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펜(Aspen)에 물들다
하이! 시에라.
10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더위에도 불구하고 아침. 저녁의 기온은 좀 선선해져 자연의 법칙이 아직은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즈음이면 물들기 시작하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사시나무(Aspen)가 가을의 전령사 노릇을 하면서 열사의 땅 캘리포니아에도 가을이 왔음을 알린다. 지난 여행에서 캘리포니아보다 먼저 가을빛에 잠기기 시작한 유타주의 단풍을 살짝 엿보고 욌는데, 이번엔 아스펜(Aspen)에 물든 하이 시에라(High Sierra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고원지역)에 속하는 비숍(Bishop) 일대의 단풍에 젖었다. 바람에 전해오는 아스펜(Aspen)의 가을 소식에 열일 제치고 주말을 이용해 다녀왔다.
아스펜(Aspen)을 찾아서
가을 캠핑은 여름 캠핑과는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물놀이와 야외 활동이 주를 이루는 여름 캠핑과는 달리 가을 캠핑은 캠핑장에 찾아든 가을빛과 함께 있어 즐겁다. 아침저녁으로 비스듬히 스며드는 햇살에 가을빛 단풍은 더 풍성한 빛깔을 보여준다. 밤이면 영하의 기온을 넘나드는 하이 시에라의 한기는 자연스럽게 모닥불을 부르고, 모닥불 주위에 둘러앚아 두런거리는 이야기 속에 시름과 한과 즐거움, 희로애락을 녹여낸다. 제법 알이 굵고 못생긴 고구마를 골라 구워 먹는 즐거움은 덤이다. 주변의 불이 하나 둘 사그라질 무렵 올려다본 하늘에서는 반짝이는 별들의 축제가 한창인데, 어디선가 살별 하나 획! 하늘을 가르고, 제법 기운 은하수 사이로 마음속 소원 하나 올려 보낸다. 아직 한기가 가시지 않은 새벽녘, 떠오르는 햇살이 밤새 잠들어 있던 만물을 깨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샛노랗게 물든 키 작은 사시 나뭇잎이 햇살에 반짝이고, 더불어 물든 주변 식물들도 덩달아 아침임을 외친다. 거칠기로 이름난 하이 시에라의 산군에도 햇살이 내려앉자 거대한 바위 산들이 조금씩 조금씩 살아나 마치 대순처럼 자라난다.
햇볕이 따스한 아침나절에 길을 나섰다. 낮 기온이 여전히 뜨거운 캘리포니아의 가을은 갖은 과일이 익어가는 데 제격이다. 과일뿐만 아니라 단풍이 드는데도 알맞은 햇빛은 빛깔 고운 가을을 선물한다. 비숍 인근의 하이 시에라 에는 과일나무는 없지만 아스펜이 많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가을이면 이곳의 산과 들은 노랑으로 바뀐다. 그러나 아스펜 숲은 온 산을 뒤덮을 만큼 많지는 않다. 주로 물이 흐르는 계곡이나, 물이 고여있는 호수, 연못, 웅덩이를 중심으로 자라기 때문에 한국의 산천을 뒤덮는 단풍의 물결은 이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식물이란 것이 한 구역에 한 종류만 서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때때로 아스펜 틈 사이에 다른 빛깔의 단풍이 섞이기도 하지만, 한눈에 보이는 것은 역시 아스펜의 노란 단풍 무리다. 특이한 것은 길가에 피는 가을꽃들, 드넓은 벌판을 가득 메운 덤불 무리들이 피운 꽃이 모두 노랑뿐이라서 그들도 단풍처럼 보여 아스펜의 개체수에 비하면 의외로 넓은 지역에서 가을빛을 볼 수 있는 셈이다. 벌써 세 해째 가을마다 비숍을 찾고 있지만, 그때마다 숲이 주는 느낌이 다르다. 새로 자란 나무도 있겠고, 생명을 다한 나무도 있겠지. 저기 보이는 호수, 저 계곡에 물든 사시나무 무리들, 흐르는 물줄기, 저 멀리 보이는 폭포까지 작년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데도, 매년 올 때마다 다르게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해가 거듭될수록 감정의 더깨도 쌓여가기 때문일까? 느낌이라는 것이 여러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지난해 본 풍경과는 판이한 느낌은 어쩔 수가 없다. 그저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면 그만이겠지만, 자연의 법칙이 엄연하다는 사실이, 모든 존재들은 모두 생성 소멸의 과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준다.
가을과 겨울이 공존하는 곳
하이 시에라의 가을 속에는 겨울도 함께 있다. 단풍은 고도가 높은 곳으로부터 낮은 곳으로 이동한다. 고산준령이 많은 이곳은 따라서 9월 말이면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곳부터 11월 초나 돼야 단풍이 드는 곳까지 다양한 분포를 이룬다. 시월 초순에 왔던 작년에는 풍성했던 단풍들이 시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사시나무들은 어느덧 옷을 벗고 겨울 준비에 들어섰다. 그도 그럴 것이 고산지대는 이미 9월 말부터 밤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 시작하므로 이른 시기부터 가을 빛깔을 만들어낸다. 게다가 높은 산 봉우리에는 이미 내린 서설과 어우러져 가을과 겨울이 아름답게 공존하고 있다. 옷을 벗은 사시나무들은 그들 나름대로, 반쯤 옷을 벗은 녀석들은 또 그 나름대로 쓸쓸하거나 외롭거나 혹은 아쉽거나 제 느낌을 선사한다. 강태공들에게는 아마도 이맘때가 가장 기다려지는 시기인 것 같다. 화려한 옷을 벗은 나무 숲을 배경으로 한가로이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들은 그야말로 세월을 낚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한낮의 햇빛과 달리 저녁나절의 햇빛은 사물의 빛깔을 더욱 돋보이게 하거나,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노랑 노랑 사시나무 잎은 샛노랗게 만들고, 멀리 보이는 첩첩 산들은 옅은 빛무리에 가려 신비감을 더해간다. 쪽빛 호수에 비친 산 그림자, 빛바랜 수초, 옷 벗은 나무들,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유유히 지나는 쪽배 몇 척이 뉘엿뉘엿 산을 넘는 햇살을 받아 새로운 세상을 연출하고 있다. 이런 장면을 볼 때면 가끔씩은 인생의 황혼기를 맞으면 나도 이들처럼 따스한 빛을 비춰주면서 누군가의 혹은 무엇인가를 지지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영혼을 살찌게 하는 것들
햇살은 여전히 수목 사이를 유영하고, 살가운 바람은 아스펜 나뭇잎들과 애틋한 정을 나눌 무렵, 아스펜 나무 숲을 헤치고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 본다. 수풀의 안쪽 깊은 곳엔 은밀한 정원이 하나 있어 그곳으로부터 생명이 잉태되고 나서 자라 거대한 생명체로 발돋움할 수 있는 자궁이 되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지구가 요통 치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기 시작할 무렵부터 일 것이다. 계곡을 타고 흐르는 냇물은 자신이 이르는 곳마다 새로운 생명을 배태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생명을 담고 오랜 세월 그곳을 지켜왔다. 막힘이 있으면 잠시 멈춰서 있다가, 풀리면 다시 흐르고, 또다시 막히면 넓게 퍼져 웅덩이로, 호수로 서있고, 바위를 피해 굽이치다 낭떠러지에서는 힘차게 쏟아붇는다. 세월이 흘러 한 생명이 가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를 반복하는 동안에도 자궁은 폐기되지 않고 제 역할을 다해왔다.
인간은 오랜 세월 동안 '변화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연구하고 실험하고 고민을 거듭해왔다. 변화의 결과물로서 자신의 죽음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왔다. 물질로 구성된 물리적인 특성을 극복할 수 없다는 거의 절망적인 결론에 대하여 인간은 다른 대안을 고안해 냈다. 모든 것, 그러니까 인간 주변에 있는 다양한 사물과 동. 식물들이 결국은 변화의 한계 내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인간만큼은 그 변화의 사이클 밖의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자신이 처한 한계, 유한함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망각' 내지는 '대치'시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은 영원불변이라는 결론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얻은 것은 불변의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인간도 어쩔 수 없음에 대한 위로와 위안일 것이다. 생명의 원천으로서 자궁이 폐기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또 다른 것으로 대체됨으로써 그 역할을 다해 온 것이라는 것, 그럼으로써 겉으로 보기에는 폐기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진실이다. 그것이 변화를 해야만 하는 자연의 법칙이지 않던가.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도 역시 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거기에 맞는 또는 그 수준의 사고와 삶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지금은 멈춰있는 듯한 삶이라고 해도 결국 다시 흐르게 될 것이고, 지금 흐른다 해도 언젠가는 또 멈출 수 있으며, 낭떠러지에서는 떨어져야만 하는 그런 존재로서 인간임을 인정하면서 살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가져본다.
사막에도 가을이 앨라배마 힐즈(Alabama Hills)
빛깔에 현혹되어 이곳저곳 헤매다 지구 상에는 있을 법하지 않은 풍경을 만났다. 앨라배마 힐즈(Alabama Hills), 그곳은 드넓은 사막에 뜬금없는 바윗덩이들이 여기저기 솟아있어 특이한 장면을 연출하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하이 시에라의 드높은 산들과 지척에 있으면서도 그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모양의 바위와 지형이 특색인 곳이다. 지형이 이렇게 특이하다 보니 미국에서 제작된 많은 수의 영화와 드라마들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이곳이 거친 황무지인데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데는 이런 까닭 말고도 하나 더 있다. 이곳에는 미국 본토에서 가장 높다는 휘트니 산(Mt. Whitney)이 있고, 앨라배마 힐즈는 그 휘트니 산 등산로 입구(Whitney Portal)로 가는 길 초입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휘트니 산은 북미 대륙의 등산가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경치가 좋기로 소문난 트레일 가운데 하나인 존 뮤어 트레일(John Muir Trail)의 종점이 되기도 한다. 이런 웅장한 산맥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앨라배마 힐즈의 풍경은 하이 시에라의 산군들과 대비가 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번 방문을 통해 알아낸 또 다른 사실은 이곳이 미국인들의 '아웃도어 라이프'에 적합한 곳이라는 것이다. 가도 가도 끝날 것 같지 않은 비포장 도로, 그 깊은 곳에도 사람들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바위 그늘에 의자를 놓고 걸터앉아 편안하게 휴식하고 있는 사람, 오프 로드를 즐기기 위해 OHV를 실은 트럭을 몰고 들어온 사람,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걸쳐있다. 돌무더기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나 있는 차가 드나들 수 있는 길, 그 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여지없이 자동차 한 두 대 정도 댈 수 있는 공간과 한 두 개의 텐트를 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이 거칠고 황무한 땅에 땅거미가 내려앉자 어느 틈 엔지 곳곳에 카메라 삼각대가 설치되고,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와 그 일행에 합류하는 또 다른 무리들, 그들은 이곳의 밤하늘에 촘촘하게 박힌 별을 따기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이다. 황무지 돌무더기 곳곳에 RV가 가득하고, 곳곳에 텐트가 들어가 있으며, 그곳에서 하룻밤 지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사방을 누비고 다니는 광경은 참으로 경이롭기까지 하다. 물 한 방울 없고 밤이면 영하의 기온에 몸을 움츠려야 하는 그 사막의 하늘 아래 많은 이들이 같은 목적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의 번잡한 웅성거림을 피해 그 비포장 길들 가운데서도 아주 깊숙한 곳, 사람들이 잘 가지 않을 것 같은 곳으로 한 시간여를 들어가 보지만, 차 한 대 주차할 만한 공간을 찾기 어렵다. 나름대로 오지라고 생각하고 포장도 안 된 자갈과 정리되지 않은 돌들로 덜컹거리는 길을 찾아들었건만, 겨우 겨우 널찍한 바위에 차 한 대 주차할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해가 기울자 찾아든 추위를 무릅쓰고 솓아오른 초승달, 순식간에 사라진 초승달 뒤로 한 무더기 별들이 하늘을 점령했다. 문학적 묘사가 무용지물이 될 무렵, 그 별들 중 몇 움큼을 사진기로 훔쳐보지만 여전히 성에 차지는 않는다. 아쉬운 마음으로 눈을 붙이다 몸을 사리게 하는 한기에 저절로 눈이 떠진다. 살짝 실눈을 뜨고 바라본 불그레한 하늘 저편 그 허허로운 바위산 너머로부터 아침이 오고 있었다. 잠들어 있던 바위들의 군상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숨을 쉬기 시작하더니, 느닷없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화들짝 놀라 부지런히 이곳저곳에 렌즈를 돌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사막 그 뒤켠 언저리를 이리저리 털털거리며 돌아다녔다. 아침 햇살은 볼 때마다 신비롭고, 경이롭다. 죽어있던 나무, 풀, 거친 돌덩이들도 아침 햇살을 만나면 마치 마술처럼 살아나 춤을 추기 시작한다.
[사진기 잡고 처음 별을 땄다. 생각만큼 잘 나오지는 않았지만, 기념으로 소개한다. 너무 탓하지 마시기를...]
[쌀쌀한 아침 공기를 가르고 저 멀리 해가 떠 오른다. 동녘이 붉게 물들자 세상이 조금씩 열린다. 아침 햇살을 받는 앨라바마 힐즈를 둘러보기 위해 부지런히 서둘렀다. ]
이런 거칠고 황무한 땅에도 가을이 찾아들었다. 햇살이야 어디 차별을 두는 법이 없지만, 계절은 돌아와도 느낄만한 무엇인가가 없다면 그저 스쳐 지나가기 일쑤다. 더구나 물 한 방울 나지 않은 거친 황무지에서 제대로 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곳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 황무지는 다른 곳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침 햇살에 사방이 춤추기 시작할 무렵, 그래서 그들이 맞이한 10월 어느 가을날 아침의 황무지에서 찾아낸 가을 풍경은 열매를 맺고, 낙엽을 떨구며 맞이하는 가을이 아니라 짧은 기간에 꽃을 피워 번식하고 이내 사라져 버리는 통에 사실은 가을인지 어떤지 잘 관찰해야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맞이한다. 그런 곳에도 역시 가을이 찾아와 짧지만 꽃도 피고, 무엇보다 햇살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바위며 덤불이며, 그곳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들에게 적절한 온기를 남긴다.
꿈을 꾸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어릴 적엔 참 많이도 꿈을 꾸며 살았다. 실제로 잠잘 땐 꾸지도 못하는 꿈을 멀쩡하게 눈을 뜨고 꾸던 꿈들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 경우는 손가락으로 셀 필요조차도 없을 만큼 아주아주 적었다. 그만큼 허황된 꿈을 꿨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꾸던 꿈들이 실현되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저 꿈을 꾸는 그 시간들이 재미있고 즐거웠을 뿐이다.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지금도 꿈을 꾸며 살고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살면서 어떤 원대한 꿈과 희망이라는 구름을 잡으려고 애를 써본 적은 없다. 그러나 꿈 자체를 꾸지 않은 것은 아니다. 꿈은 꾸되 기대는 하지 않음으로써 꿈을 꾸는 동안 마음이 평온해지고, 지금의 삶에 대한 긍정적인 힘이 생겨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건 어쩌면 '꿈'이라기보다는 '상상'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괜찮을 그런 정신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계절을 만끽하고 싶어 나선 길에서 즐겁고 유쾌한 경험을 했다. 사람들이 좀 덜 찾고, 발길이 뜸해 한적한 곳을 찾다 보니 뜻하지 않게 오히려 그동안 봐왔던 풍치와는 다르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조금 더 나은 경치를 만날 수 있었다. 앨라배마 힐즈의 뒤편 아주 먼 곳에 있는 몇 조각의 바위들과 그들 틈에서 가을을 맞이한 키 작은 생명들, 한적한 시골 마을 곁길로 들어서다 만난 앨라바마 힐즈의 새로운 모습들, 그리고 근사한 포장도로 한편에 난 작은 길을 따라 들어가 만난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던 생명들과 그 이웃들, 이런 기분 좋은 조우는 그동안 꿔왔던 꿈이 가져다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세상은 꿈을 꾸는 자의 것'이라는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유의 관점에서 본다면, 무엇인가를 소유해야 성공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가치에 따른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이라는 것이 과연 소유의 대상인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개인적인 관점에서 볼 때 꿈을 꾸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은 많은 소유나 명성 따위가 아니라,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즐겁다는 말이 거슬린다면 '행복'이라는 말로 바꿔도 좋을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또 꿈을 꾸려고 한다, 깊어가는 가을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