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를 굴라쉬로 바꿔도 숨겨지지 않는 것은
정유정은 한국 문학계에서 신작 소식 만으로도 화제를 불러 일으키는 작가다. '내 심장을 쏴라', '28', '7년의 밤', '종의 기원'까지 작품 다수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각종 콘텐츠로 2차 창작됐다.
오랜만에 내놓은 작가의 신작은 다수 문학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았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 어떠한 스포일러도 밟지 않고 오직 '정유정'이라는 이름 값 하나로 책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스포일러를 전혀 밟지 않았던 점이 오히려 독이 된 듯 하다.
스릴러 문학의 핵심(?)이라 불릴 수 있는 범인의 정체는 1장을 채 끝내기도 전에 드러난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 또한 캐릭터가 살아있어서, 범인과 범행동기가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책을 붙들어 둘 수 밖에 없는 매력을 지닌다.
그런데 중반부부터 이 책을 넘기기가 상당히 찝찝해진다. 이유는 이 이야기가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장식했던 실제 사건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아니 거의 일치한다. 사실 첫번째 사건이 펼쳐질 때만 해도 '모티브'만 따 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지만 두번째 사건이 일어나자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어졌다.
물론 소설 속 이야기가 '허구'라는 점은 책을 읽다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작가도 작가의 말을 통해 이렇게 전한다. '그 누군가의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지면을 빌려 밝혀둔다. 이야기를 태동시킨 배아이긴 하나, 그 밖의 요소는 소설적 허구다. 플롯도, 인물도, 시공간적 배경도, 서사도.'
하지만 명백한 피해자가 존재하는 사건이다. 특정 사건과 지나치게 유사한 플롯이 과연 '소설적 허구'라는 이름만으로 부정적 반응을 피해갈 수 있을까?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밝혔다지만, 이 책을 읽고 그 사건을 떠올리지 않는 독자가 있을까. 순서를 바꿔 실제 사건이 아니었다면, 과연 이 소설이 나올 수 있었을까.
작가는 극중에서 주인공의 이야기를 주인공 관점에서 서술하지 않는다. 이는 결국 주인공의 이야기가 소설에 나온다면, 어떻게든 주인공을 입장을 설명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독자는 제 이야기를 하는 인물에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다. 그게 비록 악인이라도 말이다. 이는 결국 이 소설이 실제 사건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매우 유사한 사건이 존재하는데, 그 범인과 유사한 행동을 한 소설 속 범인이 자유롭게 제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었을까.
게다가 아무리 주인공이 제 이야기를 직접 하지 않더라도. 어쨋거나 주인공에거 통제당하고 학을 뗀 주변 인물들의 입에서 나오는 주인공은 매력적이게 묘사될 수 밖에 없다. 속을 모르고, 주변인을 통제할 만큼 가스라이팅에 능하며 다른 사람들은 감히 상상도 못하는 일을 실현시킨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설이 악인을 다루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 책은? 너무나 현실의 범인을 생각나게 한다는 것이 문제다.
스릴러 장르 중에서 꽤 많은 창작물이 현실의 사건을 다룬다. 인간의 창작 활동보다 더 잔인한 일이 벌어지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몇몇 추리 소설 중에서도 읽다 보면 아 혹시 '그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 온 게 아닐까 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상처가 봉합되기엔 너무나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아동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다뤄진다는 점에서 이 책에 대한 찝찝함은 한 동안 오래갈 듯 하다.
ps : 궁금증이 생겨서 '유족' '허락' 이라는 키워드를 넣어 검색해봤는데...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신 독자분들도 꽤 많은 것 같다