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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에서 미국으로. 두 번째 국제이사가 정해졌을 때 내겐 한가지 숙제가 생겼다. 그건 바로 여행이었다. 친구들이 주말마다 유럽 곳곳 여행을 다닐 때 나는 매번 다음을 기약해 왔다. 내 타고난 기질이 영역 동물에 가깝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막연히 스위스에 오래 살 것 같아서 굳이 시간을 쪼개 여행을 다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다 미국행이 결정되어 스위스에서의 시간이 단 3개월만 남게 된 것이었다. 2년 전 스위스로 올 때 샀던 여행책을 옆에 두고 노트북을 열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빈 메모장에 네 글자를 적었다 “체르마트”. 그곳에 어떤 역경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땐 아직 알지 못했다.
물론 나는 비루한 내 체력과 담력을 알았기에, 산악열차 타고 구경이나 하자 싶었지 딱히 등산이나 액티비티를 생각하진 않았다. 계획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남자 친구와 함께 여행하게 되면서였다. 평소 하이킹을 좋아하는 그에게 유럽 최고 명산에 가는데 등산하지 않겠다는 건 목욕탕에 가서 목욕은 안 하고 바나나 우유만 마시고 오겠다는 말과 같았다. 그는 날씨가 좋으면 패러글라이딩도 하자며 의욕이 넘쳤다. 나도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체르마트 여행일 수도 있다 생각하니 남들 하는 거 나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졌다. 그렇게 내 인생에 없을 것 같던 패러글라이딩을 예약하게 되었다.
예약 당일 아침이 되자 그제야 현실감이 들었다. 제발 눈이 내려 예약이 취소되길 바랐지만, 새벽부터 맑게 개 마터호른 봉우리가 선명하게 보였다. 사진 찍으며 연신 예쁘다 소리를 지르면서도 입술이 바짝 말랐다. 이미 내 이삿짐들은 배에 실려 떠난지라 남은 겨울옷이 많지 않았다. 내복을 겹겹이 껴입고 바지는 수면바지를 입었다. 등산화도 없어서 급히 사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패러글라이딩 업체에서 등산 장화를 빌려 신을 수 있었다. 산악열차를 타고 패러글라이딩 장소인 전망대로 올라가는데 창밖으로 설경이 펼쳐져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전망대에 도착하자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바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려도 봤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날씨는 그대로였다. 패러글라이딩은 결국 취소됐고 남자 친구는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나는 드디어 내려가는 기차에선 풍경을 좀 즐길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러던 차 남자 친구가 말했다.
“눈이 많이 왔으니 스노우 하이킹해서 내려가면 좋겠다!!”
남자 친구가 스노우 하이킹을 종종 다닌 건 알고 있었다. 눈 때문에 등산로는 폐쇄됐지만, 강제성은 없어서 스위스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등산하러 다니는 것도 알고는 있었다. (그들은 걸음마도 떼기 전에 부모 등에 업혀 등산을 시작한다. 함부로 따라 하지 말 것) 얼결에, 등산로의 입구에 들어섰는데 온통 새하얀 가운데 사방이 고요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가가 뜨끈해졌다.
‘엄마…….’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오자 그제야 나도 남자 친구도 내가 무리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뱁새의 ‘남들 다 하는 것’ 따라 하기는 거기까지였다. 눈물 콧물을 내복 소매에 훔치고 체크무늬 수면바지를 휘적이며 다시 기차에 올랐다.
마을에 내려오니 화창해서 산 위의 눈보라가 꼭 거짓말 같았다. 패러글라이딩 사장님은 눈이 오지 않은 하이킹 코스를 추천해 주셨다. 여행자를 위한 Culture Trail이 볼거리도 많을 것 같아서 우리는 그 코스로 향했다. 내겐 그 ‘여행자용’ 코스도 상당히 어려웠다. 남자 친구가 등 뒤에서 밀어주고 가파른 길에선 거의 세 걸음 마다 한 번씩 쉰 것 같다. 도착지로 생각한 케이블카 승강장에 너무 늦게 도착해 버려서 다시 숙소에 돌아갈 땐 악명높게 비싼 체르마트 택시를 타야 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숙소에 도착한 후 남자 친구가 치즈 라면을 끓여줬다. 뜨끈한 라면 국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나는 지금이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구나 싶었다.
나는 스위스에서 2년을 살았지만, 두 달 유럽 여행 다녀온 친구들보다 더 적게 여행했다. 안 가본 곳들을 떠올리면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나는 스위스에서 살았던 집을 정말 좋아했고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내 스위스 생활의 하이라이트였다.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체르마트 하면 나는 치즈라면 국물이 떠오른다. 어쨌든 스위스 치즈를 넣었고 내가 좋아하는 삼양 라면이었으니, 스위스답고도 나다운 여행이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