모래가 많은 지역이라서 사륜구동 SUV가 필수로 요구되는 곳이기 때문에 늘 그림의 떡 보듯 입맛만 다시며 지나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가끔씩 글에도 등장시키는 애마가 생겼기 때문에 이처럼 마음먹은 시간에 다녀올 수 있었다.

▲ 이 모습이 전형적인 화이트 포켓 의 사진이다. 이 웅덩이에 물이 괸 사진을 많이 볼 수 있다.


여행 준비, 30분이면 끝!

여느 주말여행과 다름없이 금요일 밤 여장을 챙겨 길을 떠났다. 마치 떠나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듯이 "가자!" 한 마디면 30분이면 떠날 채비를 차릴 수 있게 되었다. 화이트 포켓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르 페브르(Le Fevre) 휴게소에 도착하니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었다. 좀 피곤하기는 했지만 잠시 내려 하늘을 쳐다보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이 쏟아져내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별빛이 들려주는 드넓은 세상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지만, 좀 자야 할 것 같았다. 일을 마치고 쉬지 않고 달려온 만큼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내일을 장담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므로 아쉽지만 급히 하늘을 향해 대포를 한 방 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 대포로 딴 별은 그다지 많지도 밝지도 않다.


눈을 뜨니 해가 이미 중천이다. 서두를 까닭은 없다. 천천히 휴게소 주변을 둘러보고, 아침을 해결한 다음 출발하면 된다. 목적지까지는 불과 두 시간 남짓이니, 길이 험한 것을 감안해도 점심때쯤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여행에 다른 목적지는 없으므로 점심을 먹고 탐색을 시작하면 된다. 다녀온 사람들에 따르면 두어 시간이면 둘러볼 수 있다고 했으니,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꼼꼼하게 둘러본다고 해도 서너 시면 될 것이다. 둘러보면서 적당한 곳을 물색해 두었다 하룻밤 머물면서 쏟아지는 별들과 그들이 어떻게 어울리는지, 어떻게 그들이 오랜 세월 함께 견뎌왔는지 들어볼 생각이다. 그곳의 바위들은 어떤 시간을 견디며 살아와서 지금의 모습을 하게 됐는지 그들의 외로운 세월을 느껴볼 참이다. 아직 동이 트기 전 이른 새벽에 나가 그들은 또 새로운 날을 어떻게 맞이하며, 어떤 하루를 준비하는지, 동녘으로 고개 내민 햇살과 어찌 조우하는지도 살펴볼 요량이다. 


가는 길에 그랜드 캐니언 노스 림으로 들어가는 67번 도로와 만나는 갈림길에 있는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이곳에는 '케이밥 고원' 방문자 안내소가 있고, 카페가 하나 주유소가 하나 있는 작은 휴게소라고 할 수 있다. 몇 년 전이든가 한 겨울에 이곳을 지난 적이 있었다. 겨울이면 그랜드 캐니언 노스 림은 폐쇄되고, 그곳 진입로에 해당하는 67번 도로도 이 지점부터 폐쇄된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모든 시설도 폐쇄된다. 그것을 모르고 화장실을 이용할까 해서 들렸었는데,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그곳을 떠나야 했던 기억이 있다. 따라서 혹시 겨울에 이곳을 지나면서 이곳에서 볼 일을 볼 계획은 하지 않은 것이 좋다. 특히 주유를 이곳에서 할 계획으로 온다면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 전망대에서 보이는 경치는 넓은 분지와 분지 너머에 있는 버밀리온 클리프가 아련하게 보인다.


디지털의 배신

이곳을 지나면 이제 내리막 언덕을 내려서기만 하면 그 '하우스 락 로드' 진입로를 만나게 되는데, 내리막 중간쯤에 작은 주차공간이 있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 보는 풍경은 어디선가 많이 본듯하여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일전에 다녀온 캘리포니아의 데스밸리 가는 길에서 본 장면과 많이 닮았다. 살면서 이런 경험을 가끔씩 하고는 한다. 처음 간 곳의 풍경이 언젠가 와본 듯하다든가, 분명히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도 전에 어디선가 본듯한 인상인 경우들 말이다. 이런 경험들은 때때로 낯선 곳에서 겪는 생소함을 해소하고 전에 왔던 느낌이 들어 편안한 마음으로 여행을 계속하게 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경험하고는 한다. 이런 경험들을 소위 '데자뷔'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이 이런 경험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에 만족한다. 

▲  어디서 많이 본 듯 한 풍경


'하우스 락 로드'부터는 비포장 길이다. 이제부터는 내비게이션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운전을 해야 하는 구간이다. 비포장 길인 데다가 처음 가는 길이고, 처음부터 목적지를 찾을 때 내비게이션을 이용했기 때문에, 미리 오프라인 지도를 다운로드해놓고 내비게이션을 의지해 목적지까지 갈 생각이다. 좀 더 확실하게 하자면 '지방국토관리사무소(BLM)'에 들러 지도를 얻으면 되지만 좀 번거로워 그냥 내비를 이용하기로 했다. 지도에 의하면 하우스 락 로드 입구에서 화이트 포켓 진입로까지는 약 8마일 정도 운전해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약 16마일 정도 더 들어가면 화이트 포켓에 도착할 수 있다.

▲  하우스 락 로드 입구와 그 주변 풍경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비게이션을 완전히 믿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번에 다시 한번 경험했다. 지난해인가 유타의 고블린 밸리 주립공원 뒤편의 오프로드인 '와일드 호스 로드'를 갔을 때 내비게이션에게 배신당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지난 글 '오래된 여행' https://brunch.co.kr/@leemansup/61 참조).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정도의 길로 접어드니 바닥엔 모래가 풍년이라 속도를 낼 수 없는 데다 어쩌다 좀 깊은 곳이 나오면 빠질까 염려되어 사륜구동으로 전환했다, 좀 나아지면 풀었다를 반복했다. 이러기를 몇 마일을 계속하면서 길은 좀 더 험해지기도 하고, 가끔씩 모래 대신 자갈들이 난무하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내비가 지시하는 대로 좌회전하려고 보니 길이 보이질 않는다. 처음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이게 처음은 아닌지라 진정하고 그냥 직진해 본다. 물론 오프라인 상태지만 오프라인 지도를 받아놨으므로 내비는 정상작동을 한다. 다시 설정된 경로로 가다가 또다시 길이 보이질 않고, 이러기를 몇 번 인가 계속했다. 이젠 좀 적응이 된다. 지도를 보면 좀 복잡하기는 해도 연결되는 길이 없는 것은 아니므로 전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 모래밭과 자갈밭이 번갈아 나오더니, 도대체 길이 어디 있다고 좌회전 하라는지 내비는 계속 종알거린다.


어느 만큼 가다 보면 철조망으로 길을 막아놓은 곳이 나타난다. 직접 문을 열고 지나간 다음 다시 닫아놓으면 된다. 그나저나 가도 가도 목적지가 나오질 않는다. 특이한 바위가 보여 다 왔나 하여 지도를 보면 아직이고, 풍경이 좀 달라지는 곳에 오면 이제 정말 다 왔나 싶은데도 아직이다. 흠,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물론 시간은 충분하다. 화이트 포켓에만 머물 작정이므로 좀 느지막하게 도착한다 해도 문제 될 것은 없다. 철조망으로 막힌 길을 하나 더 통과했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 틀림없다. 미리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런 철조망은 한 번만 통과한다고 그랬다. 다시 지도를 본다. 현재 위채를 살펴보니 목적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기는 한데, 길이 영 복잡하다. 어쨌거나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 내비가 가리키는 대로 갈 수밖에 도리가 없다.


  ▲ 구글의 지시에 따라가다보니 이런 철조망을 두 번 만났다.


더 빠르게 온 것 맞아?

드디어 지금까지 온 길 보다 훨씬 넓고 편안한 길을 만났다.  "도대체 내비는 뭐 하는 거야?", "더 빠르게 온 것 맞아?" 등등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밖으로 나갈 때는 이 길로 가야지 했다. 이윽고 파인트리 포켓(Pine Tree Pocket)이라는 간판이 보이면서 농장 건물이 서 있는 삼거리에 도착했다.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조금 더 가니 예의 그 철조망 문이 나타났다. 그 문에 화이트 포켓에 온 것을 환영하는 문구가 적혀있는 것을 보니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나머지 길은 지금까지 온 것보다 편안했다. 길엔 여전히 모래가 많았지만, 비교적 사람들이 더 다녀선지 가기에 훨씬 편안했다. 마침내 저 멀리서 그동안 오면서 보던 바위와는 격이 달라 보이는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화이트 포켓이 아니라 '파인 트리 포켓'으로 안내하고 있다  ▲ 제대로 왔으면 한 번이면 될 것을, 세 번씩이나 통과한 철조망 문


주차장엔 이미 차들이 여러 대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주차장엔 그늘 하나 없이 달랑 차를 댈 수 있는 공간만 있을 뿐이다. 점심을 먹어야 하므로 어딘가 그늘이 있는 곳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애리조나의 여름은 생각보다 훨씬 더 뜨겁다. 거기다 차량 수 보다 많아 보이는 사람들의 어수선해 보이는 행동거지를 보니, 아마 단체로 가이드 투어에 나선 듯 보이는 한떼의 사람들이 시끌벅적하다. 이젠 이런 오지까지 가이드 투어가 들어오다니 여행사들의 고뇌가 엿보이기도 한다. 여기를 검색할 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 조만간 더 웨이브처럼 출입 허가제로 바뀌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바로 이런 경우들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차장 앞 길은 계속 이어져 있었다. 그늘을 찾아 그 길로 계속 가보기로 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길에 있는 모래의 양이 많아 차가 조금씩 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별문제 없이 운전할 수 있었다. 500여 미터쯤 가니 내리막이 나오길래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려갔다. 그곳은 막다른 길이었고 언덕 아래엔 마치 주차장처럼 차를 대여섯 대는 댈 수 있을 만큼 널찍한 바위가 있고, 한 옆으로 커다란 나무 그늘도 있다.


"찾았다!"


사람들이 이곳을 외면하고 뙤약볕 아래 주차장에만 있는 것이 처음에는 이상하기는 했지만, 점심을 먹어야 하니 그냥 지나쳤다. 그러나 막상 점심을 먹으려니 심한 모래 바람이 불어 간단하게 준비해온 국을 데우고, 찬밥을 말아 후루룩 점심을 해결했다. 신발끈 단단히 조이고, 물도 넉넉하게 준비했다. 사진기와 사진기 삼발이를 챙겨 숨 한 번 크게 쉬고 출발했다.

▲ 저렇게 널찍한데도 차가 한 대도 없어 얼씨구나 좋다고 했다

첫인상

강한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화이트 포켓'이라더니 바위는 온통 하얗기만 했다. 거기에 한낮의 강렬한 햇빛이 내리쬐고 있어 바위 표면의 도드라짐이나 돌기들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상황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바위까지 가려면 뙤약볕 아래 모래 언덕을 하나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듣기로 다 돌아보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고 했고, 한눈에 살펴봐도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만큼 규모는 생각한 대로 작아 보였다. 세찬 모래바람이 눈앞을 가린다. 인터넷을 통해 보았던 예의 그 멋있어 보이는 장면들은 어디에 있을까?


화이트 포켓 첫인상은

그다지 대수로울 것 없는 바위 덩어리들이라는 것이었다.


바위가 하얗다는 것과 마치 거북등처럼 잘게 갈라져 있는 모양이 남달라 보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바위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므로 그저 심드렁했다.


"이런 바위를 보려고 밤 새 달려왔나?"

"설마 아니겠지?"

"저 바위 너머에는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겠지?" 

▲  예의 그 주차장에서 바라본 화이트 포켓, 저 모래 언덕을 걸어서 넘어가야한다.


겉으론 그리 구시렁거렸지만, 사람의 일이란 늘 바라는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동안의 여행을 통해 잘 알게 됐으므로 속으론 이미 각오를 하고 있었다.


"설령 기대한 것에 못 미친다 한들 뭐 어쩌겠어?"

"이미 이곳에 있고, 그곳을 향해 걷기 시작한 것을"  

"어디 여행할 때뿐이겠어, 일이란 게 다 그렇지"


사람의 일은 또 일방적으로 나쁘기만 한 경우는 많지 않으므로 지금 닥친 일에 있는 힘을 다하다 보면 일은 다시 방향을 바꾸고, 더 나아질 수도 있다. 사실이 그랬다. 살면서 힘든 일이 한꺼번에 몰려와 정신을 못 차릴 때에도 일이 어느 정도 수준에 다다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은 어느덧 반환점을 돌고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일의 흐름이 눈에 들어오질 않아 사태 파악을 잘 못하는 경우가 많기는 해도, 좀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그제야 알게 된다. 물론 다 그렇지야 못하겠지만, 개중에라도 그렇다면 지금 겪고 있는 일도 그 개중의 일이라고 여기고 견뎌내며 살아낼 수 있다.

▲ 하늘이 파래보이는 까닭은 그만큼 공기중에 수분이 없다는 뜻이고, 구름이 없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덥다!'


야트막해 보이는 언덕도 어떤 때는 오르기가 몹시도 힘이 들기도 한다. 얼마 오르지 않았는데도 땀이 흐르고, 다리도 아프다. 하늘에 구름이 한 점도 없는데 기온은 급히 올라가고, 바람엔 모래가 섞여 눈을 뜨기 어렵다면 누군들 힘들지 않을까? 그만그만한 바위를 타고 넘어 건너편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가지고 가다 보면, 좀 낫지 않을까?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조금은 낯선 바위를 오르다 보면 전엔 보지 못했던 모양들, 또 특이해 보이는 바위들, 어떻게 생겨났는지 궁금해지는 세월이 켜켜이 쌓인 그 더께를 유심히 살피다 보면 이까짓 거 더위야 땀좀 흘리면 나아지려니 하면서 견뎌낼 수도 있지 않을까?

▲ 멀리서 볼 때는 별 것 아닌 듯 보이던 바위들이 가까워질수록 별스럽게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은 숨겨진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질 않았으니 여전히 비어있는 화이트 포켓은 그저 낯선 이의 시선을 따갑게 받아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비어있든 채워있든 상관은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주머니가 비었다고 항상 비어있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채워지는 날이 있을 테고 또 시간이 지나면 다시 비게 되는 것이 당연한 자연의 순환 일터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지금 어떤 역할을 하고 있고, 어떻게 작용하고 있으며, 그들이 지나온 세월을 어떻게 견뎌왔는지에 관심을 갖다 보면 언덕을 오르며 흘리는 땀 정도는 웃어넘길 수도 있을 만한 것이리라.

▲ 주차장에서 만났던 단체 관광객들이 한번 휘 둘러보았는지 벌써 떠나고 있다.

그럴 줄 알았어!

다리를 힘들게 했던 야트막한 언덕을 넘으면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들어오면서 지나왔던 그 모래 많은 황무지가 한눈에 보이면서 강렬한 황톳빛이 저 건너편에 널려있었고, 그들은 하양과 묘하게 어울리며 그곳에 일렁거리고 있었다. 바위는 온통 거북등처럼 갈라져 조각마다 세월을 간직하고, 그런 와중에서도 자신들의 한편을 또 다른 생명들에게 내어주고 있었다. 거미줄처럼 얽힌 세월의 미로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마침내 그들의 속살이 훤히 드러난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들이 견뎌온 시간의 더께마다 천둥과 번개가 있고, 강한 회오리바람이 묻어난다. 때로는 수없이 떨어지는 살별들의 축복을 받으며 자신들이 왔던 곳으로 회귀를 준비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었으리라. 함께하면 어떤 어려움도 좀 더 쉽게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모를 리가 없다.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어느 날 그들이 겪어야 할 이별의 순간이 왔다는 것을 알았을까?

▲ 용솟음이라도 하듯이 황톳빛깔 파도가 용트림을 하고 있다. 옆 동네에 있는 '더 웨이브'가 이런 느낌일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또다시 자신의 일부가 되어 다른 생명들에게 한자리 내어주며 그곳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악한 조건이라도 그곳에 적응하여 살아가는 생명들은 있게 마련이고, 그 생명체들 때문에 주변의 생태계가 맞물려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비록 그들이 아무리 하찮아 보인다 해도 생태계의 한 점을 담당하고 있는 어엿한 독립적인 생명체임을 인정해 주는 일은 모름지기 자연의 구성원이 해야 할 마땅한 일일 것이다.

▲ 모양은 달라도 그들은 그렇게 작은 공간에서 생명을 유지하고있다.


어떤 곳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는 것은 참 어렵다. 어떤 일을 한 가지 특징으로 나누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 생명을 가진 것은 더더구나 어려워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왜 그럴까?  세상의 모든 것은 한 가지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도 그럴 것이다. 누구는 만나고 누구는 헤어지며, 어떤 이들은 오르고 어떤 이들은 내려온다. 헤어졌다 다시 만나기도 하며, 오르던 사람이 다시 내려오기도 한다. 울다가 웃기도 하고, 웃으며 헤어지기도 한다. 행복한 것 같은데 또 슬픈 건 무슨 까닭인가? 누군가 기백이 없어 보인다고, 누구는 지나치게 설쳐댄다고 나무랄 것도 없다. 때로는 그랬다, 때로는 그러지 않았다, 시시때때로 저랬다 하는 것이 살아있는 것들의 살아있다는 증거 이리라.

▲ 그 척박한 땅에서 군락을 이루며 살아내는 생명체들도 많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지

들이 여기에 있으면서 겪은 일들을 차마 상상으로라도 복기해 보는 것은 말도 되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겨우 잠시 다녀갈 뿐인 사람이 그들이 견뎌온 세월의 흔적을 어떻게 다 해독할 수 있겠는가? 오랜 시간 동안 햇빛과 바람과 비, 천둥과 번개, 가끔씩 그들은 방문하는 불청객들, 그들의 곁을 요청하던 수많은 씨앗과 움들과 서로 흔들리고 비비다 부대끼고 깎이기를 수도 없이 되풀이 해왔을 그들의 의연함이 가상할 뿐이다. 그들이 견뎌온 역사에 감사할 따름이다. 잠시 다녀가면서 흔적만 남기고 가는 것이 못내 미안하고 아쉽다.

▲ 상상도 하지 못할 시간 동안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바위들이 대견하다.


깊이를 무시하는 일은 어리석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은 편파적일 수 있다. 당장 어떤 느낌이 없다고 배움이 없다고 여기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스스로 나서서 자신을 설명하거나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참 위험하다. 몇 천년, 몇 만년, 몇 백 만년을 버티며 이곳을 지키고 있었을 그들의 기개 앞에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잠시 둘러볼 따름이다.

▲ 아무런 표시도 흔적도 남기지 말고 겸손히 그들의 세월을 보고 듣는 일에 집중해본다.


추억은 주머니를 털고

많이들 경험하겠지만 여행지에서 겪는 다양한 종류의 일들이 기억에 남아 두고두고 생활의 활력소가 되거나 다음 여행을 위한 힘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와 여행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추억이 있는 여행지가 나오면 좀 더 생생한 기억으로 대화를 이어가게 되고, 이야기는 더 큰 활기를 띠게 마련이다. 이번 여행에서도 이런 추억거리가 있어 소개하려고 한다.

이 사진은 어떤 상황일까?

이 장면은 아직 날이 밝은데도 집으로 가려고 길을 나선 상황이다. 처음 계획은 여기서 하루 묵으면서 밤하늘의 촘촘한 우주와 그동안 밀렸던 이야기를 나누다 아침이 되면 다시 떠오를 해를 만나러 동산에 오를 작정이었다. 그런데 오후 들어 왠지 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침에 들어올 때 모래 언덕을 내려오면서 느꼈던 그 푹신한 느낌이 웬일인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둘러보고 좀 일찍 여장을 챙겨 출발하려고 나섰으나,


 '아니나 다를까?'  

차가 언덕을 오를 수가 없었다. 서둘러 4륜 구동으로 전환하고 다시 해 보았지만, 그럴수록 차는 헛바퀴만 돌며 더 깊은 고랑만 파고 있었다. 마침내 바퀴가 꼼짝을 안 하는 상황까지 왔다. 별의별 짓을 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쩌지, 전화도 안 터지는데?" 그렇게 두어 시간 씨름을 하다가 혼자 힘으로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주차장 쪽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야 했기 때문에 서둘렀는데, 그럴수록 발밑의 모래는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다행히 차가 한 대 있었지만, 운전자를 찾을 수가 없다. 황망히 다시 저 언덕을 올라 사람을 찾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에 서넛의 차량이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네들의 도움으로 전화가 터지지 않는 지역에서도 비상전화는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고, 911에 전화해 그네들이 견인회사와 연결을 해줬다. 그리고 그들이 이곳까지 들어오는데 두 시간 남짓 걸리니 기다리라는 확답을 받고야 겨우 긴장을 풀을 수 있었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두어 시간 고생할 때는 얼마가 들더라도 빠져나가기만 하면 될 성싶었다. 그런데 막상 계산서를 받고 보니 720불이나 나왔다. 왜 이리 비싸냐고 했더니 오지인 데다 토요일 오후 시간이라서 그렇단다.  

"이번 여행은 좀 비싼데?"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밖으로 나오니 해는 이미 서산마루로 떨어지고 없었다. 이제 밤을 도와 집으로 향하면 된다. 밤새 운전하는 것은 이제 이골이 났으니 걱정은 없지만, 두고 온 화이트 포켓이 좀 아쉽다. 그들이 들려주는 밤하늘 이야기에 큰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황망히 돌아가려니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나오는 길에 얼핏 주차장을 보니 그 시간에 들어와 텐트를 친 사람들이 몇 있었다.


"아, 이러면 되겠구나!"


그제야 화이트 포켓을 제대로 둘러볼 방법이 생각났다. 한낮의 뜨거운 햇살이 드는 시간에는 주변의 다른 곳을 여행하다가, 느지막하게 들어와 넘어가는 해와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 '블루 아워에 빛날 화이트 포켓은 어떨까?' 기대하며 선선한 바람이 실어다 줄 밤하늘의 속삭임을 기다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가신 사막의 선선한 공기를 맞으며 잠시 산책을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잠을 설치는 한이 있더라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 캄캄한 어둠 사이를 뚫고 쏟아지는 별빛의 세례를 받으면 좋겠다. 동녘 하늘이 뿌옇게 물들 무렵 살포시 든 잠에서 깨어나 비쳐오는 햇살을 맞으며 하루를 시작하여 그들의 진면목이 어떤지 백일하에 확인하게 됐으면 좋겠다.


바라기는 더 웨이브 추첨에서 당첨되어 다시 이곳을 찾을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그 날을 위해 어둠 속에서도 좀 더 편안한 진입로를 확인하기 위해 증거를 남겼다.

▲  기운 햇살 속에서도 다음을 위해 진입로를 확인해 두었다.








다음은 '레드 락 캐니언 주립공원(Red Rock Canyon CA State Park)'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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