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에 홀리다 May 15. 2020

캘리포니아의 비경, 카리조 플레인

캘리포니아 카리조 플레인 준국립공원(Carrizo Plain NM)의 봄

봄이 되면 꽃이 피는 것은 당연한 자연현상이다. 맞는 말이다. 봄만 되면 꽃이 만발한 곳을 찾아다니느라 바쁘다. 꽃이 많은 곳도 있고 적은 곳도 있으므로 여기저기 다닌 경험을 살려 이리저리 검색도 하고, 유추하기도 해서 꽃구경을 다니고는 한다. 꽃이 예쁘게 보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봄이 되었다고 해마다 꽃이 피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가꾸는 꽃이 아니라 기후 조건에 기댈 수밖에 없는 들꽃은 더욱 그렇다. 겨울에 얼마나 비가  내렸는지, 꽃 필 때 얼마나 햇빛을 받는지, 날씨는 얼마나 따뜻한지, 더욱 중요하게는 꽃 필 무렵 내리는 비에 따라 꽃이 필는지, 피면 얼마나 필지가 결정된다. 거기에 꽃이 피더라도 어떤 꽃이 피는지는 또 다른 조건이 개입되는 모양이다. 왜냐하면 동산을 수놓는 꽃의 빛깔이 해마다 다르고, 같은 지역이라고 해도 해마다 그곳을 장식하는 꽃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카리조 플레인에 있는 목장지대


캘리포니아 중부, 베이커스 필드에서 서쪽으로 두어 시간, 엘에이에서는 북쪽으로 세 시간 거리에 '카리조 플레인 준국립공원(Carrizo Plain National Monument)'이 있다. 이곳은 샌 안드레아스 단층을 관찰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졌고, 이 단층 때문에 생긴 분지에는 '소다(Soda)'라는 소금 호수가 있다. 이 호수는 물이 괴기는 하지만, 밖으로 나가는 길이 없어 소금기가 쌓였다가 가뭄에 호수가 마르면 하얗게 속살을 드러낸다.


그러나 카리조 플레인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까닭은 따로 있다. 봄만 되면 이 거대한 평원과 평원을 둘러싼 산에 들꽃이 흐드러져 정신없기 때문이다. 마치 물감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알록달록 꽃들이 무리를 이뤄 주변의 동산과 평원은 한 폭의 그림보다 더 아름답고 신비하다. 때마침 호수가 말라 하얀 속살을 드러냈다면 신비로운 느낌은 더 커진다. 새하얀 소금밭을 전경으로 꽃이 핀 풍경을 담으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는 하는 곳이다. 이곳은 다른 지역보다 봄꽃이 좀 늦게 피고는 하는데 사람들은 다른 곳에 꽃이 시들해질 무렵부터 이곳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보통 해마다 3월 중순부터 꽃이 피기 시작해서 4월 말, 5월 초에 흐드러진다.


2019년 4월 초순, 절정에 조금 못 미쳤는데도 꽃은 이미 한가득이다.


지난 해만 해도 2017년의 슈퍼 블룸에는 못 미치기는 했지만, 수월찮게 많은 꽃이 폈었다. 이곳을 장식하는 꽃은 대체로 노랑이 많지만, 그 사이사이 보랏빛과 분홍빛, 때로는 밝은 빨강의 꽃들이 섞여있다. 이렇게 자연이 연출하는 풍경을 즐기기 위해 해마다 봄만 되면 많은 이들이 여기를 다녀가고는 한다. 더구나 분지의 양쪽에 있는 산에서는 노지 캠핑이 가능하므로 자연을 벗 삼아 캠핑하면서 봄이 베푸는 은혜를 즐기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올해는 곳에 따라 듬성듬성 꽃이 피기는 했지만, 예년처럼 온 들녘을 물들일 만큼 꽃이 피지 않았다. 지난 겨울비가 적었던 것이 결정적인 까닭일 것이다. 들꽃이 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적절하게 비가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와 올해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차이가 분명하다. 마치 컬러 사진과 흑백 사진처럼 보이는 대비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또렷하다.


사진 왼쪽이 지난 해 풍경이고 오른쪽이 올해의 풍경이다.


그렇다고 이 넓은 지역에 꽃이 전혀 없을 리는 없다. 다만 예년처럼 무리 지어 피지 않았을 뿐 봄을 알리는 꽃은 여기저기서 머리를 내민다. 눈을 크게 뜨고 다니다 보면 가끔씩 눈에 띄는 꽃들이 있다. 주로 지표 식물들이기는 하지만, 그들에게도 꽃이 있으니 꽃이 아주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가끔씩 보이는 꽃들이 더 귀하고 예쁘게 보인다. 예년에는 미처 느껴보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사람이 꽃을 좋아한다고 꽃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존재 의미가 있을 터, 그들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지는 않으므로 꽃이 피고 지는 것은 사람 사는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한 식물 개체의 일생에서 꽃이 하는 역할은 번식을 위한 수분에 있다. 실패하지 않고 수분하여 더 많은 개체를 번식하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진화를 거듭한 결과가 오늘날의 꽃의 모습이다. 아주 교묘하고 은밀하게, 때로는 탄성이 터질 정도로 지혜롭게 진화해 왔다. 꽃은 사람과는 별 관계없이 진화해왔고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으므로 그들의 피고 짐이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요즘 들어 주변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인간이 자연에 영향을 주고 그에 적응하느라 진화를 거듭해온 식물들도 있다.  


아주 작은 구역에는 특정 풀꽃이 빼곡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듬성듬성 꽃이 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아주 특이한 경험할 때가 있다. 어떤 지역을 살피다 보면 대체로 비슷한 지형에 비슷한 식물 분포를 보이는데, 그런 가운데서 아주 특이한 곳을 발견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번에도 그런 곳이 있었다. 대평원의 아주 구석진 곳, 전체 넓이로 보면 손톱만큼 밖에 안 되겠지만 나름 꽤 넓은 동산에 예년에 버금갈 만큼 꽃이 흐드러졌다. 꽃의 종류는 다르지만  온 동산을 물들인 노랑의 물결이 넘실대는 것을 보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노랑으로 이어진 길섶엔 가끔씩 다른 빛깔들이 섞여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는 풍경에 흥미를 더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빛깔이었다면 자칫 지나칠 수도 있는 풍경에 다른 빛깔, 다른 모습을 한 것들이 섞여있어 눈길을 끌어 가던 길을 멈추게 된다.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사람도 이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요즘처럼 어렵고 힘든 시기를 지나는 모든 이들이 서로의 차이와 다름을 인정해주고 위로해 준다면 어렵지만 잘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 아직은 앞이 잘 보이질 않는 나날이다. 어쩌면 그동안 유지해온 많은 것들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하며, 변화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힘에 적응하기 위해 몸을 바꾸고 빛깔을 바꾸고 냄새도 바꿔 살아남은 식물들이 있듯이 바야흐로 우리의 삶도 그동안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 같다. 진화가 시작됐다고도 할 수 있는 이번 일로 사람이 진보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꽃구경을 다녀와서 마냥 즐거워할 수만 없던 까닭이다.


드넓은 카리조 플레인, 먼 구석에 흐드러진 노랑 무리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