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과 위치

<무제>라는 제목이 가진 느끼함

by 이민용

평생을 미술과는 전혀 관계되지 않은 채 살아온 사람이 추상미술을 도전한다는 것은 상당히 무모하다.

현대 미술은 이제 아름다운 컬러, 획기적인 재료 사용으로는 관객을 설득하기 어렵다.


현대 미술은 메시지 전달의 역할을 크게 한다.

앞선 글에서 계속 말했듯이 개념미술은 수필 혹은 철학에 가깝다.


이 글에서는

시각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술을 시각 미술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미술을 개념 미술이라 정의한다.

시각 미술을 추구하는 작가와 관객은 현재에도 아주 많다.

미술을 처음 배우는 사람이나 배우지 않는 사람이 시각 미술을 추구하는 특징은 어쩌면 자연적 특성으로 보일만큼 당연하다.


다만 개념미술은 조금의 공부와 미술가로서의 경험이 쌓이고 작품 작업을 시작해도 늦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하길 바란다.

초등학생이 선을 하나 그은 것과 미술가가 선을 하나 그은 것이 사실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관람객을 설득하려면 작가 자체가 작품의 한 요소가 되어야 한다.

작가는 어떻게 해야 자신의 내면, 가치, 정서를 관람객들에게 직접적으로, 깨끗하고 순수하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깨끗한 미술을 위해 외부의 요인이 사라져야 한다.

명예, 자본, 상품, 선입견, 고정관념과 같은

외부 요인이 작가에게 주입되면

관람객은 작가의 내면을 순수하게 경험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작가는 기로에 놓인다.

자본을 택해 상품이 될 것인가 작품을 택해 진정한 예술이 될 것인가.

자신이 개념미술을 하고자 하고, 하고 있다면

작품을 택한 예술가가 되기를 추천한다.


자본을 버리고 숲으로 들어가 야만인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그 정도를 달리 하라는 뜻이다.


소금 한 꼬집을 넣어도 소금물이고 소금 한 통을 들이부어도 소금물이다.

하지만 소금을 한 꼬집 넣은 물은 경험자가 마셨을 때 소금물이라고 느낄 수 없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자본 없이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금은 맛볼 수 없다.

결국 모든 미술은 모방이며 매개체일 뿐이다.


짠 돌 덩어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농도 높은 소금물을 추구하자


작가는 내면 그 자체보다는

농도가 높은 미술을 추구하며, 현실을 인정하며 현실 속에서 관람객을 진정으로 체험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림 그리는 게 있어 보여서, 과시하기 위해

하는 건 기술이지 미술이 아니다.

자신의 이름과 명예라는 외부요인으로 완성된 작품은 현대미술이 아니다.

명예와 고결한 정신은 그것들을 가장 멀리하고 순수할 때 뒤따라 올 것이다.

명예와 고결한 정신으로 순수함을 얻을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 더 많이 판매되고 전시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작가의 이름값보다는 그 이름이 보증할 것이라는 신뢰를 통해야 한다.


그래서 인디 음악가, 청년예술가, 무명작가, 무명 배우, 독립 영화가 높은 곳을 추구하고 깨끗한 가치를 추구한다고 평가받는 것이다.

보증도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진실로 연기와 극을 사랑하고 미술을 사랑하고 영화와 연출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분야이다.


무제를 멀리하라

고결한 사고 없는 무제는 느끼한 기름 덩어리에 불과하다.



자신의 작품의 제목을 무제라고 하고 싶다면

왜 무제여야 하는지 고민한 후에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열린 해석, 열린 결말 같은 1차원적인 결론 대신 무제라는 제목에 타당성을 조금이라도 더할 고민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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