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서면 바로 시작되는 것이 여행인 것 같아도 진정한 여행의 시작은 다른 곳에 있다. '가던 길에 대해 드는 갑작스러운 의구심에 따르는 일', '저 멀리 보이는 산 등성이의 예쁜 빛깔이 궁금해질 때, 신호등 앞에 서서 직진하지 않고 돌아서기', '반듯한 길을 마다하고 굳이 험하고 굽은 길로 들어서기'를 할 때 비로소 여행은 시작된다. 그때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이 있다.
그렇다고 풍경이 별스럽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돌덩이 하나, 산등성을 휘어 넘는 구름 한 조각... 모든 자연은 다 제지리를 지키고 있을 뿐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큼 세상이 달라 보인다. 그 틈 속에서 시작하는 것이 여행일 것이다.
길을 떠나는 일은 변형이 있고, 왜곡이 있고, 변곡도 있다. 반듯한 길에서 벗어났을 때 찾아오는 아슬아슬한 긴장감 한 숟갈, 조마조마한 불안감 한 숟갈이 더해져서 여행은 더욱 재미있어진다. 일상에서 겪는 것들을 그대로 여행에서도 겪는다면 굳이 길을 나서는 이들은 많지는 않을 것이다. 길을 나서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무언가를 무릅쓰고라도 길을 떠나려는 것이다.
길을 가다 바라본 저 산등성이가 궁금해졌다.
살다 보면 주변에 있는 많은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지는 것을 경험한다. 달라지지 않는 것이 없을까 찾아보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기에는 물론 사람도 포함된다. 오래 알고 지내다 보면 옆사람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의 변화는 한눈에 눈치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무엇인가가 달라졌다고, 전과 같지 않아 불편하다고, 아니면 서먹서먹하다고 투정하는 일은 없어진다. 그런 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들이 간혹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사람의 마음, 혹은 사랑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연환경이다. 주변 경치가 뛰어난 곳이거나, 경치는 그다지 뛰어나지는 않지만 왠지 마음에 드는 곳인 경우 시간이 지나서 다시 와도 그 경치가 그대로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그래서 어느 곳에서 어떤 느낌으로 여행했는지 기억해 두었다가 그런 느낌을 다시 느껴보고 싶을 때 다시 한번 가면 좋을 것 같다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부질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바뀌고 있으며, 사람의 마음도 역시 같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풍경이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의 마음과 느낌은 수시로 변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는 같은 풍경을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다. 같은 장소라고 해도 두 번째의 방문일 때 미세하기는 하지만, 달라진 부분이 있고 무엇보다도 사람의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곳을 바라보는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길을 나서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 늘 봐왔던 풍경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아름다워 보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별스러울 것 없는 풍경이 오늘따라 전에 없이 반짝거린다
뜻밖의 일이 생기면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되려 즐거워지기도 한다. 일상생활에서는 물론이고 여행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여행을 할 때는 갈 거리가 먼 경우, 계획을 세우는 일과 사전 조사 등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지나친 준비가 여행의 즐거움을 앗아가기도 한다. 소위 일정에 맞추느라 정작 즐기고 느끼며 감사해야 하는 곳에서조차 발을 동동거리며 다음으로 이동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이런 걱정을 내려놓는 일이 우선되고, 일정에 목메는 일을 그만두는 그 순간부터 여행은 즐겁고 행복해질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집을 나서서 어디론가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변에 존재하는 것들과 교감하고 호흡하며 즐기는 것이 여행이란 것을 잊어버리지만 않는다면 도심이든 교외든 어디에 있든 크게 문제가 없다. 이런 생각은 일상을 여행처럼 살 수도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렇게 살기 어려운 까닭은 일상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과 태도, 일상이 주는 압박과 부담 등일 것이다. 이런 까닭에 여행을 하려면 일상으로부터 잠시 단절하고 새로운 길을 꾀하는 것이리라. 일단 일상이 주는 압박과 부담에서 벗어났으면 더 이상 다른 압박은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길을 떠나기에 앞서 이런저런 부푼 기대는 잠시 보류하고, 혹시라도 세워놓은 계획서가 있다면 만일의 경우를 위해 고이 간직만 하고, 이런저런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들은 내려놓도록 하자.
저녁 노을은 늘 곱기만 할 것이라는 기대가 어긋날 때도 있다.
"바람의 잔소리가 심하면 잠시 귀를 막자."
길을 나서면 비운 마음에 무엇이 채워질지 기대하며 주변을 살피는 데 집중한다. 어느 길에서든 마음이 움직이면 가던 길을 멈추기도 하고, 샛길로 빠지기도 하다가, 또 다른 길이 보이면 그 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것들을 천천히 살펴본다. 나무며, 바위며, 풀이며, 물이며, 뭍이며... 그곳에 터 잡고 살아가는 생명들이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그리고 잠시 누워 떠가는 구름이 노니는 하늘은 어떤 빛깔로 이 땅에 내려오는지, 길고 깊은숨으로 호흡해본다. 그들이 주는 느낌이 폐를 통해 핏줄을 타고 온 몸으로 흐르면 이내 즐겁고 행복한 기분에 젖을 수 있다. 고백하건대 이미 멋지거나 아름다운 풍경은 뒷전이다. 그들이 나의 주관적 판단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이미 잘 알고 있다.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여행한다는 것을 그동안 잘 몰랐다. 그런데 이번 여행을 하면서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잘 찾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어렵게 찾아들어가면 이미 그곳에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물다 가는 곳과 비교했을 때는 상당히 호젓하고 고즈넉하여 주변의 자연과 교감하기에 충분하지만, 그곳에 홀로 찾아들 때 느낄 수 있는 외롭고 쓸쓸한 분위기는 맛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기도 하다. 한 가지 좋은 점은 말은 하지 않지만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동질감 같은 것을 은연중에 나누게 되면서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별다른 대화 없이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어떤 생각과 느낌으로 그곳에 있는지 알게 된다. 이날 만난 할머니 한 분은 호젓한 곳에서 홀로 사나흘을 지내다 가기도 한다고 귀띔해 준다.
그곳에서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 동지요 이웃이다.
인간이라는 생각, 만물의 영장이라는 생각, 우리가 그들보다 뛰어나거나 수준이 높다거나 하는 생각 등 그동안 지니고 있던 고정되고 고착되었던 많은 생각들은 그 순간만큼은 기억조차 없다. 그렇게 길이 던지는 추파에 속절없이 넘어가기를 되풀이하다 보면 처음에 가보고 싶었던 곳이 어딘지 기억에서 사라지거나, 이미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도 한다.
'도대체 어느 천년에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다가도,
서는 곳마다 다른 존재들, 다른 생명들과 조우한다. 그저 멈춰 서서 그들과 함께 호흡하는 일, 지나는 바람의 잔소리가 심하면 잠시 귀를 막고 무시해 보는 일, 혹은 속삭이듯 지나는 바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 하찮아 보였던 사물과 소원했던 관계를 회복하는 일들에 흠뻑 젖다 보면, 어느 틈엔가 길은 새로운 풍경을 열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지나쳐 온 길이 뒷목을 잡으면 지체 없이 발길 돌리기를 서슴지 않으면서도, 그저 무심하게 지나는 길에는 아쉬움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써 눈길을 돌린다.
마음속 한편에서는 '지체되는 발걸음을 재촉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소리도 들리고,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하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잠자리, 바로 그렇다! 지난 여행에서 눈여겨봐 두었던 야영장은 선착순이기 때문에 좀 늦은 시간에 도착하면 자리를 잡기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차선책이 물론 있기는 하다. 예약이 되질 않는 곳이니 여기도 물론 선착순 이겠지만, 눈여겨봐 둔 곳에서 시간 반이나 떨어져 있다는 단점이 있다. 잠자리를 위해서는 발걸음을 좀 재촉하기로 했다.
일단 서두르는 것으로 하기는 했지만 어쩐 일인지 썩 내키지는 않는다. 길섶 풍경이 눈에 밟혀 여전히 는적거리며 길을 가다, 마침 밥 먹기 좋은 장소가 나타나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주변을 둘러보니 여전히 눈길을 끄는 풍경이 쏟아져내린다. 길 아래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에 끌려 언덕을 가로질러 내려가 보았더니, 그곳은 길옆 높직하게 솟은 바위 풍경과는 영 다른 모습으로 반겨준다. 벌써 옷을 바꿔 입은 아스펜 나무들이 물길을 따라 줄지어있고, 그 사이를 신나게 흐르는 개울은 아직도 여름 인양 소리가 제법 우렁차다. 그렇게 딴전 피우는 사이에 또다시 재촉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가야 할 모양이다. 잠자리를 마련하려면 너무 늦으면 안 될 테니.
"그렇게 다가와 살짝 눈인사만 하고 스친다."
굽이굽이 산길을 오르내리다 보니, 제법 높직한 곳에 마련된 전망대가 보인다. 그냥 갈 수는 없다. 주변이 훤히 보이는 꽤 좋은 위치에 있는 전망대라서 망원경으로 주변을 탐색해 본다. 저 멀리 자이온 국립공원도 보일 만큼 전망이 좋다. 어느 틈엔가 이미 이산 저산 구석구석 널찍하게 가을이 자리를 잡았다. 멀리서 보기에는 그리 예뻐 보이지 않던 빛깔이 망원경으로 가까이 당겨보니 이미 이곳에는 가을이 깊다.
'전망'이란 그렇게 널찍이 한눈으로 조망해 볼 수 있는 까닭에 주변 경관이 잘 보이는 곳에 전망대가 설치된다. 내 삶에도 이런 전망대 하나 있으면 좋겠다. 한참을 그렇게 보고 있자니 가까이 다가가서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다음엔 저 쪽 어딘가로 다녀오리라 다짐하고 아쉬운 마음을 거둬 다시 길을 나선다. 가을은 그렇게 먼 걸음을 한 사람들에게 다가와 살짝 눈인사만 하고 스친다.
뒤 쪽으로 보이는 시커먼 산들이 자이온 국립공원이다. 그러고 보니 이 길 UT-14도로가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곳이던가?
어느 만큼을 가니 눈에 들어오는 이정표가 하나 있다. '시더 브레이크스 내셔널 모뉴먼트 (Cedar Breaks National Monument)'. 무려 '내셔널 모뉴먼트'가 이런 곳에 있다니! 전국의 국립공원을 다 꿰고 있는 것은 아니니, 어디인들 있을 수 있겠지만, 우연하게 접어든 곳에서 만나니 그저 반가울 따름이다. 반가운 마음에 공원 안내소에서 자세한 정보를 얻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데 일부 지형은 브라이스 캐년 국립공원과 닮아있고, 또 일부 지역은 이곳만의 특징을 지닌 지형을 하고 있다.
몇 곳에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고, 서너 곳의 하이킹 코스도 마련되어 있으며, 캠프 그라운드도 있다. 그러나 우연이 가져다준 행운을 다 누리지는 않기로 했다. 공원 안내 센터 뒤쪽에 난 짧은 탐방로를 돌아본 뒤 빠져나와 다시 길을 나섰다. 나중에 공원안내서를 보니 이곳은 해발 3,000미터가 넘는 고원지대에 있다.공원 안내센터가 있는 곳의 해발이 무려 3,154미터나 된다. 겨울 평균 적설량이 4.5미터, 최고 적설량은 무려 14미터나 되는 지역이다. 눈에 뒤덮인 공원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이번 겨울에 꼭 한번 와볼 만하겠다 싶다.
브라이스 캐년 국립공원과 많이 닯았다. 하긴 그곳과 그리 멀지도 않다. 불과 한 시간 거리다.
길은 이어져 늘 그곳에 있지만 길 위에 있는 우리는 그들과는 상관없이 스치고 지나가기를 반복한다. 어느 곳 어느 때든 그곳에 생명이 없었을까? 그러나 우연히 마주하는 나그네들에게야 그저 지나가는 구경거리일 수도 있을 그들의 생명이 어떤 이유로든 가볍게 여겨지지는 말아야 한다. 다시 길을 나섰지만 길섶 양옆에 늘어선 아스펜 나무들의 춤이 마음을 흔들어 다시 또 가다 서기를 되풀이한다. 아직 가을 꼭대기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제 나름대로 멋을 부리며 맵시를 뽐내고 있다. 그들 사이를 헤집고 골 얕은 시내가 졸졸거리는데, 하늘을 나부대는 흰구름이 아직은 따스한 가을 햇살을 농락한다. 갈 길을 잃고 헤매는 나그네는 어서어서 갈 채비 하라는 듯 사시나무(아스펜) 잎 사이를 부지런히 왕래하던 바람은 은근슬쩍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인다. 화들짝! 머리를 들어 앞을 보니 햇살이 뉘엿뉘엿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옳거니, 바로 여기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야영장은 벌써 다 찼다. 오는 동안 '설마... 한 자리 정도는 남아있겠지?' 은근하게 기대하고 왔는데, 그만 다 차 버렸다. 아직 봐 둔 곳이 또 남아있으니, 희망은 잃지 말자. 문제는 시간이다. 이미 기울어진 산간지역의 해는 잠시 한눈파는 사이에 이미 서산에 걸쳐있고, 갈 길은 멀고, 잠자리는 잡히질 않고, 노숙을 하자니 공원 내에서는 그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일단은 '차선책'을 향해 가는 수밖에. 공원을 벗어나 지나가다 보니 길가 으슥한 곳에 간간히 RV들이 서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처음 몇 대는 그냥 지나쳤지만, 갑자기 '뭐지?', '혹시 저기서 자는 걸까?'하는 생각이 든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눈에 띄는 비포장 길로 접어들었다. 안으로 좀 들어가 살펴보니, 비포장 도로 옆으로 널찍한 공간이 있고 야영을 했던 흔적이 보인다. 불을 피운 흔적도 있다. '옳거니, 바로 여기다!'.
잠자리를 잡고 보니 마음이 평화롭다.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세상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은 안도감이 밀려든다. 자리를 좀 정리하고 여유롭게 지는 해를 바라본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그동안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된 것 같다. 그동안은 공식적인 곳(캠프 그라운드, 휴게소, RV 그라운드 등)에서만 잠자리를 마련했는데, 굳이 그럴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처럼 비공식적이기는 해도 주차 공간이 있고, 텐트 칠 공간이 있으면 잠자리를 잡아도 흠이 되지 않겠다 싶다.
부지런히 저녁을 해결한 뒤 눈을 붙이고 해 돋는 기색에 눈을 떴다. 눈곱을 떼고 잠자리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보니 온하늘에 구름이 한가득이다. 때마침 옅은 구름 틈을 비집고 해가 솟아오르려는지 붉은 노을빛이 역력하다. 서둘러 사진기를 준비하는 동안 구름이 점점 더 붉어지더니, 사진 몇 장 찍고 나니 이내 그마저 사라져 버리고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어버렸다. 비가 오려나? 서둘러 채비를 하고 UT-24번 도로에 차를 실었다.
밤에는 별이 총총,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온 하늘에 구름이 잔뜩이다. 잠시 구름 사이로 보이던 햇살은 이내 모습을 감추더니 다시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감탄사만 연발하다, 이내 신음을 토해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좀처럼 걷힐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햇살 가득한 하늘이 좀 더 흥미로운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아주 조금은 아쉽다. 뭐, 구름이 있으면 있는 대로 다양한 얼굴의 하늘을 배경으로 삼을 수 있으니 그러면 됐지 싶다가도, 자꾸만 구름의 양을 가늠해 보게 된다. 이런 마음과는 상관없이 구름과 하늘과 길이 펼치는 극적인 정경은 보는 이의 마음을 훔쳐 갈길 바쁜 나그네의 발목을 잡는다. 발목을 잡으면 잡히는 게 순리 아니겠나! 다시 또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멀리 보이는 하늘에서는 빗줄기가 거세 허허벌판에 뜬금없이 솟아있는 산봉우리들을 더욱 신비롭게 만든다. 달리 표현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저 감탄사만 연발하다, 이내 신음을 토해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보니 멀게만 보이던 빗줄기가 코앞까지 와버렸다. 약한 빗줄기가 차창을 두드리더니 기어코 여름 장마처럼 거센 빗줄기로 변해 앞을 가로막는다.
비가 좀 뜸 한가 싶더니 고블린 밸리로 접어드는 길목에 들어서니 다시 또 장대비가 내린다. 흠, 비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런 비는 좀 사양하고 싶다. 이럴 경우 두 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고블린 밸리의 후두들과 조우가 어려워질 수 있는 것이 첫 번째 문제다. 듣기로 그곳은 황토 벌판에 후두들이 자라고 있어서 비가 오면 황토 진흙탕으로 변신한단다.
또 한 가지는 고블린 밸리를 방문하고 가려고 했던 오프로딩이 힘들어진다. 진흙밭이 된 길을 들어가는 일은 상당한 모험이 예상된다. 짧은 거리라면 사륜구동의 힘을 믿고 시도해 보겠지만, 수십 마일은 엄두를 내기가 어려운 거리다. 그런데도 언제나 그랬듯이 가던 길을 멈출 수는 없다. 빗줄기는 멈출 줄 모르더니 방문자 센터에 다다르니 언제 그랬냐는 듯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대신 하늘엔 서서히 걷히는 구름과 그 사이로 틈틈이 보이는 파란 하늘이 진한 대비를 이룬다. 막상 공원 안에 들어서니 오면서 했던 염려가 기우였나 보나. 일부 질척거리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비가 내린 흔적이 풍경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었다.
"도깨비가 산다고?, 고블린 밸리(Goblin Valley)"
요즘도 장기(將棋)를 두는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장기를 처음 시작할 때 장기알을 배열하는 순서가 있다. 맨 앞에는 사병을 세우고, 그 뒤로 대포, 전차 등 무기병을 세운 다음 맨 뒤에 호위병이 있는 왕을 배열하게 된다. 고블린 밸리의 주차장에서 내려다본 첫 느낌이 딱 장기의 배열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맨 앞쪽으로 키가 작고 아기자기한 고블린 후두들이 자잘하게 늘어서 있고, 그 뒤로 큼지막하고 믿음직한 고블린 후두들이 병풍처럼 서서 배후를 형성하고 있다.
겉보기에는 아기자기하고 별반 볼만한 것이 없을 것 같던 고블린 밸리 주립공원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다양한 표정의 후두들이 순순하게 발걸음을 뗄 수 없게 한다. 공원은 분지 지형에 형성된 후두 군을 돌아볼 수 있게 되어있다. 다른 곳과는 달리 공원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살펴볼 수 있는 이곳의 후두는 다른 지역에 있는 후두들에 비해서 크기가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그보다 몇 배나 큰 후두까지 크기가 매우 다양하다. 계단을 내려가야 본격적으로 후두 천국을 탐색해 볼 수 있는데, 내려가지 전에 보이는 후두들은 장기판은 너무 작고, 마치 어느 전쟁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비가 왔는데도 이미 많은 이들이 후두 사이를 누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 단위 여행객들부터 백발의 노부부들까지 나이를 가리지 않은 사람들이 제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여념이 없다. 그들의 번잡한 공간을 피해 변두리로 돌아 저 멀리 병풍처럼 둘러선 후두들부터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한적하면 주변이 더 잘 보이는가 보다. 비가 내린 흔적이 곳곳에 있다. 살짝 젖어있기도 하고, 갑자기 퍼부은 물이 도랑을 만들어 흐른 자국이 선명하기도 하다. 빗물의 흔적을 보면서 오랜 시간 동안 물이 흐르다 보면 캐니언이 만들어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인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스럽게 일깨워준다. 그러고 보면 이곳에 있는 수많은 도깨비 후두들도 빗물이 만들어냈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니 소름이 돋는다.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들이 없고, 같은 크기가 둘도 없을 만큼 제 각각인 저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연이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그에 비하면 사람이란 얼마나 작고 나약한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공원이 생각보다 크다. 언덕을 넘으니 또 다른 언덕이 있고, 그 너머에 또 다른 너른 곳이 있다. 이마에 제법 땀방울이 맺힐 무렵부터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다. '무엇이든 한눈에 알아보기는 어렵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무엇을 판단해서는 안 되겠다; 좀 안다고 잘 아는 척하지는 말자.'등등 공원을 너무 낮잡아 본 것이 후회되는 생각들 말이다. 후두들은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너무나 생생한 표정에 놀라기도 하고, 진짜 있는 어떤 것과 너무나도 닮아서 놀라다가, 곧 무엇인가 닮은 모습을 찾는 일은 포기하고 넓은 시야로 바라보기로 했다. 수많은 후두들 하나하나 살펴본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소문나지 않은 길: 와일드 호스 로드(Wild Horse Road)"
지난 글 '10월, 캘리포니아'에서도 짧게 말했지만,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차 때문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곳이 많았는데, 드디어 얼마 전에 이 문제를 해결했다. 지난 여행부터 조금씩 험한 길을 찾아들어 그동안 쌓인 한(?)을 풀기 시작했다. 사실은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이 길을 들어와 보고 싶은 마음에 갈 곳을 이곳으로 잡았던 것인데, 여러 가지 유혹에 넘어가는 바람에 오는 길이 많이 늦어졌다. 마침내 오래 묵은 숙제를 한 느낌이랄까? 이 길은 '와일드 호스 로드(Wild Horse Road)'라고 불린다.
이름이 어찌 생겼는지 알 길이 없지만 아마도 옛날에 야생마들이 다니던 길목이었거나, 주변에 그런 길이 있었을 것이다. 미국 사람들이 보통 이렇게 길 이름을 짓기 때문이다. 여기는 지도를 보다가 알게 되었다. 구글 지도, 특히 위성 지도나 구글 어스를 이용해 검색하다 보면 특이 지형이나 경관이 괜찮아 보이는 곳을 발견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지역이라면 사진이 올라와 있는 경우도 있어서 그곳의 사정을 미리 알아볼 수 있다. 위성 지도나 구글 어스는 여행자들에게는 참 고마운 프로그램이 아닐 수 없다.
지도에서 이런 지형을 보면 마음이 설렌다[구글 맵 캡춰].
길은 '리틀 와일드 호스 캐니언과 벨 캐니언(Little Wild Horse Canyon and Bell Canyon)'으로 들어가는 주차장을 지나면서 시작한다. 이 캐니언은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좁은 계곡(Slot Canyon)으로 이름나 있다. 여기를 다녀오는 것도 욕심을 냈지만, 들어가는 곳에 있는 안내판을 보니 꼬박 하루가 걸리는 거리라서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고블린 밸리 주립공원에서 이곳까지는 포장된 도로로 오면 된다. 이곳을 지나면서부터 길은 포장되지 않은 데다 잘 다져놓지도 않아 몹시 울퉁불퉁하다.
게다가 비가 그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금 질척하기도 하다. 느낌으로는 어려운 운전기술이 필요한 비포장도로 같아 좀 긴장이 됐다. 짐작한 대로 길은 굉장히 거칠었다. 길바닥에 있는 바위며 자잘한 돌들 때문에 차는 옆으로 기우뚱거리다 덜컹거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도 차창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근사하다 못해 얼이 빠질만하다. 얼마만큼 가다 보니 누군가가 야영을 하기 위해 다져놓은 곳이 보인다. 이곳에 머물며 늦은 점심도 해결하고, 거친 광야의 숨결을 느껴며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이곳에서 야영을 하면 좋겠다.
끊임없이 펼쳐지던 길은 모퉁이를 돌아 언덕을 오르고, 봉우리에서 다시 모퉁이를 돌다 이내 길고 긴 내리막을 달린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언덕을 오르고 내릴 때마다, 저마다 다른 풍경이 마치 천천히 돌아가는 영화의 장면들처럼 펼쳐진다. 차 안에 앉아 지나치기에는 너무 안타까워 가다 서다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바깥세상과는 태어난 것부터 달라 보이는 땅의 모습과 오묘한 빛깔이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져 있다. 때마침 먹구름이 밀려난 자리에는 슬그머니 흰구름이 들어차고, 그들이 자리다툼 하는 사이 파란 하늘이 그 틈을 비집고 고개를 내민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너른들과 낮은 봉우리, 멀찌감치 보이는 높직한 뷰트(Butte)가 비가 그치고 생긴 옅은 물보라에 가려 마치 동화에 나오는 오래된 성을 보는 것 같다. 길이 몇 구비를 넘자 땅은 느닷없이 드넓은 풀밭으로 바뀐다.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펼쳐지는 자연이 베푸는 은혜는 그저 고맙게 받아들일 뿐이다. 때 마침 노란 가을꽃이 흐드러진 모습을 보니 계절은 어느 곳이든 어김이 없으려니 한다. 거칠고 메마른 너른들에 돋아난 생명들을 보니 틀림없이 가까이에 흐르는 물이 있겠다. 물이 흐르는 곳은 어김없이 풀이 자라고, 나무가 크고, 갖은 물고기며 물에서 사는 생물들이 번성한다. 그러고 보면 물은 생명의 시작점이 아닐까 싶다.
여행자에게 물이란 때때로 갈 길을 막는 걸림돌이 되고는 한다. 지도에 표시된 길은 물길에 막혀 수풀이 우거지고, 더 이상 사람의 발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주변을 헤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풀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가 보지만, 이미 돌아선 물길은 더 이상 마음을 열지 않는다. 길이 막혔으니 더는 앞으로 갈 수 없다. 그렇다고 옆 길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온 길을 되돌아 나가는 수밖에 없다. 지도만 보고 길을 찾아갈 때 이런 경우가 가끔씩 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이야 자주자주 고쳐놓겠지만,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는 이런 뒷길까지는 신경을 쓰기 어려운 모양이다. 한 가지 가르침을 얻었다. 사람이 잘 잧지 않는 뒷길을 갈 때는 그곳을 관리하는 곳(토지관리사무소 BLM, Bureau of Land Management)에 먼저 확인을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만두기에는 가지 못한 길이 너무 궁금하다. 서둘러 반대편 입구로 가서 가지 못한 길을 마무리해 보기로 했다. 해가 기울고 있기 때문에 나가는 길은 좀 서둘렀다. 들어올 때 본 경치와 같건만 나갈 때는 자못 달리 보인다. 보는 때와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그리고 볼 때의 마음가짐에 따라 경치가 이렇게 달라 보일 수 있다는 데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불길은 산을 휩싸더니 이내 빠르게 사그라든다."
부지런히 달려 막혔던 곳까지 가려고 애는 썼는데 어둑해지는 하늘이 문제다. 기우는 햇살이 그렇지 않아도 멋진 풍경을 더욱더 빛나게 만든다. 더 이상 가기를 멈추고 돌아섰다. 하늘이 펼치는 빛 잔치가 갈길 바쁜 나그네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천천히 속도를 늦추고 길어지는 산 그림자를 밟으며 서녘 하늘을 바라봤다. 어느 여행지에서든 이 시간이면 늘 서쪽을 향했다. 가던 방향이 아니면 돌아서서라도 지는 해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하늘을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날따라 하늘은 남달리 붉게 물들었다. 떨어지는 햇살이 천천히 땅거미를 드리우자 산봉우리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는지 거친 들을 달려 저 멀리 땅끝까지 한걸음에 다다른다. 순식간에 불길은 산을 휩싸더니 이내 빠르게 사그라든다.
해가 재빨리 모습을 감추자 느닷없이 서녘 하늘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아주 짧게 불길은 온 하늘을 태울 듯이 번지다가 옅은 흔적만 남기고 검은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동안 하늘이 펼치는 불꽃 잔치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으니 세상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고 있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고, 슬프다가 기쁘기도 하여 늘 즐겁기만 할 수가 없듯이 노을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지만 이 또한 다시 새로운 날을 시작하기 위해 거쳐가는 길목이다. 하루가 쌓여 살림살이가 되고, 긴 세월 동안 이어져 켜켜이 쌓이면 사람살이가 되어 이 땅을 받쳐주는 기둥이 된다. 그 돌아가는 고리 속에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우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