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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에 홀리다 Oct 05. 2017

떠돌이의 여행 일지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네바다... Valley of Fire Park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다'

일상에서는 물론이고 여행에서도 늘 느끼지만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매번 닥칠 때마다 새롭게 깨닫게 되는 사실,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계획하고, 준비하고, 조절해서 시작하지만 결과는 의도한 지점과 맞지 않거나 심하면 크게 벗어나 전혀 다른 결론에 다다르는 일이 빈번하다. 이럴 때마다 실망하거나 의기소침하게 되면 이게 연쇄반응을 일으켜 결국은 한번 앓고 나야 일어나게 되기도 하고, 아예 포기하고 다른 것을 시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게 비일비재한 일 중 하나라는 데 동의하고 긍정하고 나면 그다음은 쉽다. 좀 잊어버리기도 하고, 에너지를 다른 데 쏟거나 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볼 여력이 생긴다. 처음 상륙 예상지역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상륙한 플로리다 태풍 '어마'를 보면서 제아무리 앞선 과학기술을 활용한다고 해도 자연현상을 적확하게 예측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여실히 드러났다. 사실 이 정도의 어긋남은 잊어버리기 어려운 재해를 주기 때문에 극복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이런 정도까지 밀고 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쩌면, 오히려 당연하다고 인정하고 넘어가 보자.


주말이다. 모처럼 나들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지난 6월, 캘리포니아 중부에 있는 피너클스 국립공원(Pinnacles National Park)에 다녀오고 거의 석 달만의 외출이니 많이 설레는 마음을 안고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애리조나에 있는 튜바 시티(Tuba City)라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튜바 시티는 나바호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지역의 중심 행정 도시다. 말하자면 나바호 인디언의 수도쯤 되는 곳이다. 인구는 고작 일만여 명에 지나지 않지만, 뮤지엄이나 도서관, 각종 종교. 교육 기관 등이 골고루 갖춰져 있다. 튜바 시티는 그 밖에도 인근 2-3시간 거리에 크고 작은 관광 명소가 밀집해 있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 그랜드 캐니언 국립공원(Grand Canyon National Park)이 있고, 앤틸로프 캐니언(Antelope Canyon). 모뉴먼트 밸리(Monument Valley). 더 웨이브(The Wave). 마블 캐니언(Marble Canyon). 버밀리온 클리프 준국립공원(Vermilion Cliffs National Monument). 벅스킨 걸치(Buckskin Gulch), 캐니언 드 세이 준국립공원(Canyon De Chelly National Monument)...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명소가 밀집해 있다. 이번 여행이 이 도시를 목적지로 삼은 것은 아니다. 튜바 시티 인근에 있는 콜마인 캐니언(Coal Mine Canyon), 블루 캐니언(Blue Canyon), 하오노게 캐니언(Ha Ho No Geh Canyon) 등 오지(Backcountry) 여행을 계획했다.


'정말로 알 수 없다'

늘 하던 대로, 그러나 평소보다 좀 더 늦게 밤 10시 좀 넘겨서 주말여행을 출발했다.  먼 거리를 가야 하므로 중간 지점에서 한숨 자고 아침에 이어갈 예정이다. 이번 여행은 두 가지 기대를 안고 출발했다. 첫 번째는 오랜만의 여행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에는 벼르고 벼르던 사륜구동 차량을 장만했다(속으론 좋아서 막 웃음이 나지만, 겉으론 그럴 수만은 없다). 그러니 기대가 크지 않을 수 없다. 새로 산 차량 시험 운행도 할 겸 이번엔 여행지도 일부러 오지로 잡았다.

 

캘리포니아를 벗어나 애리조나에 접어들었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밖이 어두워 하늘이 어떤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구름이 조금씩 들어찬 듯 보였다. 비가 올 찬스가 조금 있다는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출발했으니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다. 낮은 수치로 찬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 세시로 기울고 있을 즈음 앞유리에 빗방울이 부딪치는 게 보였다. 속으로 흠칫 놀라기는 했지만, 그러다 말겠거니 하면서 계속 전진, 전진 멈출 수가 없다. 아! 그런데 눈을 부칠 휴게소에 가까워질수록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이내 장대비로 바뀐다. 밤 사이 내리다 그치겠지. 피곤한 눈을 붙이기로 했다. 몇 시간이나 잤을까,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이 깼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직 여섯 시가 채 되질 않았다. 목적지의 일기예보를 확인했다. 분명 어제는 낮았던 수치가 아침이 되니 많이 높은 수치로 비를 예고하고 있었다.


오지는 비가 오면 위험도가 높아지는 지역이다. 우선 포장되지 않은 도로가 젖으면 진흙탕이 되고, 자칫 차가 빠지면 제아무리 사륜구동이라 해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고생이야 사서라도 하겠지만, 전화가 터지질 않는 지역인 데다, 혹여 연결된다고 해도 토잉 비가 일천 달러가 넘는다. 그런 곳에서는. 그래서 비가 오는 날에는 아예 오지 쪽으로는 들어갈 생각을 말아야 한다....라고 오지 여행 선배들의 충고가 있었다. 동부 쪽에 닥친 태풍의 영향이 있었던 것일까? 빗줄기가 가늘어지질 않는다. 이번에는 이 충고에 따르기로 했다. 내리는 비의 양이 너무 많아 고생을 사기에는 너무 벅차다.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급히 검색을 해 보니, 세 시간 거리에 라스 베가스... 그래, 불의 계곡(Valley of Fire State Park)이 있었지! 그동안 몇 번인가 가려고 하다가 못 갔던 곳이다. 일단 그곳을 목표로 하고, 가는 도중 어디든 눈길 가는 곳에 들러 어슬렁 거리기로 했다. 다시 가다 서고, 서다 가고 그렇게 천천히 떠돌기로 했다.


후버 댐(Hoover Dam)

불의 계곡(Valley of Fire State Park)을 가는 데 세 시간 남짓 걸린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으면 되겠다 싶었다.  세찬 빗줄기를 가르며 힘껏 달려본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엔 여전히 서운한 마음이 남아있다. 날이 조금만 좋았어도... 아쉬움을 뒤로 보내고 싶지만, 잘 가지질 않는다. 괜스레 투덜거려본다. 오랜만의 빗줄기에 촉촉해진 풍경이 애리조나를 벗어날 즈음부터는 드문드문 햇살이 보이기 시작한다. 혹시... 잠시 차를 세우고 일기예보를 검색해 본다. 역시...

늘어나는 일조량에 덩달아 기분도 좀 나아진다. 어느 만큼 가다 보니 애리조나와 네바다의 경계 부근까지 왔다. 조금만 더 가면 후버댐(Hoover Dam)이 나올 거라는 이정표가 눈에 띈다. 후버댐이라... 사실, 이곳은 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던 곳이다. 궁금한 것도 별로 없고, 보고 싶은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절경을 자랑하는 곳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동안 후버 댐을 소개하는 글은 제목만 보고 넘어갔고, 관심 밖이었으니 유래니, 역사니 하는 것에도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바로 옆으로 지나간다는데 '한번 들러볼까?'하는 정도의 생각으로 잠시 둘러보기로 했다. 충주댐이나 소양댐, 대청댐 정도의 풍경이 있다면 모처럼 고국의 정취를 느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다른 쪽의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댐에 들어서면서 무엇보다도 그 크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댐 자체의 규모도 엄청나지만, 그동안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다 보니 생겨난 부대시설과, 관리용 부대시설 등이 자리 잡은 복합 시설은 그동안 봐왔던 어떤 댐보다(사실은 한국에서만 봤었지만) 큼지막했다. 곳곳에 차를 세우고 둘러볼 수 있는 곳이 있었지만, 한두 곳을 둘보고, 댐이 준공되고 나중에 세워졌다는 메모리얼 브릿지에 올라 댐 전체를 한번 돌아보는 것으로 후버댐 관광을 마쳤다. 처음엔 규모가 큰 데 놀라기는 했지만, 규모에 비하면 주변 경치가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 댐이 세워진 지형이 커다란 계곡이라서 주변 경치는 그 정도 선에서 보인다.  황량한 산이 있고, 그 사이를 흐르는 콜로라도 강이 있고, 강을 막아 세운 커다란 댐이 있으며 댐이 가둔 물이 이룬 널찍한 인공 호수가 있다는 정도.


높이가 주는 사물의 대상화는 종종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게 뜸하다. 이런저런 시도로 차츰 위로 올라가 내려다 보기를 반복하다, 이젠 손쉽게 자기 눈을 대신해서 높이를 훔칠 수 있도록 드론을 날린다. 비행체가 훔쳐온 높이가 마치 자기의 시선인 듯 그들의 이미지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 일상화되어가고 있다. 이런 일은 멈추질 않을 것이다. 아니, 좀 더 조절하기 편하도록 진화될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은 높이가 만들어내는 사물의 대상화를 통해 자신이 이루지 못하는, 혹은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대리 만족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같은 이유로 이곳에 세워진 메모리얼 브리지에 오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높다란 다리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후버댐과 그 부속 건물 단지, 댐이 만든 미드 호수(Lake Mead)는 바로 곁에서 보는 것들보다 훨씬 아담해 보이고, 간결해 보인다.


불의 계곡(Valley of Fire)으로 가는 길

길은 이어져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없애거나 희미하게 만든다. 그러나 자연의 필요에 의하여 이어진다면 모르겠지만, 인간의 필요에 의해 변형되어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은 생태적으로 볼 때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결국 인위( 人爲, Artificiality)는 크건 작건 어떤 식으로든 생태계에 영향을 미처 본래 그들이 지니고 있던 능력을 약화시킨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생태'의 포장을 입힌 결코 생태적이지 못한 것들이 난무한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웰빙이라는 인간의 현대적 욕구에 기대어 생산해내는 생태적이지 못한 상품들이 마치 인류의 희망 인양 포장되는 현실이다. 개인적으로 웰빙이나 웰다잉을 꿈꾸지 않는다. 다만 현재 내게 주어진 여건들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러다 보면 혼자 힘으로 어려운 것은 힘을 합치고, 힘이 남으면 나눠 사용하게 되고, 결과가 어떻든 그 결과물들을 통해 우리는 좀 더 나은 미래를 구축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미드 호수는 예상보다 컸다. 호수를 끼고 난 길을 한참 동안 달려도 끝이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사막지역이라 그런지 호수가 있는데도 주변에는 여전히 푸른빛이 거의 없다.


산으로 이어지는 구비구비 산길은 중간중간에 작은 주차 공간을 마련해 놓은 곳이 있다. 이곳에서 잠시 차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네바다 사막 지역의 경치가 뭐 아주 뛰어난 풍경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사막 지역의 특성상 곳곳에 붉은 사암 군이 있어서 세월이 빚어놓은 사암 조각을 둘러보는 재미도 좋다. 이곳은 '노스쇼어 서밋 트레일'의 시작점인데,  산길의 거의 정점인 곳에 있다 보니 주변을 조망해 볼 수 있는 곳이다.  


때로는 지루한 길이 이어지기도 한다. 산길이라고는 하지만, 산이 워낙 나무나 풀이 적은 지역이다 보니 황량하기 이를 데 없다. 네바다의 기후 특성상 낮은 지역은 물론이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온은 점점 더 올라간다. 노스 쇼어 트레일에서 정점을 찍은 산길은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올망졸망 도토리 키재기 하듯이 서있는 거무되되한 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음질하고, 언뜻언뜻 보이는 하얀 조각구름은 작열하는 태양을 농락하다 이내 사라져 버린다. 아침 시간인데도 열린 차창으로 들어오는 후끈한 열기가 만만찮다. 도대체 아침에 내렸던 그 많은 빗줄기는 어디에 있을까? 몇 마일 떨어지지 않은 그곳과 이곳은 마치 다른 나라다.


저만치 붉은 바위들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마침내 '불의 계곡'에 도착하나 보다.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좀 작아서 고개를 갸웃했지만, 불그레한 빛깔의 바위들이 널려있는 것을 보니 불의 계곡이 틀림없으렷다. 막상 도착하고 보니 예의 그 '불의 계곡'이 아니라, '붉은 바위 언덕(Redstone Dunes)'이라는 곳이다. 규모는 작지만 사암으로 된 붉은 바위들과 오랜 세월 풍화되어 형성된 기괴한 모양의  바위, 바위에 난 구멍들, 잠시 쉬어가기에는 그만인 곳이다. 불의 계곡의 예고편 정도랄까.


불의 계곡(Valley of Fire)에서 부는 바람

공원 안내 입간판이 보이고, 그 옆에 고즈넉하게 입장료를 내고 입장하라는 안내말이 친절하게 안내한다. '일반차량 입장료는 10불이니, 봉투에 넣어 통에 넣어주삼'.  돈을 넣고 페달을 밟으니 이내 방문자 센터가 보인다. 아담하지만 빛깔이며, 모양이며 주변 경관에 맞춰 디자인되었다. 센터 안에는 공원 지도 등 무료로 나눠주는 자료와 얼마간 돈을 내야 얻을 수 있는 자료들이 다양하게 비치되어있다. 공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방문자 센터 안에는 기념품 등을 판매하는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또 한편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공원을 소개하는 전시물이 있다. 특이하게도 이곳에는 이 공원에 서식하는 일부 동물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파충류 몇 종과 절지동물 몇 종을 산채로 전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박제인 줄 알고 가만히 살펴보는 데, 스멀스멀 움직이는 녀석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방문자 센터에서 볼 일을 보고 밖으로 나오면 펼쳐지는 풍경에 눈을 돌려보자. 공원 안에 있으니 당연하게도 공원의 풍경이 보이겠지만, 방문자 센터 부근의 풍경이 만만하지 않다.  입구 건너편 들판을 바라보니 근사한 붉은 바위들이 마치 외계 생물처럼 이리저리 얽혀 기묘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좀 전에 지나온 '레드스톤 듄'과는 규모면에서 비교하기 어렵다. 다시 눈을 돌려보니 근사한 시닉 드라이브(Scenic Drive)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본격적으로 불의 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렷다. 입구의 경치가 이 정도라면 안으로 들어갔을 때의 풍경이 어떨지 은근하게 기대된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무엇인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만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경치든 기념물이든 아니면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이든 말이다. 그렇다고 그곳이 해당 여행지에서 볼만한 것 가운데 최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그동안의 여행에서 배울 수 있었다. 때로는 사람이 적거나, 잘 다니지 않는 곳은 찾는 길이 험하거나 좀 불편할 수도 있다. 약간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면 기억에 남을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은 주마간산하고 사람이 적거나 아주 없는 곳을 눈여겨 살피기를 즐긴다. 그러다 보면 다른 이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좀 덜 뛰어나기는 해도 어쩐지 마음이 끌리는 풍경을 마주할 때가 있다. 사실 어디에 있든 정감 가는 곳은 있게 마련이다. 비록 여행지가 아니라고 해도 일상이 울적하고 고단할 때 편안한 마음으로 잠시 머물고 싶은 곳이 있다. 한적하든 복잡하든 상관없이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살면서 이런 곳을 한두 군데 마련해 놓는다면 사는 것이 훨씬 수월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길이란 참 묘한 존재다. 있으면 흉하기도 하고 멋진 풍경을 헤치기도 하는데, 없으면 그런 풍경을 만날 기회조차 얻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길이 없던 시절 산으로 들로 다니며 기록하고 그려서 후세에도 오래전 시절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게 했던 선조들의 노고가 새삼 감사하다. 딱히 누구를 지목하지 않아도 교통수단이 변변하지 못한 시절의 사람들이 다 그랬을 것이고, 그들이 무엇인가를 하려면 많은 수고와 애를 써야만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연에 흠을 내거나 상처를 입혀 좀 더 편안하게 다니려고 하기보다는 되도록 자연과 어울려 지내는 방법을 생각해 내고, 그들과 조화롭고 균형 잡힌 삶을 살고자 했다. 현대인들이 겪는 고통 가운데 많은 부분이 과거 우리의 선조들이 살던 방식을 버리고 편안한 길을 추구한 데서 온 대가성 고통이라는 데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내려다보는 경치와 올려다보는 경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나을까? 우문인 줄 알면서도 가끔씩 드는 생각이다. 위로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 분명히 내려다보는 경치를 선호하는 사람이 많다는 반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솟아오른 곳은 올라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런 곳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솟아난 부분에 올라야 볼 수 있는 경치가 있고 솟아난 부분에서 내려와야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 있다. 대상은 바뀌지 않는데, 대상의 관찰자가 바뀌면 풍경은 달라진다. 이에 못지않게 대상을 바라보는 위치가 어디냐,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디냐에 따라서 풍경은 또한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좋거나 나쁜 경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경치가 있는 것이고, 그 가운데 어느 쪽을 좋아하느냐의 문제다. 대상이 변하기도 하지만 관찰자 또한 변한다.


 큰 모래 언덕(Big Dune)을 발견했다

선물을 받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내용물이 무엇인지, 누구에게 받았는지는 크게 상관이 없다.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즐겁다. 아무런 특별한 일이 없어도 정성 들여 준비한 선물을 주고받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여행 중에 만나는 기대하지 않은 경치를 만나는 것은 이러한 선물과 같다. 여행이 늘 즐거울 수만은 없다. 때로는 고단하기도 하고, 때로는 짜증도 난다. 무엇보다 힘겨운 일을 만나 곤경에 처해 그야말로 진퇴양난인 경우도 있다. 그러면서도 길을 나서는 까닭은 어쩌면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풍경이 주는 선물 같은 즐거움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모래사막의 오묘한 빛깔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모래 언덕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야트막하더라도 모래 언덕 나타나면 멈추어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름도 거창하게 '빅 듄'이라는 이정표를 만났다. 먼발치에서 보기에 그리 커 보이지는 않지만 모래들이 모여있는 그곳을 보니 들리지 않고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들어가는 길은 비포장에다 중간에는 다른 이정표도 없고 모래 언덕에 접근할 수 있는 길도 보이지 않는다. 이정표가 있으니 모래 언덕으로 들어가는 길도 당연히 있겠거니 하면서 하염없이 갔다. 아무리 가도 모래 언덕으로 들어가는 길은 보이지 않고 들어온 길은 계속 이어졌다. 중간에 돌아서서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니 여기저기 불규칙한 자동차 바퀴 자국만 어지럽게 나있었다. 그것을 보고 알았다. 샌드 듄까지 가는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듄까지 가는 동안 한두 번 모래에 빠졌다가 사륜의 힘을 빌어 빠져나왔지만, 모래 언덕에 가까워질수록 많아지는 모래의 양을 감당하기에는 사륜 구동을 다루는 솜씨가 부족했다. 멀찌감치 주차하고 걷기로 했다. 고운 모래 알갱이, 밤색을 띠는 모래밭, 그리고 커다란 봉우리가 이 듄의 특징이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사막에서도 먹을 것이 있는지 새들이 저공비행을 하며 기회를 보고 있다. 적막하기만 했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스산함을 더한다. 빛깔이 주는 느낌 때문인지 사뭇 다른 분위기다. 천천히 언덕을 오르다, 허리를 숙여 모래를 한 줌 집었다. 아, 그래! 고운 모래가 주는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한 느낌, 마치 어릴 적 안겨 느끼던 엄마 품의 그 따스함과 같은 결이다. 이 때문일까? 여기저기 모래 언덕을 찾아도 질리지 않는 까닭이.


사막은 기후 조건 때문에 서식하는 동물이나 식물의 개체수가 극히 적다. 그런데도 사막은 여전히 그곳에 적응한 동식물들의 보금자리며,  제한된 환경을 이겨낸 생물들의 놀이터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고는 한다. 모든 존재는 각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재능으로 생존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한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하찮아 보이는 작은 생명들의 활동이 실은 그들의 생존을 위한 활발한 움직임이라는 사실을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을지언정 마음으로 느끼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그 척박한 모래 위에서 걷기를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여 보자. 잠시 눈을 감고 세차게 부는 모래 바람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그들의 운동을 생각해 보자. 마음을 모으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람이 흔들고 지나간 자리에 또 다른 흔적은 없는지 살펴보자. 이 지점이 아닐까? 그들이 단지 대상이 아니라 함께 이 땅에 살아가며 이 모래밭을 지켜내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회귀 Regression

여행의 끝은 항상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또 다른 일상들이 놓여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일상을 떠나 여행으로 돌아가는 꿈을 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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